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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김유신

기자명 법보신문

빼어난 지혜와 용기로 삼국통일 대업 이룬 영웅

화랑 시절 삼국통일 발원
온갖 병법과 경서에 통달


30대에 국내외 명성 자자
당 침공획책에 결전 주장

 

 

▲지혜와 덕성을 두룬 갖춘 난세의 영웅 김유신은 늘 최선을 다하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 닥치면 조용히 하늘에 기도했던 장수였다. 사진은 경주 김유신묘(사적 제21호).

 

 

난세의 영웅 김유신, 그는 태종 무열왕과 더불어 삼국통일을 이룩한 원훈(元勳)이다. 아버지 서현(舒玄)은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그리고 어머니 만명(萬明)은 황금갑옷을 입은 한 어린 아이가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얻은 김유신(金庾信)은 595년에 세상에 왔다. 그의 등에는 칠성(七星) 무늬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김유신을 도리천(利天)인 33천(天)으로부터 인간 세상에 온 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두루 전하고 있었다. 황금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서 인간 세상으로 온 아이, 그는 마침내 삼국통일의 꿈을 이룩한 영웅이 되었으니, 그의 명성은 천년 세월을 넘어 전한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다. 그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하였던 것은 미륵불이 하생할 용화세계(龍華世界)의 그 풍족하고 안락한 세상을 희구한 때문이었다. 나이 17세였던 611년 그는 중악(中嶽)의 석굴(石窟)로 들어가서 삼국 병합의 마음을 다지며 하늘에 맹세하며 빌었다. 다음 해에는 열박산(咽薄山)의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다시 하늘에 맹세하고 기도했다. 이렇게 화랑 김유신은 삼국병합의 꿈을 키웠고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밤낮으로 골몰했다. 그는 ‘손자병법’과 ‘육도(六韜)’ 등 여러 병서(兵書)를 읽었고, 유가의 경전과 역사서도 읽었다. 그리고 무술도 익혔다.


629년 낭비성 전투에서 35세 김유신은 고구려군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48세 때인 642년에 압량주 군주가 되고, 644년에는 대장군에 임명됨으로서 신라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647년에는 비담의 난을 진압했고, 648년에 대야성을 탈환했고, 그 공으로 이찬(伊)으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이 무렵 김유신의 명성은 멀리 당나라에도 전해져 있었다. 648년 김춘추가 당 태종을 만났을 때 태종은 유신의 명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유신의 사람됨을 물었다. 이 무렵 김유신은 국내에서도 주목받고 있었다.


진덕여왕(647~654) 때 알천(閼川)·임종(林宗)·술종(述宗)·호림(虎林)·염장(廉長)·유신(庾信) 등이 나라 일을 의논할 때면 알천이 윗자리에 앉았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은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고 한다. 여러 대신들이 복종할 정도로 신라 조정에서의 김유신의 위상은 높았다. 654년 진덕여왕이 돌아가자 김유신은 재상 알천과 의논하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이미 정략적 결혼을 통해 끈끈한 사적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신뢰하는 군신 관계로 발전했던 것이다. 660년에 김유신은 상대등(上大等)이 되었고, 백제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과 함께 정복했다.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당군은 은밀히 신라 침공을 획책하자 김유신은 당군과의 결전을 적극 주장했다. 신라의 결의가 굳고 대비가 충실함을 안 당군은 신라 정벌의 야욕을 접었다. 소정방이 백제의 포로를 바치는 자리에서 고종은 왜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소정방이 대답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들은 충성으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래 사람은 위 사람을 친 부형처럼 섬기고 있어 비록 나라는 작지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상하의 단결은 전쟁 승리 요인 중의 하나임은 ‘손무병법’이 밝히고 있는 것과 같다. 백제 부흥군을 진압한 663년 11월에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토지 500결을 주었고, 고구려를 정복한 668년에는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라는 직위와 식읍 500호를 주었다.


“대저 장수된 자는 나라의 방패가 되고 임금의 무기가 되어 승부를 싸움터에서 결판내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얻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인심을 얻은 후에야 성공할 수 있다.”
이는 668년 고구려 정복을 위해서 출정하는 신라 장수들에게 했던 김유신의 당부다. 이처럼 그는 천도(天道)와 지리(地理)와 인심(人心)을 얻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육도’에 나오는 내용과 같지만, 김유신도 공감했던 내용일 것이다.


김유신은 솔선수범하던 장수였다. 강령(綱領)이 되고자 했던 그의 염원은 일생 흔들린 적이 없다. 629년 신라에서는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했다. 신라가 불리하여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 중당(中幢)의 당주 김유신은 말했다.


