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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임전무퇴의 용사들

기자명 법보신문

“충신과 의사는 죽을 수 있어도 굴하지는 않는다”

원광, 임전무퇴 강조한 이후
신라 청년들 죽음으로 실천


“이 몸 나라 위해 바치겠다”
죽음 마다않고 기꺼이 순국

 

 

 

▲신라 진평왕 때 고승인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앙에게 준 임전무퇴의 교훈은 신라 청년들 가슴에 새겨졌고, 그들은 죽음으로써 이를 실천했다. 사진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의 금곡사지원광법사부도탑. 문화재청 제공

 

 

임전무퇴(臨戰無退), 전쟁에 임하여 물러나지 말라. 이는 원광이 귀산 등에게 준 세속오계 중의 한 교훈이었다. 귀산과 추항은 이 가르침을 죽음으로 지켰다. 이로부터 임전무퇴계는 신라 청년들의 가슴에 새겨졌고, 죽음으로 이를 실천했던 여러 사례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624년(진평왕 46) 10월에 백제군사가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혈책 등 6성을 포위했다. 3성은 함락되거나 항복했지만, 눌최(訥催)는 봉잠, 앵잠, 기현 등 세 성의 군사를 합해서 굳게 지켰다. 구원병까지 돌아간다는 소식에 그는 분개하며 말했다.


“봄날의 따뜻한 기운에는 모든 초목이 꽃을 피우지만 추위가 닥치면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늦게 낙엽진다. 지금 외로운 성에 구원이 없어 날로 더욱 위험하다. 지금이 바로 진실로 뜻있는 병사와 의로운 사람이 절조를 다 바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때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병졸들이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고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눌최와 군사들, 그리고 눌최의 종까지도 성이 함락되는 순간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647년 10월 백제의 장군 의직(義直)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 감물, 동잠 세 성을 포위했다. 김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으로 막았으나 사기가 떨어지고 힘이 빠졌다. 김유신은 부하 비녕자(丕寧子)를 불러 말했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용기를 내고 기이함을 보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겠는가?”
비녕자가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지금 수많은 사람 중에 오직 저에게 일을 맡기시니 저를 알아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죽음으로서 보답하겠습니다.”


그는 적진으로 나가면서 종 합절(合節)에게 당부했다.
“내 아들 거진(擧眞)도 나를 따라 죽으려 할 것이다. 만약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죽으면 집사람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수습하여 돌아가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적진으로 달려들어 몇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그 아들 거진도 적진으로 달려가려 할 때 종 합절이 말고삐를 잡으며 말렸다.
그러나 거진은 말했다.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구차하게 살면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


칼로 합절의 팔을 쳐 끊고 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죽었다. 종 합절도 함께 죽었다. 이를 본 신라군이 분발하여 적을 쳐서 3천여 급을 베었다. 의직은 한 필의 말로 돌아갔다.


655년 8월 백제 고구려 말갈 군이 연합하여 신라의 33성을 함락했다. 이에 분개한 신라가 백제를 치려고 김흠운(金歆運)을 낭장대감으로 삼았는데, 백제 땅 양산(陽山) 아래에 진영을 설치하고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고자 했다. 백제가 밤에 공격해 왔다. 흠운이 말을 타고 대적하니, 전지(詮知)가 달래면서 말했다.
“지금은 지척을 구별할 수 없는 어둠 속이니 공이 비록 죽더라도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흠운이 말했다.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했으니, 사람이 알아주고 모르고는 한 가지이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랴.”

그리고 꿋꿋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는데, 따르는 자들이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했지만 흠운은 적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 적득(狄得)이 함께 전사했다.
보기(步騎) 당주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그는 귀한 신분에 영화로운 자리에 있어서 사람들이 아끼는데도 오히려 절조를 지켜 죽었는데,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 있어도 별 이익이 되지 않고 죽어도 별 손해가 되지 않는 존재이다.”
드디어 적에게 덤벼들어 몇 사람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김흠운은 젊은 날 화랑 문노(文奴)의 낭도였다. 당시 낭도들이 말하기를 아무개는 전사하여 그 이름이 지금까지 남았다고 하자 흠운도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과 같이 되고자 했다. 이를 본 승려낭도 전밀(轉密)은 말했다.
“이 사람도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는 전쟁에 임하여 물러나지 않았고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던 평소의 각오를 실천에 옮겼다. 당시 사람들은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그를 애도했다.
660년 10월 고구려군이 칠중성(七重城)을 포위하고 20일 동안이나 공격했다. 필부가 성을 지키고 싸운 지 20일이 되자 고구려 장수가 철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반역자 비삽(比)이 성내에 식량이 다했음을 몰래 적에게 알리자 고구려군은 다시 공격해 왔다. 필부(匹夫)가 이를 알고 비삽의 머리를 베어 성 밖으로 던지면서 외쳤다.
“충신과 의사는 죽어도 굴하지 않는다.”

