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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트인 마음 알아야 설해도 허물이 없다

기자명 법보신문

온갖 중생의 언어가 법 펼치는 바탕
중생의 언설 떠나면 설할 것이 없다


부처님 세상에 관한 내용을 들으면
부처님의 씨앗 훈습돼 싹을 틔운다

 

 

▲돈황 막고굴 25굴. 문수변신.

 


94. 온갖 중생의 언어가 다 법을 펼치는 바탕이다


又 說聽全收 生佛相在者 略擧二喩. 一者 如一明鏡 師弟同對說聽 以師取之 卽是師鏡 弟子取之 是弟子鏡. 鏡喩一心 師弟喩生佛. 是謂 弟子鏡中和尙 爲和尙鏡中弟子說法 和尙鏡中弟子聽 弟子鏡中和尙說法. 諸有知識 請詳斯喩. 此喩 猶恐未曉 又 如水乳和同一處 而互爲能和所和 且順說聽 以能和爲說 所和爲聽. 且將水喩於佛 乳喩衆生 應言乳中之水和水中之乳 水中之乳受乳中之水. 雖同一味 能所宛然 雖能所宛然 而互相在相遍相攝 思以准之.


설법(說法)과 청법(聽法)이 서로 온전히 어울려 ‘중생 안에 부처님’과 ‘부처님 안에 중생’이 서로 동시에 존재함을 간략히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겠다.


하나는 ‘깨끗한 거울’ 앞에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마주보고 ‘설법’하고 ‘청법’할 때 스승이 법을 설하면 제자가 스승의 거울이 되고 제자가 설법을 들으면 스승이 제자의 거울이 되는 것과 같다. 거울은 한마음을 비유하고 스승과 제자는 부처님과 중생을 비유하니, 이는 ‘제자의 거울 속에 있는 스승’이 ‘스승의 거울 속에 있는 제자’를 위하여 설법하면, ‘스승의 거울 속에 있는 제자’가 ‘제자의 거울 속에 있는 스승의 설법’을 듣는 것을 말한다. 지혜가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로 든 비유를 자세히 살피기 바란다.


거울로 든 비유의 뜻을 아직 알지 못했을까 걱정되어 또 하나의 비유를 들겠다. 이는 물과 우유가 ‘능(能)’과 ‘소(所)’로 서로 섞여 있는 것과 같으니, 설법과 청법의 관계에서 ‘능(能)’이 설법이 되고 ‘소(所)’가 ‘청법’이 된다. 물은 부처님을 비유하고 우유는 중생을 비유하니, ‘우유 속의 물’이 ‘물속의 우유’와 섞이고 ‘물속의 우유’는 ‘우유 속의 물’을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동일한 맛이라도 ‘능(能)’과 ‘소(所)’가 분명하고, ‘능(能)’과 ‘소(所)’가 분명하더라도 서로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서로 두루 하며 서로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비유로 생각할 수 있겠다.


又 衆生心中佛者 此明衆生稱性普周 而佛不壞相 在衆生心內. 言爲佛心中衆生說法者 此明佛心稱性普周 而衆生不壞相 在佛心內也. 更無別理 但說聽之異耳. 是知 一切衆生語言 皆法輪正體. 若離衆生言說 卽佛無所說.


‘중생의 마음속 부처님’이란, 중생이 법성과 하나가 되어 시방세계에 두루 하면서 부처님이 그대로 중생의 마음속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속 중생을 위하여 설법’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 법성과 하나가 되어 시방세계에 두루 하면서 중생이 그대로 부처님의 마음속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엔 다시 별다른 이치 없이 다만 설법과 청법의 모습만 다를 뿐이다. 이것으로 알아야 한다. 온갖 중생의 언어가 다 법을 펼치는 바탕이다. 만약 중생의 언설을 떠난다면 부처님께서 설할 것이 없다.


95. 허공 속의 태양이듯 밝은 지혜 충만하네


昔人頌云 說通宗不通 如日被雲朦 宗通說亦通 如日處虛空. 故知 若先了宗 說則無過. 又 凡有詮表 形於言敎者 皆是明心 不詮餘法. 或言廣大自在 此約德相以明心 或言寂滅無爲 此約離過以明心. 乃至 或說事是心之事 或說理是心之理.


옛 스님께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말이 논리 정연하나 쓰는 마음 못 트이면
해를 가린 먹장구름 마음속이 깜깜하며
티끌 없이 트인 마음 온갖 변재 다 통하면
허공 속의 태양이듯 밝은 지혜 충만하네.
그러므로 먼저 ‘툭 트인 마음’을 알아야 설해도 허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 논리와 언어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다 ‘툭 트인 마음’을 밝히는 것이지 다른 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넓고 크고 자재한 내용’을 말하면 이는 ‘공덕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툭 트인 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며, ‘더 할 일이 없이 고요한 마음’을 말하면 이는 ‘중생의 허물을 벗어난 자리’에서 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현상을 말하는 것은 ‘마음의 현상’이요 이치를 설하는 것은 ‘마음의 이치’이다.


