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김인문
33. 김인문
  • 법보신문
  • 승인 2011.09.1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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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간 당나라에 머물며 신라의 대당외교 주도

무열왕 김춘추 둘째아들
불교와 노장사상에 해박

 

용맹스럽고 계략 뛰어나
삼국사기 열전에도 포함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김인문 묘. 경상북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문희는 김춘추와 결혼하여 아들 7명을 낳았다. 법민(法敏), 인문(仁門), 문왕(文王), 노차(老且), 지경(智鏡), 인태(仁泰), 개원(愷元) 등이 그들이다. 김춘추에게는 이들 외에도 서자 개지문(皆知文), 차득공(車得公), 마득(馬得), 그리고 딸 다섯 명이 있었다. 태자 법민은 훗날 문무왕이 되어 삼국통일을 완성한것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여러 형제들도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여러 전쟁에 참여하거나 중요한 관직을 맡아서 활동했다.


김춘추가 사신으로 진덕왕 2년(648) 당나라에 갈 때 셋째 아들 문왕도 함께 동행했고, 김춘추가 당 태종에게 숙위(宿衛)를 청하여 문왕을 머물게 했는데 신라 최초의 숙위였다. 문왕은 무열왕 3년(656)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고, 무열왕 5년에는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무열왕 8년(661) 백제 유민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을 때는 대당장군 품일(品日)의 부장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문무왕 5년(665)에 죽자 왕자의 예로써 장사지냈는데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했다. 지경은 667년 7월 고구려 원정군의 장군에 임명되었고, 문무왕 8년(668) 3월부터 670년 12월까지 중시직에 있었다. 668년 6월에는 대당총관으로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했다. 다섯째 아들 인태는 무열왕 2년에 각간(角干)이 되고, 660년 9월에는 왕자로서 신라군 7000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 1만명을 거느린 유인원(劉仁願)과 함께 사비성을 지켰다. 668년 6월에는 비열도총관이 되어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하였고, 이해 9월21일 이적(李勣)과 함께 함께 당에 들어갔지만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막내아들 개원은 문무왕 7년 7월 대아찬으로 장군이 되고 668년 6월에는 대당총관이 되어 지경과 함께 고구려 원정군에 참여했다. 효소왕 4년(695)에는 상대등이 되었다.


김춘추의 여러 아들 중에서도 둘째인 김인문(金仁問, 629~694)은 문무를 겸한 인재로 백제 및 고구려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오래 당나라에 머물면서 신라의 대당 외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그의 전(傳)이 포함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인문은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유가의 글을 읽고, 노자, 장자, 불교의 학설까지 널리 읽었다. 예서를 잘 쓰고 활쏘기와 말 타기도 잘하고 향악도 잘 이해했다. 행실이 순수하고 예능에 숙달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크고 넓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23세가 되던 651년에 왕의 명령을 받고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했다. 그리고 653년에 당에서 귀국했다. 그리고 다시 당에 들어갔던 인문은 656년(무열왕 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押督州) 군주(軍主)를 지내면서 장산성(獐山城)을 쌓는 일을 감독하고, 그 공으로 식읍 300호를 받았다.


김인문은 무열왕 6년(659) 4월에 다시 입당했는데, 세 번째였다. 이때 무열왕은 백제 원정을 위한 당나라 군사의 출정을 요청했다. 무열왕은 백제에 괴변이 많다는 정보를 확보하고 백제 공격의 결정적 시기로 파악했던 것이고, 이를 인문으로 하여금 당나라에 전하고 군사의 출정을 청했던 것인데, 이는 신라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외교 문제였다. 고종은 인문을 불러서 도로의 험하고 평탄한 곳과 가는 길이 어디가 좋은가를 물었다. 인문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자 황제는 기뻐했다. 이처럼 당 고종이 백제 공격을 결심하게 된 데는 인문의 노력이 있었다. 무열왕은 그 회보를 초조하게 기다렸고, 그해 10월까지도 회보가 없자 근심하기 시작했다. 신라 견당사가 남로(南路)를 통하여 장안을 왕래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이 대개 5~6개월 정도였음에 유의하면, 인문이 당나라로 파견된 지 6개월 후인 10월이면 그 소식이 기다려질 만한 때다.


당나라에서 백제 정벌 계획을 확정한 것은 아마도 659년 10월경이었던 것 같다. 죽은 신하 장춘(長春)과 파랑(罷郞)이 회보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무열왕에게 나타나 내년 5월에 당군이 백제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는 설화에 주목할 때 그렇다. 659년 윤10월29일 당에서는 칙지(勅旨)로 2명의 일본 사신을 서경(西京)에 가두면서 말했다.


“국가가 내년에 반드시 해동(海東)을 정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 왜의 사신들은 동쪽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처럼 당나라는 백제 정벌이라는 중요한 정보의 유출을 막기 위해 일본 사신을 연금하기 까지 한 것을 보면, 당나라에서는 659년 윤10월29일 이전에 백제 정벌을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해 11월에는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총관(神丘道總管), 유백영(劉伯英)을 우이도총관(夷道總管)으로 삼았다.