그는 몸이 찢어지고 팔다리가 잘리어 피가 뒤꿈치를 적실 정도가 될 때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비녕자 부자 ·흠운·소나 등
죽음으로 전쟁 승리 이끌어

 

김유신, 아들 살아 돌아오자
임금에게 “목 베어라” 건의


675년 봄, 신라 아달성(阿達城)의 백성들은 모두 성을 나가 밭에서 삼을 심고 있었다. 말갈군이 이 틈을 타서 성으로 들어와 약탈함에 노인과 어린 아이들이 어쩔 줄 몰랐다. 성주 소나(素那)가 맞서 싸우기를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했다. 소나는 몸에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 같을 때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소나의 아버지 심나(沈那)는 백제인들에 의해 ‘신라의 나는 장수’로 불릴 정도로 용맹했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국가에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소나는 평소에 말했다.


“장부는 진실로 마땅히 싸우다가 죽어야지 어찌 병상에 누워서 집 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소나의 아내는 조문 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남편의 죽음은 평소 그의 뜻과 같이 된 것이다.”


684년(신문왕 4) 11월에 고구려의 나머지 무리인 실복(悉伏)이 보덕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김영윤(金令胤)을 황금서당(黃衿誓幢)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아 이를 토벌하도록 했다. 영윤은 660년 왕산벌 전투에서 죽은 반굴(盤屈)의 아들이자 김흠춘(金欽春)의 손자였다.
여러 장수들은 실복이 지치기를 기다려서 공격하자는 의견에 따라 잠시 물러났지만, 오직 영윤만은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싸우려 했다. 영윤은 말했다.


“싸움에 다다라 용맹이 없어서 안 된다는 것은 예기(禮記)에서 경계한 바요, 진격만이 있고 퇴각이 없는 것은 사졸의 정해진 분수인데, 장부가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 어찌 반드시 여러 사람의 의견에 따른단 말이오?”


그리고 그는 적진으로 달려가 싸우다가 죽었다. 진격만이 있고 물러남이 없는 것이 사졸의 정해진 분수라는 영윤의 말은 임전무퇴와 다르지 않다.
684년 보덕성에서 일어난 실복의 난 진압에는 핍실(逼實)도 귀당(貴幢)의 제감(弟監)이 되어 출전했다. 핍실은 출전에 임하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나의 두 형이 이미 나라 일에 죽어 이름을 길이 남겼는데, 나는 비록 어질지 못하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겠소? 오늘이 그대와 살아서 헤어짐이요 결국 사별일 것이니 상심하지 말고 잘 있으시오.”


과연 그는 적진에 맞서자 홀로 앞에 나가 용감히 싸워 수십 명을 목 베고 죽었다. 핍실에게는 형 부과(夫果)와 취도(驟徒) 등이 있었다. 취도는 일찍이 출가하여 도옥(道玉)이라는 법명으로 실제사(實際寺)에 있었다. 655년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신라의 서북변 33성을 공격함으로서 신라가 위기에 처하자 도옥은 승복을 벗어던지고 군복을 입고 이름을 취도로 바꾼 뒤 병부에 나아가 삼천당(三千幢)에 속하기를 청하여 전선으로 나가 싸우다가 죽었다. 부과는 671년 웅진 남쪽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했는데 그 전공이 제일이었다.


문무왕 12년(672) 신라와 당의 석문 전투에서 신라군이 패하여 장군 의문(義文) 효천(曉川) 등이 죽었다. 이때 김유신의 아들 원술(元述)은 비장(裨將)이었는데, 그도 또한 적진으로 달려가려 했다.
부관 담릉(淡凌)이 말렸다.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을 곳을 가리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만약 죽어서 성공함이 없다면 살아서 훗날의 성공을 도모함만 못할 것입니다.”
원술은 말했다.
“사내는 구차스럽게 살지 않는 것인데, 내가 장차 무슨 면목으로 우리 아버지를 뵙겠느냐?”
말을 채질하여 적진으로 달려가려 할 때 담릉이 말고삐를 잡고 놓지 않음으로 마침내 싸워 죽지 못했다. 대장군들은 남몰래 서울로 돌아왔다.


대왕은 이 소식을 듣고 김유신에게 물었다.
“군사들이 이와 같이 패전했으니 어찌하겠소?”
김유신이 답했다.
“당나라 사람들의 계책은 헤아릴 수 없으니 마땅히 장수와 군사들을 요해지에 수비시키도록 할 것입니다. 다만 원술은 임금의 뜻을 욕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가정의 훈계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김상현 교수

그러나 국왕은 원술에게만 중한 벌을 줄 수 없다고 용서해 주었다.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 어머니를 뵙고자 했지만 어머니 또한 만나주지 않아 원술은 탄식했다. 이처럼 원술은 석문전투에서 진격하지 않은 채 살아서 돌아왔다는 이유로 아버지도 어머니도 만나지 못하고 탄식해야 했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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