故云 千經萬論 皆是言心 豈止宗鏡耶. 如法華經云 爲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凡言大者 莫越於心 於五大之中 虛空最大 尙爲心之所含. 故首楞嚴經云 空生大覺中 如海一發 又云 寂照含虛空 此大 非對數量稱大. 又 非形待稱大 故云一大事.


그러므로 많은 경전과 논서가 다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 어찌 ‘종경록’만 말하고 있겠느냐. 이는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 일대사인연을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셨다.”고 한 것과 같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의 ‘대(大)’는 마음보다 더 큰 게 없다는 것을 말한다. 오대(五大)인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에서 허공이 가장 크다고 하지만 이 허공도 마음속에 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능엄경’에서 “허공이 대각大覺에서 생겨나니 이는 바다에서 거품 하나 이는 것 같다.”라고 하며, 또 “고요한 빛나는 마음이 허공을 품는다.”라고도 하니, 여기서 말하는 ‘대(大)’는 숫자나 크기로 말할 수 있는 ‘대(大)’가 아니다. 또 어떤 형태로도 말할 수 있는 ‘대(大)’가 아니니 그러므로 ‘일대사(一大事)’라 한다.


又 此一非一 如法句經頌云 森羅及萬像 一法之所印 一亦不爲一 爲欲破諸數.
是知 諸佛出世 祖師西來 皆明斯旨 非爲別事矣


또 일대사인연에서 말하는 ‘일(一)’도 숫자로 말하는 그냥 ‘일(一)’이 아니니, 이는 ‘법구경’ 게송의 내용과 같다.
온 우주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이
빠짐없이 한법에서 나타났지만
한법 또한 한법이라 하지 않으니
한법이란 마음조차 없애려 하네.
이것으로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고 조사 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것이 다 이 종지를 밝힌 것이지 다른 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강설) 종통(宗通)은 온갖 번뇌를 다 타파한 ‘툭 트인 마음’이고 설통(說通)은 툭 트인 마음으로 온갖 논리를 뛰어넘어 거침없이 법을 설파하는 ‘변재’를 말한다. “말이 논리 정연하나 쓰는 마음 못 트이면”이라고 한 것은, 말로는 논리가 정연한 것 같더라도 마음속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깨우쳐 그들의 생사를 해결해 주는 인연을 말한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 일대사인연을 위하여 세상에 출현해서 부처님의 세상을 중생들에게 열어 보여 그들이 깨달아 들어가게 한다.”라고 하였다. 일대사인연에서의 일(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하나의 도(道)를 말하며, 대(大)는 범부와 성인이 갖고 있는 본질적 마음의 바탕이다.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은 이 일대사(一大事)로 세상에 출현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서 부처님의 세상을 열게 하신 것이다.


96. 씨앗을 담고 있는 팔식 곳간


如尺 食黃而身黃 食蒼而身蒼 且八識藏中 十法界種子具有 隨所聞法 卽發起現行 若聞宗鏡之文 卽熏起佛乘種子. 然須染神入心 窮源見性 不俟耳入口出 但記浮言. 如荀卿子云 君子之學 入乎神 著乎心 布乎四支 動靜皆可爲法 小人之學 入乎耳 出乎口 口耳之間 則四寸耳 何足美七尺之軀者也.


노란 잎을 먹어 노랗고 파란 잎을 먹어 파란 자벌레처럼, 온갖 중생계의 씨앗을 담고 있는 ‘팔식 곳간’은 들은 법대로 그 싹이 드러나 ‘부처님의 세상’에 관한 내용을 들으면 ‘부처님이 될 씨앗’이 훈습되어 싹을 틔운다. 그러니 모름지기 이 말을 마음에 꼭 담아 근원을 파헤치고 자신의 성품을 보아야지, 귀로 듣고 입으로 뱉는 허튼 소리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이는 순경자가 “군자의 배움은 정신에 들어가 마음에 자리하며 몸 전체로 퍼져 움직이고 멈추는 모든 동작이 다 본받을 만한 법이 된다. 소인배의 배움은 귀로 들어가 입으로 나오므로 그 사이 거리가 네 치일 뿐, 이것이 어찌 칠 척의 몸을 아름답게 충족시킬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것과 같다.


강설) 십법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불(佛)인 열 종류의 온갖 중생계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불(佛)의 세계는 아직 중생의 분별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종경’은 ‘한마음’이요 ‘깨달음’을 말하니 ‘부처님의 세상’이다. 팔식장(八識藏) 곧 ‘팔식 곳간’은 중생의 온갖 경험을 모아서 씨앗처럼 저장하고 있다가 시절인연이 주어지면 그 씨앗에 싹이 돋게 하는 마음을 말한다.


순경자는 중국 주(周)나라 말기 전국시대의 유물론적 경향의 유가(儒家) 사람으로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를 말한다. 순경자(荀卿子)에서 경(卿)이란 자(子) 자와 함께 존경의 뜻으로 붙인 칭호이니 선생과 같은 뜻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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