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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바라드와자

기자명 법보신문

부처님 꺾으려다 법문에 감화 승단에 귀의하다

불교 비난 일삼으며 불자인 아내 살해위협까지
출가 사문으로서 수행에만 전념 아라한과 증득

 

 

▲삽화=김재일 화백

 


불교가 발생한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의 종교계는 기존의 바라문교와 이에 대항하는 사문이라 불리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등장으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부처님 역시 사문종교가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여 당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던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했다. 그런데 배화교도였던 캇사파 3형제 그리고 회의론자 산자야벨라티풋타의 제자였던 사리풋타와 목갈라나 등의 대규모 귀의로부터 알 수 있듯이 불교는 등장 초기부터 다른 종교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불교교단의 급속한 발전은 타종교인들에 의한 불교 폄하, 비난, 중상모략 등을 불러일으킨다. 부처님의 왕성한 전법 활동으로 바라문을 비롯한 이교도들의 공양물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를 시기한 일부 종교가들은 때로는 아주 유치한 방법으로 부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다. 예를 들어, 아지비카교도들은 싱카라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부탁하여 그녀가 부처님의 아기를 가졌다는 소문을 퍼뜨려 부처님의 명성을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결국 거짓임이 드러나고, 오히려 결과적으로 불교교단을 더욱더 융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시기가 아닌,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에 의해 불교를 불신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럴 경우 부처님의 절묘한 설법이 가장 큰 힘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회곳곳에 뿌리 깊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바라문들은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고수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들의 교의가 지니는 모순을 명확하게 지적하며 시기적절한 설법을 적극적으로 펼침으로써 이들을 교화해갔다. 초기경전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바라드와자이다.


바라드와자는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 사는 바라문으로 불교를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 다난쟈니(Dhanañjanī)는 불교신도였다. 우연한 기회에 부처님의 설법을 접하게 된 그녀는 깊은 감동을 받고, 이후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신심 깊은 우바이로 살았다. 바라드와자는 자신과 종교를 함께 해주지 않는 다난쟈니가 야속했다. 게다가 열성적인 불교도였던 다난쟈니는 삼보귀의의 게송을 입에 달고 살았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매일 입버릇처럼 읊어대는 아내의 이 말에 바라드와자는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넌덜머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불법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찬 다난쟈니의 마음을 움직일 도리가 없어 난감할 뿐이었다. 이런 감정은 다난쟈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불법을 접하게 하여 부처님에 대한 남편의 편견을 깰 수는 없을까, 고민이었다.


논리로 불법 깨겠다며 부처님께 도전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바라드와자는 500명의 바라문을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하려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내 다난쟈니가 마음에 걸렸다. 바라문교도가 아닌 그녀가 혹시 실례를 범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일 500명의 바라문을 초대하여 식사 공양을 올리려 하니, 제발 내일만큼은 그 입에 달고 사는 삼보귀의의 게송을 읊지 마시오.”
하지만 다난쟈니는 말한다.
“죄송하지만, 그것만은 약속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입에 익숙해져 버린, 자신의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게송이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중얼거리며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어 온 말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를 말이었던 것이다. 바라드와자는 분노했다. 내일 하루만 조용히 있으라는데 그걸 약속하지 못하겠다니…. 그는 순간 이성을 잃고 화를 내며 칼을 뽑아들었다.