660년 3월 신해. 백제 정벌 위한 당나라 군사 13만 명이 출발하여 6월에 덕물도에 도착했는데, 인문은 신구도부대총관(神丘道副大摠管)으로 함께 참가하고 있었다. 백제를 정벌한 뒤 인문은 소정방과 함께 당나라로 다시 갔다.

 

651년부터 당에서 큰 활약
당의 백제 공격 이끌어내

 

당이 신라 공격하려 하자
의상 통해서 본국에 전달


인문은 661년 6월에 귀국하여 당의 고구려 공격에 신라도 호응하라는 당 황제의 뜻을 알려왔다. 그리고 인문은 662년 정월 김유신 휘하 9장군의 한 명으로 군량미 수송에 참가하여 수레 2천여 대에 쌀 4000섬과 조 2만2000여섬을 운반했다. 돌아오는 길 파주 임진강 호로수에서 고구려군사 1만여 급을 참수하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를 비롯한 5천 명을 사로잡았으며, 병기 1만여 개를 획득했다. 이에 많은 장수들은 인문의 뛰어난 병법 운용을 우러러보았다고 한다. 문무왕은 이 전투에서 김유신과 김인문의 공을 평가하여 본피궁(本彼宮)의 전장(田莊)과 노비를 반씩 나누어 주었다. 이해 7월 인문은 다시 당나라로 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리고 그는 곧 귀국했던 것 같다. 663년 7월 백제 부흥군 진압을 위한 전투에 장수로 참여한 사실에 유의할 때 그렇다. 665년 숙위하던 김문왕이 죽자 인문은 제5차로 당나라에 가서 이듬해 666년 고종을 따라 태산의 봉선의식(封禪儀式)에 참여하고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의 관작과 식읍 400호를 받았다. 666년 삼광(三光)·한림(漢林)과 숙위를 교대하고 귀국하였다가 다시 당나라로 갔다. 고종은 668년에 이적(李勣)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하면서 인문을 신라로 보내 신라 군사를 동원토록 하였다. 문무왕은 인문과 함께 군사 2만 명을 동원하여 왕은 북한산성에 머물고 인문을 신라군의 사령관으로 임명, 이적의 당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도록 했다. 한 달 남짓 만에 보장왕을 사로잡았는데, 인문이 보장왕을 영국공 이적 앞에 꿇어앉히고 그 죄를 들어 책망했다. 문무왕은 인문의 뛰어난 계략과 용맹스러운 공로를 인정하여 식읍 5백호를 주었다. 당나라 고종도 인문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조서를 내렸다.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장수요 문무를 겸한 뛰어난 인재이다. 관작을 주고 봉토를 나누어 주어야 하니, 특별한 관작을 내림이 마땅하다.”


작위와 식읍 2000호를 더 주었다. 당시 인문이 받은 식읍은 옛 백제에 속했던 웅천주지역이었다.
669년부터 신라와 당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두 나라 사이에는 670년부터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인문의 입장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670년 당 고종은 김인문 등을 불러 꾸짖었다.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우리를 침해하다니 무슨 까닭이냐?”

 

 

▲김인문이 중국 당나라 감옥에 갇혀있을 때 그의 안녕을 빌기 위해 신라 사람들이 세웠던 인용사터.

 


이에 인문을 옥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교련하여 설방(薛邦)을 장수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무렵 인문을 찾아온 의상(義相)에게 이 사실을 알려 본국에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인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나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개설하기도 했다. 문무왕은 인문을 놓아달라는 표문을 강수로 하여금 짓게 했고, 이 표문을 읽은 황제는 눈물을 흘리며 인문을 풀어주었다고도 한다.
674년 정월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니, 당나라 황제가 크게 노하여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내어 와서 신라를 치게 하고, 조서로써 문무왕의 관작을 빼앗았다. 이때 인문은 당나라 서울에 있었는데 황제는 그를 세워 신라왕으로 삼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 형 문무왕을 대신하게 하고 이내 계림주대도독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인문은 이를 간절히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으므로 마침내 길을 떠났다. 당에서 임명한 신라왕이 되어 신라로 향해 가야하는 이 역설을 그는 간절히 사양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인문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675년 2월 문무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또 형식상 사죄하니 황제는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그대로 회복시켰다. 인문은 중도에서 돌아오니 그전 관직대로 회복시켰다.


694년(효소왕 3) 4월29일 인문은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돌아갔다. 66세의 나이로. 부음을 들은 황제도 슬퍼했다. 영구(靈柩)를 신라로 호송하게 했는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고 관서에 명하여 서울 서쪽 언덕에 장례를 모셨다. 695년 10월27일이었다. 인문이 견당사로 파견되거나 숙위했던 것은 7차나 되었다. 22년이나 당나라에 있었다. 6차례나 견당사로 활약했던 양도(良圖)와 함께 김인문은 대당외교를 주도했던 것이다. 당 고종이 평했듯이 그는 용감하고 훌륭한 장수요 문무에 뛰어난 인재였다. 대당평백제국비명에는 인문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김상현 교수

“김인문은 기질과 도량이 따뜻하고 온화하였으며 사람됨과 식견이 침착하고 굳세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소인배의 자잘한 행동은 없고 군자의 고매한 풍모만 있어, 그의 무공은 이미 전쟁을 그치게 할 정도였고 문장 또한 부드럽고 원대했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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