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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사 회주 퇴휴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악을 끊고 선업 쌓으며 중생을 위하는 것이 계

 

▲퇴휴 스님

 

 

오늘은 삼취정계(三聚淨戒)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취정계의 삼취정은 석 삼(三) 모을 취(取), 깨끗할 정(姃), 즉 세 가지의 깨끗한 계를 모은다는 뜻입니다. 삼취정계에서는 지켜야 할 계를 셋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첫째 계가 섭율의계(攝律儀戒), 둘째 계가 섭선법계(攝善法戒), 셋째 계가 섭중생계(攝衆生戒)입니다. 흔히들 계에 대해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의 뜻으로 아는 불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삼취정계의 뜻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단 삼취정계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섭율의계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 모든 계율을 잘 지켜서 모든 악을 끊는 것입니다. 둘째 섭선법계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잘 다스려 선업을 쌓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는 섭중생계입니다. 섭유정계(攝有情戒)라고도 하는데 유정은 중생과 같은 말이니 중생을 이익 되고 복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섭중생계는 섭요익중생(攝饒益衆生)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요익(饒益), 풍요로울 요를 사용해서 모든 중생들이 풍요롭고 이익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계입니다. 일체의 계를 잘 지켜 악을 막고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 선업을 지으며, 궁극에는 중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삼취정계의 바른 뜻입니다.


이런 삼취정계는 소승과 대승불교의 사상이 하나로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자리이타(自利利他) 사상입니다. 뜻 그대로 나도 이롭고 또한 남도 이로운 것입니다. 또 이를 좀더 확장하면 자각각타(自覺覺他)가 됩니다. 나도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도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부처가 되고 남도 부처가 된다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남도 부처가 된다는 의미는 남도 부처가 될 수 있도록 내가 돕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 특징은 자리이타
중생돕는 자비심으로 지계


자리이타, 혹은 자각각타의 가르침은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큰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내가 열심히 수행해서 스스로 깨닫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도 또한 깨달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나도 행복해야 하지만 남도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자각각타의 마음입니다. 윤리적 측면에서 보면 단순히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하라는 등의 가르침이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입니다. 이 역시 자리이타와 상통하는 말입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인데 나와 남이 함께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자리이타, 자각각타와 맥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이런 차별 없는 마음이 대승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승의 수행자를 흔히들 성문수행자라고 합니다. 계율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수행을 완성해 나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계를 철저히 지킴으로서 자신의 수행을 완성해나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반면 대승의 수행자는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하는 자비심으로 계율을 지킵니다. 같은 계율이라도 이를 통해 자신의 완성을 이루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중생의 완성을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인을 위한 활동이 곧 내 수행의 완성에 도움이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승과 소승의 차이입니다. 남을 돕고 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 곧 내 수행을 돕고 궁극에는 내 깨달음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한 선행이지만 결국 내 수행을 돕고 완성시키는 활동이라는 말입니다. 남을 위해 헌신할 때 나도 또한 사람답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 불교, 대승 계율의 특징입니다. 삼취정계는 이 같은 대승의 특징을 잘 담고 있는 대표적인 계율입니다.


섭율의계는 부처님이 정하신 계율을 잘 지켜 악행을 막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불자오계의 예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불자오계는 우바새오계 또는 우바이오계라고도 합니다. 이 불자오계를 잘 지킨다는 것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신의 몸과 말과 마음에 허물이 있는지를 돌아보고 허물이 없도록 유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허물을 짓지 않도록 스스로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것, 늘 선행해 청정한 상태를 유지시켜나가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계입니다.


그런데 계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교단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부대중이 필요합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입니다. 이를 좀더 세부적으로 나누면 칠중(七衆)이 됩니다. 비구, 비구니, 식차마나, 사미, 사미니, 우바새, 우바이입니다. 이들 각각의 대중들은 지켜야 할 계율이 조금씩 다릅니다.


출가 수행자인 비구는 250개의 계를 지켜야 합니다. 비구니는 348개, 식차마나 6개, 사미 10개, 사미니 10개, 그리고 일반재가불자들, 우바이 우바새는 5개의 계를 받습니다. 또 팔재계(八齋戒)라는 것이 있는데 재가불자들이 평상시에 수행자처럼 살순 없다는 점을 감안,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그 동안에만 출가자처럼 수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 지켜야 할 8가지 계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팔관재계(八關齋戒)라 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계율을 잘 지켜나가는 것, 이것이 섭율의계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허물은 살피되 남의 허물을 살피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또 계를 범하는 이가 있더라도 성내는 마음, 나쁜 마음을 갖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오직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섭율의계의 특징입니다.

 

나 살피고 남 이롭게 하는게
참 불자의 길이면서 지향점


자신의 지켜야 할 계는 철저하게 지키되 다른 사람들이 계를 범했다하더라도 분노를 일으키지 말고 자비로 바라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섭선법계는 일상생활에서 선한 법을 실천해 나가라는 의미입니다. 번뇌와 망상의 원인이 되는 신구의 삼업을 잘 살피고 다스려, 선을 쌓아가라는 당부입니다. 섭중생계는 중생의 삶에 이익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끊임없는 자원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계율을 잘 지키고 나와 남을 모두 이롭게 하는 것. 이것이 삼취정계의 바른 뜻입니다. 결국 삼취정계는 소승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대승적 이타행을 부과시킨 것입니다.


“해와 달이 적절하게 조화가 잘 이뤄졌을 때 모든 생명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지만, 이 조화가 깨어지면 모든 생명이 고통 받게 된다는 비유를 들어 삼취정계를 조화롭게 실천해야 한다”


1500년 전 원효 스님께서는 ‘범망경’ 보살계본사기에서 계율에 대해 해와 달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고스란히 적용이 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뜨겁고 따뜻한 것이 좋다 해도 계속 태양만 비춘다면 이 세상은 생명이 살 수 없을 뜨거운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태양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암흑천지에 남극과 같은 차가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섭율의계와 섭선법계만 지키고 섭중생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소승의 좁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타행이라는 보살행이 없으면 성불이라는 깨달음의 열매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섭중생계만 있고 섭율의계와 섭선법계가 없다면, 즉 남을 돕고 중생을 이롭게 하기는 하나 자신을 성찰하고 닦지 않은 까닭에 공허하고 허망한 일이 될 것입니다.


내 마음살림을 잘해야 다른 사람의 마음살림도 도울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사람 역시 자신을 완성시킬 수 없기에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취할 수 없습니다. 자리와 이타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것이므로 수행에 있어 반드시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율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완성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고 안주해 버린다면 진정한 완성은 이룰 수 없습니다. 그저 공허할 뿐이고 한편으로 자신의 욕망만을 극대화시키는 부작용의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계율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남을 챙긴다는 것은 그 자체로 허망한 것이며 또한 어불성설입니다.


자리와 이타가 조화를 이뤄 적절하게 구현됐을 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향한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리이타, 자각각타, 상구보리하화중생은 선후가 없이 항상 함께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과 행동을 잘 살피고 단속하면서 또한 이를 기반으로 타인의 삶을 이롭게 하는 것이 참다운 불자의 길이며 지향점입니다.

 


이 법문은 9월4일 법장사 일요가족법회에서 회주 퇴휴 스님이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퇴휴 스님

1971년 수혜 스님을 은사로 출가, 동국대와 동대학원에서 불교학, 선학, 철학을 전공했으며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를 받았다. 조계종 포교원 신도교육위원, 교육원 교육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중앙승가대 교육원 강사와 실천승가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또 1991년 도심포교를 위해 창건한 법장사 회주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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