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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공양보다 한번 자비심 일으킴이 더 큰 보시

기자명 법보신문

법보시는 시방세계 두루 통하여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모든 중생에게 고루 베풀 수 있다


마음 성품이 온갖 모습 드러내도
근본은 오거나 가는 것이 아니며
생겨 나거나 멸하는 것도 아니다

 

 

▲돈황 유림굴15굴. 지락비천 당나라 중기.

 

 


97. 법공양은 마음을 살찌우니


維摩經云 法施會者 無前無後 一時供養一切衆生 是名法施之會. 什法師云 若一起慈心 則十方同緣 施中之最 莫先於此 故曰 無前後也. 肇法師云 夫以方會人 不可一息期 以財濟物 不可一時周. 是以 會通無隅者 彌綸而不漏 法澤冥被者 不易時而同覆. 故能卽無疆爲一會 而道無不潤 虛心懷德 而物自賓 曷爲存濡沫之小慧 捨江海之大益 置一時之法養 而設前後之俗施乎.


‘유마경’에서 “법을 베푸는 모임이란 차별 없이 평등하게 모든 중생에게 똑같이 공양하는 것이니 이를 일러 ‘법회’라 한다.”고 하였다. 구마라습 스님도 “한번 자비심을 일으키면 시방세계 온갖 뭇 삶들에게 똑같은 인연이 주어지니 ‘으뜸가는 보시’가 되어 이 보다 더 좋은 게 없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차별 없이 평등하게 모든 중생에게 똑같이 공양한다.”라고 한다. 승조 스님도 “아주 좁은 방에 많은 사람이 다 앉아 쉴 수 없듯 재물로는 중생을 동시에 다 구제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법보시’는 시방세계에 두루 통하여 그 어디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기에 모든 중생에게 빠짐없이 고루 베풀 수 있고, 온갖 중생에게 돌아가는 그윽한 법의 혜택이 한순간에 중생계를 모두 덮어 버린다. 그러므로 곧 ‘경계가 사라진 하나의 법회’에서 도(道)로써 온갖 중생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공덕을 품고 있는 빈 마음에 중생이 저절로 귀한 손님이 된다. 그런데 어찌 오줌에 생긴 거품 같은 보잘 것 없는 지혜에 머물러 강과 바다처럼 큰 이익을 버릴 것이며, 온 중생을 한꺼번에 제도하는 이 법공양을 제쳐 놓고 단지 분별로써 이익을 따지는 속된 보시를 베풀겠느냐.


夫財養養身 法養養神 養神之道 存乎冥益. 何則 群生流轉以無窮 爲塵路冥冥 相承莫能自返. 故大士建德 不自爲身 一念之善 皆爲群生. 以爲群生 故行願俱果 行果則已功立 願果則群生益. 已功立則有濟物之能 群生益則有返流之分. 然則 菩薩始建德於內 群生以蒙益於外矣. 何必待哺養啓導然後 爲益乎. 菩提者 弘濟之道也. 是以 爲菩提而起慈者 一念一時 所益無際矣. 則是承宗鏡之光 遍法界之照 寧有遺餘乎.


재물공양은 몸을 살찌우지만 법공양은 마음을 살찌우는 것이니, ‘마음을 기르는 도’가 훨씬 깊고도 그윽한 이익이 있다. 왜냐하면 재물로 몸만 살찌우는 중생들은 끝없이 윤회하는 어두운 세계에서 고통 받으며 자신의 삶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덕을 쌓는 것은 본디 자신의 몸을 위한 것이 아니요, 한 생각 좋은 마음이 모두 중생을 위한 것이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수행과 원력이 함께 갖추어지니, 수행이 결실을 맺으면 이미 공덕을 쌓은 것이요, 원력의 결실이란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다.


공덕을 이루면 중생을 제도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요,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곧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보답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스스로 덕을 쌓으면 밖으로는 중생들이 그 혜택을 받는다. 그런데 하필 중생을 먹여주고 길러주며 가르쳐 인도하는 것만이 이익이 된다고 하겠느냐. 깨달음이란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도이다. 이 때문에 깨달음에서 자비심을 내는 것은 한 생각 그대로 끝이 없는 이익이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빛을 법계에 두루 비추는 것이니, 어찌 법의 혜택을 받지 못할 중생이 있겠느냐.


