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원효
30. 원효
  • 법보신문
  • 승인 2011.08.23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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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의 시대에 화해와 평화를 꿈꿨던 대자유인

경산 압량군 불지촌서 탄생
15세 때 출가해 수행 전념


도반 의상과 당 유학길에서
시체 썩은 물 마시고 대오

 

 

▲원효는 평생 밤을 지새우는 학문생활과 거리를 누비는 교화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의 삶을 불살랐다. 그림은 이종상 화백이 그린 원효대사 표준 진영.

 


원효(元曉)의 성은 설씨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 아버지는 담내(談)이었다. 담내는 지금의 경산인 압량군 불등을촌에 살았다. 어머니는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했고, 만삭이 되어 밤나무골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히 분만했는데, 오색구름이 주위를 덮었다. 이렇게 원효는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 진평왕 39년(617)에. 그는 오색구름을 타고 이 지상으로 온 하나의 별이었고, 어둠을 밝힐 불덩어리였으며, 희망찬 새벽이었다. 아버지는 아이의 이름을 서당(誓幢)이라고 지었다. 불등을촌은 원효를 배출한 인연으로 해서 불지촌(佛地村)으로 불렸고, 그 밤나무는 사라수(娑羅樹)라는 이름을 얻었다. 원효의 탄생을 붓다의 출현에 비견하여 붙인 이름들이다.


원효의 젊은 날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송고승전’의 기록에 의해서, 그의 출가 시기가 15세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랴.”
원효의 저술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의 이 구절에는 젊은 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수행에 몰두하던 구도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원효는 낭지(朗智), 혜공(惠空) 등으로부터 배운 적이 있다. 울주 영취산에 살면서 ‘법화경’을 주로 강의했던 고승 낭지는 사미(沙彌) 시절의 원효를 지도했다. 원효는 이 산의 반고사(磻高寺)에 머물며 자주 낭지를 방문했고, 낭지는 원효로 하여금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토록 했었다. 7세기 전반의 고승 혜공은 만년에 오어사(吾魚寺)에 살았는데, 원효는 매번 혜공을 찾아가 질의했다. 혜공은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대중을 교화하던 무애도인이었다. 원효가 만났던 승려 중에는 대안(大安)도 있었는데, 그 또한 일정한 거처 없이 시중에서 대중을 교화했던 거리의 교화승이었다. 원효에게는 참으로 좋은 벗이 있었는데, 의상(義相)은 그의 도반(道伴)이었다. 의상은 원효에 비해 8년이나 후배고, 출신도 성격도 수행 방법도 전공 분야도 달랐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으로 친했던 진리의 벗이었다.


650년(진덕여왕 4년), 34세의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의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은 현장(玄)을 흠모해서 그 문하로 가고자 했던 것이다. 신라를 떠난 원효와 의상은 멀리 요동에 이르렀는데, 변방의 순라군에게 정탐자로 오해되어 수십일 동안 갇혀 있다가 간신히 신라로 돌아왔다. 현장이 주도하고 있던 장안의 새로운 불교학풍을 접하고자 떠났던 구도의 먼 길, 그 길에서 원효는 뜻하지 않은 시련과 좌절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 후 10년 세월, 원효에 관한 기록은 또 침묵하고 있다. 30대 후반으로부터 40대 전반에 이르는 10년간이 그에게 황금같이 소중한 시절이었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진덕여왕과 무열왕의 치세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참혹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풍진 세월이었다. 그래도 원효는 원(願)이라는 갑옷을 입고 수행과 학문에 부지런히 정진하고 있었다.
원효는 44세이던 661년에 두 번째로 도당유학의 길을 나섰다. 물론 의상과 함께였다. 그런데 원효는 남양만이 멀지 않은 직산(山)의 어느 옛 무덤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원효와 의상은 중도에 심한 폭우를 만나 길 옆의 토감(土龕) 사이에 몸을 숨겨 회오리바람과 습기를 피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서 보니, 해골이 있는 옛무덤이었다. 궂은비는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하루를 더 머물렀다. 밤이 깊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했다. 원효는 탄식하며 말했다.


“전날의 잠자리는 토감이라 편안했는데, 오늘밤은 귀신의 집에 의탁하니 근심이 많구나. 알겠구나,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감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떻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그리고는 바랑을 챙겨 되돌아 왔다. 이상은 ‘송고승전’의 기록이다. 그런데 연수(延壽)의 ‘종경록(宗鏡錄)’에는 무덤 속에서 시체가 썩어 고인 물을 마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밤에 심한 갈증으로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을 손으로 움켜 마셨을 때는 맛이 좋았는데, 이튿날 아침 그 물이 시체가 썩어 고인 물인지를 알고서는 심한 구토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흔히 원효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아무튼 원효는 해골이 뒹구는 옛무덤 속에서 오랜 꿈을 깼다.

 

이론적 탐구는 교학 연구로
실천행은 대중교화로 표출


논리·문장 두루 갖춘 학승
100여부 240권 저술 남겨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얻은 뒤에는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 그리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했다. 이렇게 원효는 출가 수행자였는가 하면의 환속한 거사였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소성거사찬(小性居士贊)에서 “머리를 깎으면 원효대사요 머리를 기르면 소성거사”라고 한 그대로였다.


