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초의와 추사의 정(情)
23. 초의와 추사의 정(情)
  • 법보신문
  • 승인 2011.08.2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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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애타게 그리워하고 존경했던 ‘지기지우’ <知己之友>

심혈 기울인 추사 ‘명선’은

제주 유배 시절에 썼을 것

 

초의 스님에 대한 고마움과

초의차에 대한 경외심 담겨

 

 

▲추사는 초의를 통해 차의 심원(深遠)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고, 초의는 추사를 통해 평생의 든든한 후원자를 만날 수 있었다. 추사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명선(茗禪)’은 추사가 초의를 위해 쓴 글씨로 두 사람의 지음지정(知音之情)이 잘 나타나있다.

 

 

조선후기 초의 스님과 추사 김정희가 나누었던 우정은 유불(儒佛)간의 아름다운 교유로 회자된다. 이들은 차와 시, 불교를 통해 더욱 굳건한 상호간의 신뢰를 구축했는데 추사가 초의에게 차를 독촉하는 편지가 많다는 점은 이들의 교유에 중요한 매개물은 차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이들이 얼마나 서로를 존경했던 사이인지는 초의가 ‘제주화북진도’ 발문에 ‘서로 생각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않는 사이(不忘相思相愛之道)’라 정의한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서로 생각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않는 사이’는 지기(知己)이다.


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진정한 벗이었다. 예나지금이나 붕우지도(朋友之道)의 이상은 서로의 향상을 도와주는 것. 멀리에 있어도 늘 따뜻한 마음이 교감되는 사이가 지인(知人)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관계는 끈끈하지만 자유롭고 넉넉하다. 더구나 차를 통해 서로를 회통했던 추사가 적거에서 초의차를 받고 느낀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척박한 제주도에서 추사의 유일한 안식처는 차였다.


차의 덕성은 군자와 같다고 한다. 담수(淡水)처럼 맑고 향기로운 초의차는 추사 자신을 깨끗이 정화하고 투영해 보는 창구였을 것이다. 아!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기이한 것인가 보다. 추사가 차의 심원(深遠)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초의를 통해서이고, 초의 또한 추사를 통해 평생의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게 되는 결과를 얻었다. 한편 1843년경 초의는 추사를 찾아 제주도 땅을 밟았다. 초의가 제주에서 ‘영주답이연죽(瀛州答李然竹)’을 지은 것은 1843년 여름이고, 제주에서 말을 타다가 볼깃살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했던 시기도 이 무렵이었다. ‘완당선생전집’의 ‘여초의(與草衣)’5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말안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볼깃살이 벗겨지는 고통을 겪고 계신다하시니 염려가 됩니다.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닌가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경거망동했으니 어찌 망보(妄報)가 없겠습니까. 사슴 가죽을 아주 얇게 떠서 (이것을) 상처의 크기에 따라 자른 다음, 밥풀을 짓이겨 붙이면 좋습니다. 이는 스님의 살가죽이 사슴 가죽과 견주어 어떤지를 보자는 것이지요. 사슴 가죽을 붙인 후에는 곧바로 일어나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찌는 더위가 괴로울 뿐입니다. 겨우 적습니다. 그럼. 1843(癸卯)년 윤 7월 2일 다문


(卽聞不勝鞍馬 致有肉損脫之苦 奉念切切 能不大損也 不聽此言 妄動妄作 安得無妄報也 以鹿皮薄薄片 量其傷處大小裁出 以米飯糊緊粘則爲好此僧皮何如鹿皮者也 皮粘後 卽爲起身還來至可至可 此狀 一味苦熱而已 艱草不宣 癸卯閏七月二日 茶門)
이 편지는 1843년 윤 7월2일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것이다. 이를 통해 초의가 제주도에 도착한 시기는 대략 윤 7월 이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초의는 제주도에서 말을 타다가 말안장에 볼깃살이 벗겨지는 고통을 당했는데, 말을 타기 전 추사로부터 조심하라는 당부를 들은 듯하다. 하지만 말안장 다루는 법에 익숙하지 않았던 초의는 볼깃살이 벗겨지는 변고를 당하고 만다. 추사의 긴급 처방은 바로 사슴 가죽을 얇게 저며 상처 부위에 붙이게 한 것이다. 추사의 해학은 여기서도 넘친다. 다시 말해 아픈 부위에 사슴 가죽을 붙이는 것은 스님의 볼깃살과 사슴 가죽이 어떤지 보고자 한 것이라니 웃음이 절로 난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다삼매의 경지’ 처음 언급