강설) ‘보시(布施)’는 범어 ‘da-na’의 의역인데 부처님 시대부터 있었던 수행방법이다. 자비로운 마음에서 자신한테 주어진 복덕과 이익을 남에게 아낌없이 베푼다는 뜻을 갖고 있다. 실생활에 필요한 의복, 음식, 재물 같은 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공덕을 많이 쌓게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뒷날 ‘재보시(財布施)’는 보살의 실천덕목인 육바라밀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여기에 다시 중생의 거친 마음을 어머니처럼 편안하게 감싸주는 ‘무외시(無畏施)’, 불법에 인연을 맺게 하여 성불할 씨앗을 심어주는 ‘법보시(法布施)’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 수행의 커다란 디딤돌이 된 것이다. 특히 부처님의 세상으로 이끌어줄 마음을 살찌우는 법보시의 공덕은 다른 보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자신의 삶은 물론 법을 듣는 사람의 이익까지 함께 생각하며 올바른 법을 설한 공덕으로 모든 사람이 함께 성불하는 것이 진정한 ‘법보시’의 뜻이기 때문이다.


양무제가 “제가 평생 절을 짓거나 스님들께 공양하고 보시하며 살아왔는데 여기에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달마 스님께서는 “조금도 공덕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절을 짓거나 스님들께 공양하고 보시하며 모시는 행위는 인과법으로서 복을 구하는 일이기에 이것이 깨달음의 공덕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칠보를 보시하면 삼계의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겠지만 경전을 받아 지니는 공덕은 깨달음을 이루게 하니 법보시의 공덕은 더없이 수승한 것이다.


99. 모든 현상을 알고 보면 이 마음일 뿐

 

楞伽經 偈云.
不生現於生 不退常現退 同時如水月 萬億國土現.
一身及無量 燃火及雨 心心體不異 故說但是心.
心中但是心 心無心而生 種種色形相 所見唯是心.


‘능가경’ 게송에서 말하였다.


생겨나는 것이 아닌 데도 생겨나는 모습이 있고/변하는 것이 아닌 데도 늘 변하고 있기에/동시에 나타나는 모습이 물속에 비친 달 같아/억만 국토에 빠짐없이 둥그런 달이 나타난다.
한 몸속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몸과/타오르는 불길 속에 때맞추어 쏟아지는 비/온갖 마음과 그 마음 바탕은 다르지 않기에/모든 것은 오직 이 마음 바탕이 만들어낼 뿐.
온갖 마음속 다만 이 마음 바탕뿐이기에/온갖 마음은 이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생겨나는 가지가지 빛깔들과 온갖 형상들/그 모습을 보는 그대로 오직 텅 빈 마음일 뿐.


又 偈云
心中無斷常 身資生住處 唯心愚無智 無物而見有.
又 偈云
佛子見世間 唯心無諸法 種類非身作 得力自在成.
何以故 若得心王 一切自在 要成卽成 非他所.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음속에 ‘없어진다’ ‘영원하다’ 분별없고/우리 몸은 태어나서 잠시 있다 사라지니/모든 현상 알고 보면 이 마음일 뿐인 것을/어리석어 ‘그 무엇도 없는 것’을 있다 하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불제자여, 이 세상의 모습을 보라/모든 법이 마음일 뿐 다른 것 없어/온갖 형태 만드는 게 아니더라도/득력하면 자유자재 걸림이 없네.
무엇 때문인가. ‘심왕(心王)’을 얻는다면 온갖 것이 자유자재하여 이루고자 하면 곧 이루어질 것이니 그 무엇으로부터도 장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강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도(道)이자 평상시 도리이니 평상시 도리가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겠는가? ‘모습이 있는 것’으로도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고 ‘모습이 없는 것’으로도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인데, 사람들이 ‘있다’ ‘없다’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분별함으로써 ‘어떤 모습이 있다는 것’에 집착하는 ‘상견(常見)’이나 ‘어떤 모습도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단견(斷見)’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기도 한다. 단견과 상견이 다르더라도 주먹을 펴 손바닥이 되는 것과 같아 병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단견과 상견이 함께 사라져 온갖 분별이 사라진 곳에 바야흐로 ‘심왕(心王)’이 나타난다. 인연에 따라 드러나는 마음의 모습 그 자체에 깔려 있는 근본바탕을 ‘심왕(心王)’이라 하고 마음이 하나하나의 대상에 작용하고 있는 모습을 ‘심소(心所)’라고 한다. 이는 바닷물과 파도에 비유해 볼 수 있다. 바닷물이 여러 가지 파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파도의 모습은 그대로 바닷물이지 바닷물 자체의 성질이 변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닷물 자체로서 변하지 않는 것이 ‘심왕(心王)’에 해당되고, 여러 가지 파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곧 인연에 따라 그때그때의 모습으로 달라지는 것이 ‘심소(心所)’에 해당된다. 바닷물이 있어야 파도가 있고 파도의 실체는 바닷물이기에 바닷물이 파도이고 파도가 바닷물이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성품이 인연 따라 온갖 모습으로 드러나더라도 그 근본은 본디 오거나 가는 것이 아니며 생겨나거나 멸하는 것이 아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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