“출세법(出世法)은 세간법(世間法)을 치유하는 법이고, 출출세법(出出世法)은 출세법을 치료하는 법이다”라고 한 ‘섭대승론’의 구절을 원효는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비록 출가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재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금강삼매경’의 구절을 도속이변(道俗二邊)의 상에 떨어지지 않기에 극단을 떠나는 훌륭한 이익이라고 해석했다. 출가와 재가, 혹은 도속(道俗) 두 가지 모습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원효의 이 말은 환속(還俗)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보게 해준다. 세속에 살더라도 맑고 깨끗한 행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원효는 세속의 더러움에 발 디디더라도 일미(一味)의 맑고 깨끗한 행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세속에 발붙이고 살면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처렴상정(處染常淨)하는 연꽃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원효는 이론과 실천을 겸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을 추구했다. 그의 이론적 탐구는 교학(敎學) 연구로 전개되었고, 그의 실천행은 대중교화로 나타났다. 원효는 한국 학술사상 그 비조에 해당한다. 불교학과 유학을 포함하는 한국 학술사에서도 그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 해당한다. 불교학 전반에 두루 정통했던 그는 ‘만인의 적(萬人之敵)’으로 불렸다. 혼자서 만 명을 대적할 수 있는 위대한 장수를 만인의 적이라고 하는데, 학승으로서의 원효를 장수에 비긴 경우였다. 원효는 웅장하고도 현묘한 문장을 구사했던 명문장가로 평가된다. 그는 인명학(因明學)에도 뛰어나 진나(陳那)의 후신(後身)으로 불리기도 했으니, 그는 논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이다. 100여부 240여권의 저서를 남긴 원효는 한국불교사상 최고의 저술가였다. 신라의 의적(義寂)이 25부, 경흥(憬興)이 40여부, 태현(太賢)이 50여부의 저술을 남겼지만 원효에 비할 바 못된다. 중국의 학승도 원효를 따르지 못했다. 이처럼 원효는 논리와 문장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저술을 남긴 학승이었다.


원효의 여러 저서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다. 원효사상의 핵심인 화쟁(和諍)사상을 주제로 한 이 책은 여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던 명저다. 의천(義天, 1055~1101)은 원효가 “백가의 논쟁을 화회시켜 일대의 지극히 공평한 논을 얻었다(和百家異諍之端 得一代至公之論)”고 했다. 고려 숙종은 6년(1101)에 원효에게 화쟁국사(和諍國師) 호를 추증했다. 다툼과 전쟁의 시대를 살았던 원효, 그는 평화를 생각했고 화해와 조화를 꿈꾸었던 것이다.


원효의 대중교화는 그의 학문적 성과나 사상적 깊이 못지않게 중요하다. 황량하고 거친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삶에 지친 사람들의 묵정밭을 일구고 가꾸는 일이란 보살행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원효가 만난 사람은 다양하다. 밭가는 노인과 산골의 몽매한 사람, 그리고 광대, 백정, 술장사 등 시중잡배들과도 어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거리의 아이들이나 부인들까지도 원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익살과 웃음, 노래와 춤 등은 삶에 지친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신나는 일이었고, 가끔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으리라. 원효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었고, 비록 지금은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의 경우도 그 번뇌의 구름 걷힐 날 있음을 알았다. 원효는 교화를 위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무애가(無碍歌), 미타징성가(彌陀證性歌) 등이 그것이다. 원효는 어느 날 광대들이 특이한 모양의 조롱박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다. 그도 조롱박 모양의 도구를 만들어 무애(無碍)라고 이름하고는 이를 두드리며 춤추었다. 원효로부터 비롯된 무애무(無碍舞)는 신라사회에 두루 퍼졌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전승되었다.


일연(一然)은 원효를 불기(不羈)로 인식했다. 불기란 굴레가 없다는 뜻이고, 매인 곳이 없다는 의미다. 원효는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다. 불교로부터도, 승려라는 형색으로부터도, 지식으로부터도, 명예로부터도, 계율로부터도, 그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원효는 당시 신라 사회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거리의 대중들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던 엄장(嚴莊)이 그에게 도를 구함에 쟁관법(錚觀法)을 만들어 지도했던 이야기며, 46세 때인 문무왕 2년(662)에 군사에 관한 암호문서의 의미를 해석해 줌으로써 김유신이 이끌던 신라군을 위기로부터 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이야기며, 사복과 함께 돌아가신 사복의 어머니를 장사지낸 이야기며, 심한 종기를 앓아 고생하던 왕비를 위해 ‘금강삼매경론’을 짓고 이를 황룡사에서 강의했던 이야기 등은 원효가 당시 신라 사회의 큰 의원 같은 존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김상현 교수

원효의 일생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밤을 지새우는 학문 생활로, 거리를 누비는 교화의 길로. 686년 3월30일, 원효는 70년의 빛나는 생애를 혈사(穴寺)에서 마감했다. 삼국간의 전쟁도 끝나고 당나라 군사를 물리쳐 낸지도 10년이 지나 평화의 기운이 온 강토에 넘쳐나던 때, 구룡대사(丘龍大師)는 역사의 강으로 조용히 사라져 갔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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