세상일에 빠져있는 초의를
충고하는 듯한 내용도 포함


한편 조선후기 엄격한 신분제도 하에서는 승려가 말을 타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초의가 제주도에서 말을 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당시 제주 목사였던 이원조의 배려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이 편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소치 허련이 날마다 추사의 곁에서 고화 명첩을 보았고, 지난 겨울보다 안목과 수준이 높아졌다는 내용이다. 이는 추사가 적거에 있으면서도 오백나한도의 진영이 실린 수십 책을 소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치가 나한도 같은 불화에 일가를 이룰 수 있었던 토대는 오백나한도였고, 기초적인 불화의 안목은 이미 한산전에서 초의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한편 추사가 초의에게 써 준 ‘명선(茗禪)’이 제주 유배 시절 썼을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추사의 편지가 있어 주목할 만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의 편지 한 통을 얻은 것만도 다행인데 어찌 겹겹이 파도가 치는 바다를 건너오기를 바라겠습니까. (초의) 스스로 대승법문이라 자랑하지만 나 같은 보통사람의 눈으로 보면 어찌 대승이 (우주) 현상에 얽매여 동서분주하는 것을 벗어던지지 못할 일이 있습니까. 또 (여러 말 필요 없이) 나 같은 범부에게 빨리 와서 금강저로 한번 얻어맞아야만 비로소 정진하여 한 가지 성과를 얻을 것입니다. 저는 목석이나 다름없이 지낼 뿐입니다. (보내주신) 차는 정말 훌륭합니다. 다삼매를 능히 꿰뚫은 것입니까. 글씨란 본디 세월을 다 바쳐도 완성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떻게 맨손으로 용을 잡듯이 쉽게 이룰 수 있겠습니까. 언제든 상관없으니 반드시 스님이 직접 (제주도로) 와서 가져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만. 1842(壬寅)년 10월6일

 

(得見草衣一書亦幸 安望其越曾溟遠來也 自以大乘法門 而以此凡眼觀之寧有大乘之爲障瓦礫所纏 東奔西汨 無以罷除也 且須就我凡夫 一下金剛 始可進得一果耳 賤狀石木而耳 茶包果是佳製 有能透到茶三昧耶 書本是窮日月而難了者也 何以易就如赤手捕龍 無論幾時 師須入來 自取去可耳 不宣 壬辰十月六日 )

 

 

▲ 추사 편지

 


이 편지에서 초의가 제주도에 간 시점을 짐작할 수 있는데 초의는 1842년 10월경까지도 제주도에 가지 못했고, 간다는 기별만 전한 듯하다. 하지만 추사가 초의의 편지를 받는 것만도 요행이니 어찌 거친 파도를 헤치고 먼 제주도까지 오겠느냐는 말 속에는 초의를 만나고 싶은 추사의 간절한 마음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더구나 목석처럼 가는 세월을 담담히 보낼 뿐이라는 추사의 말은 불교와 차에 심취한 그의 경계를 담담히 나타낸 것이고, 상대적으로 세상에 무심해야할 초의가 세상일에 빠져 있는 것을 질타하는 추사의 일갈은 매섭다. 이는 불망지도(不忘之道)를 아는 벗에게나 하는 말이다.


그리고 추사가 ‘차품이 정말 훌륭하다. 이 차는 다삼매의 경지에서 만든 것이냐’는 반문을 통해 초의차의 완성 시점을 가늠할 수 있겠다. ‘차 잎 고르기를 부처님 다루듯이 했다’는 김명희의 말에서도 초의가 어떻게 차를 만들고 차를 대했는지를 알 수 있고, 이 편지을 통해서도 초의차가 다삼매의 경지에서 만들어졌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초의는 삼매의 경지에서 맛이 있는 육안차나 약효가 좋은 몽정차와 비견될 초의차를 완성한 것이다. 차는 동자처럼 젊어지고, 팔십 노인의 얼굴에 붉은 빛을 띠게 하는 신묘한 효능을 지녔다. 이런 차는 삼매의 경지에서만 드러나는 차의 세계이다. 따라서 심혈을 기울여 쓴 추사의 ‘명선’에는 초의에 대한 고마움과 초의의 차에 대한 경외심을 함께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이 편지에서 추사가 말한 글이 무엇인지를 확실하지 않다. 다만 완성하기 어려운 글을 써서 언제든지 초의가 직접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는 추사의 간곡한 말에서 자신의 성의를 초의와 공유하고픈 추사의 마음을 엿보았을 뿐이다. ‘명선’을 이 시기에 쓴 작품이라 추정해 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명선’이 추사가 초의에게 준 호(號)라는 사실이 세상에 밝혀진 것은 2004년쯤의 일이다. 황상의 ‘걸명시’에는 이러한 사실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황상은 다산의 제자이다. 다산이 강진 사의제에서 기른 제자로, 평생 사제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가 초의를 만난 것은 1809년경으로, 초의가 대흥사로 수행처를 옮긴 후, 다산초당을 찾을 때, 스치듯 초의를 만났다.

 

▲박동춘 소장

황상이 다시 1849년 겨울, 일지암으로 초의를 찾은 것은 꼭 40년만의 일이었다. 그가 일속산방으로 돌아간 뒤, 초의에게 ‘초의행(草衣行)’을 지어 보냈다. 이 시의 서문에 자신과 초의와의 첫 인연과 재회할 당시의 상황을 서술해 두었는데 이 서문에 ‘명선’을 초의에게 빌려 보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로 인해 ‘명선’은 1848년 이전에 쓴 작품임이 분명해졌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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