“옷깃을 들면 옷이 바로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고 하니, 나는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
적진으로 진격해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선덕왕 14년(645) 3월 백제 침공 소식을 듣고 급히 전쟁터로 달려가느라 자기 집 문 앞을 지나면서 들리지도 않은 채 지나쳐간 이야기는 유명하다. 집에 가지 못한 것이 반년이 넘었고 식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군사들은 말했다.
“대장군이 이렇게 하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가족 곁을 떠남을 한탄하랴.”
군사들은 기꺼이 그를 따랐다.

 

정보·심리전 적절히 활용
솔선수범으로 사기 고취


“전쟁 승패는 군사력보다
민심이 어떤가에 달렸다”


662년 12월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을 보급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67세의 노장군 김유신은 예측하기 어려운 적지로 자진해서 나섰다.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잊는 것은 열사의 뜻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던 김유신은 이렇게 솔선수범했다.


김유신은 심리전술이나 정보전술 등을 잘 구사했던 장수였다. 그는 전쟁에서 사기(士氣)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기에 때로는 병사들의 전의와 사기를 고의로 자극하는 심리술인 격장술(激將術)을 사용하기도 했다. 647년 무산성 등지로 공격해 오는 백제군과의 전투에서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졌을 때 김유신이 비녕자(丕寧子)에게 그대가 아니면 누가 능히 용기를 내고 기이함을 보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겠는가라고 했던 경우가 그 예라고 하겠다. 김유신은 어느 때 자신에게 접근해 온 고구려 첩자를 살려서 보낸 일이 있다. 그는 그 첩자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임금님은 위로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아서 백성이 모두 즐겁게 자기 일을 즐기고 있음을 지금 내가 보았으니,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라.”


고구려 첩자를 이용해서 오히려 선전을 했던 경우다. 고구려 사람들은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유신이 재상을 하고 있는 한 가벼이 할 수 없다”고 했다니, 그의 선전전술이 효과를 본 셈이다. 649년 백제와의 도살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돌아오는 길에서 항복해 온 백제의 좌평 정복과 병사 1000명을 모두 석방하여 각자 가고 싶은 대로 가게 했는데, 이 또한 고도의 심리전술이었다. 조미압은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 좌평 임자의 집에서 오래 동안 종노릇을 하면서 신임을 얻었다. 탈출해 온 그를 다시 백제로 보내 임자를 포섭하게 하게 했던 경우는 김유신의 뛰어난 첩자 활용술을 보여주는 사례다.


김유신은 속설이나 미신에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신념으로 행동했다. 길함과 흉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이 초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새가 날아서 자신의 군막을 지나감에 여러 사람들이 불길한 징조라고 할 때도 김유신은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새 한 마리가 진영 위를 맴돌자 싸움을 중지하려는 소정방에게 말했다.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함으로써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의 뜻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
김유신은 언제나 인심에 귀 기울이던 장수였다. 그는 강조했다.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은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심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김유신은 최선을 다하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 닥치면 조용히 하늘에 기도하던 장수였다. 사람의 힘을 다하였으니 이제 신령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젊은 화랑 시절 중악의 석굴에서 기도했던 그는 만년에도 마음에 맹세를 다지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다. 고구려 평양을 향해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전달해야 하는 지극히 어려운 군사 작전을 자임한 67세의 노장군 김유신은 현고잠(縣鼓岑) 동굴안의 절에 가서 재계(齋戒)하였다. 영실(靈室)에서 문을 닫고 여러 날 밤을 홀로 분향하며 지내고 나와서 말했다.


“이번 걸음에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661년 5월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20일 동안이나 포위 공격하였다. 식량 길이 끊긴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이 소식에 접한 김유신이 말했다.
“사람의 힘을 다하였으니 이제 신령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절에 나아가 제단을 마련하고 기도를 드렸다. 갑자기 적진에 큰 별이 떨어지고 천둥과 벼락이 치면서 비가 왔다. 고구려군이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사람들은 김유신의 지극한 지성이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673년 문무왕이 김유신을 위문했다. 이에 김유신이 말했다.
“밝으신 임금께서 쓰실 때 의심하지 않고 일을 맡길 때도 의심하지 않으신 까닭으로 밝은 임금을 섬겨 조그만 공을 이루어,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이 두 마음이 없게 되었으니, 비록 태평한 세상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또한 소란한 세상이 약간 편안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상현 교수

7월1일 김유신은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무왕은 김유신의 아내 지소부인에게 말했다. “지금 서울과 지방이 편안하여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 없이 지냄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덕택이요.”
당에서 무열왕의 묘호 태종(太宗)을 문제 삼았을 때도, 신라에서는 답했다. 거룩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서 삼국을 통일했기에 태종이라 한 것이라고.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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