“약속하시오. 약속하지 않는다면 이 칼로 당신을 죽여 버릴 것이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으름장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용히 말한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두 사람은 밤새도록 다투었다. 그렇게 날은 밝았고 공양을 받기 위해 500명의 바라문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난쟈니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손수 바라문들을 접대했다. 남편과의 싸움으로 심신이 지쳐있었지만 남편이 초대한 바라문들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음식을 차리다 그만 그릇이 한 쪽으로 기울면서 뜨거운 국물이 그녀의 손등에 튀었다. 순간 너무 놀란 그녀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삼귀의의 게송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음식을 기다리던 500명 바라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자신들을 초대해 놓고 부처님에 대한 귀의를 입에 담는 그녀를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바라문들은 불쾌해하며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이제 바라드와자도 더 이상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밥상을 차려주면서도 부처님에 대한 귀의를 외치는 그녀였다. 평소부터 못마땅했던 감정이 드디어 폭발했다. 바라드와자는 말했다.
“이제 그만 좀 하시오. 당신이 항상 그토록 칭송하고 존경하는 그 빡빡머리 사문을 내 오늘 논파해 보일 것이오.”
그 말을 듣자 다난쟈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좋을 대로 하세요. 그 어떤 사람 혹은 신이라 할지라도 그 분을 논파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찾아 가 보세요. 그러면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아내의 대답에 한층 불쾌해진 바라드와자는 그 길로 부처님이 계신 죽림정사로 달려갔다. 그리고 인사를 나눈 후 한쪽에 앉아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고타마여, 무엇을 죽이면 행복하게 자고, 무엇을 죽이면 슬퍼하는 일이 없겠는가. 고타마여, 당신은 무엇을 죽이는 것을 칭찬하는가.”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바라문교에서는 가축 등의 살생이 권장되었는데, 부처님은 살생을 금지했다. 바라드와자는 이 사실을 알고 부처님도 살생을 칭찬하는 경우가 있는가라고 비꼬아 질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바라문의 내면을 들여다보신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분노를 죽이면 행복하게 자고, 분노를 죽이면 슬퍼할 일이 없느니라. 바라문이여, 독의 근본인 분노를 죽이는 것을 성자는 칭찬하느니라. 그것은 죽이고도 슬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라.”
부처님의 대답을 들은 바라드와자는 당황했다. 지금 자신의 마음이 안고 있는 문제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읽어낸 답변이었다. 이 적절한 설법은 그 동안 바라드와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던 부처님에 대한 모든 반항심과 편견을 일시에 거두어갔다. 그는 말한다.


“놀랍습니다. 존자 고타마시여! 놀랍습니다. 마치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듯이, 가려진 것을 벗겨주듯이, 길을 잃어 헤매는 자에게 길을 알려 주듯이, 혹은 ‘눈뜬 자는 빛을 보리라’ 며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추어 주듯이, 존자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에 불법에 대한 신심을 일으킨 바라드와자는 부처님께 청하여 출가하게 되었고, 이후 열심히 수행하여 아라한이라는 지위까지 올랐다고 한다.


출가 소식에 친구들도 불교 귀의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바라드와자의 친구들은 당황했다. 그토록 불교를 싫어하던 바라드와자가 갑자기 불교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출가까지 했다는 소문이다. 고타마가 바라드와자에게 몹쓸 짓을 하여 그의 이성을 흐리게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친구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며 부처님이 계신 죽림정사로 쫓아갔다. 그리고는 부처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비난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아무 말 없이 그 욕설을 다 듣고 나신 후 그들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하셨다.


“바라문이여, 멀리서 친척이나 친구가 객으로 찾아오면 당신은 그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접대하겠지요.”
“그렇소.”
“그런데 만약 그들이 그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가 먹어야 합니까?”
“그야 주인인 내가 먹어야겠지요.”
“바라문이여, 바로 그와 같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비난했지만 나는 그것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욕설과 비난은 주인인 당신에게 돌아가,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바라문은 부처님이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한 것이라 생각하며 “빔비사라왕과 왕신들은 ‘사문 고타마는 최상의 깨달음을 연 아라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 보라. 고타마는 이렇게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이를 들으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화내지 않고, 신심을 잘 제어하고, 올바르게 생활하며, 지혜 있어 해탈하고, 평화로운 적정(寂靜)을 이룬 자에게 어찌 분노가 일어나리오. 분노에 대해 분노로 되돌려주는 것은 더 나쁜 일이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로 되돌려 주지 않는다면 그는 두 개의 승리를 얻나니 이는 자신과 상대, 양쪽을 모두 이익하게 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만이 이와 같은 사람을 우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설법을 들은 바라문은 크게 감복하였고 함께 온 친구와 더불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또한 다른 2명의 친구도 역시 각각 적절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새하얀 천을 물들이는 일과, 이미 어떤 색으로든 물들여진 천을 다시 물들이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과정도 어렵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도 힘든 것이다. 특히 종교는 한 사람의 영혼까지 사로잡는 법이다. 이교도에 대한 전법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이자랑 박사

하지만 부처님은 조금의 주저나 망설임도 없이, 그것도 오로지 진리가 지니는 설득력으로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셨다. 한 두 번의 문답 속에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진리를 발견한 바라드와자, 그리고 그의 바라문 친구들…. 이들은 부처님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자랑 박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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