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관음도량 낙산사
35. 관음도량 낙산사
  • 법보신문
  • 승인 2011.09.28 09: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음 자비로 험한 세상에 내던져진 중생 구하려 창건

오랜 전쟁에 민심 피폐
중생들 의지할 곳 절실

 

의상이 낙산 관음굴서
관음보살 친견 후 창건

 

 

▲ 의상대사는 세상이라는 바다에 난파당한 사람들을 관음보살의 자비의 손길로 구하려는 발원으로 낙산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그곳에 절을 세웠다. 사진은 하늘에서 본 낙산사 전경.  문화재청 제공

 


문무왕 10년(670),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일차적으로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조정에 알렸다. 670년부터 시작된 당나라의 신라 침략은 67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신라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거대한 대제국 당나라의 군대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신라, 비록 전쟁에서는 승리했다지만, 신라가 당해야 했던 고통은 말로 다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제하며 위로할 것인가? 이것이 귀국 후 몇 년 동안 의상의 화두였을 것이다. 이에 의상은 관음보살의 구원을 생각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난파당한 사람들을 관음보살 자비의 손길로 구하려는 발원, 그 발원을 생각했던 것이다. 망망한 삶의 바다에서 관음보살의 구원이 없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겠는가? 그러나 관세음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한다.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觀音窟)을 찾아갔다. 강원도 양양의 해변가 오봉산(五峰山)에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심으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했고, 그리고는 낙산사를 창건했다. 낙산사의 창건연기설화는 이렇다.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大悲), 즉 관음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眞身)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 한 것이다. 의상은 굴 앞의 50보쯤에 있는 바위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의상은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했다.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나왔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았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니 말했다.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는데,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하고, 다시 대나무는 없어졌으므로 바로 관음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서역의 보타락가산에 관음진신이 항상 머문다는 설에 따라 동해의 낙산사에도 관음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이 정착되었는데, 이는 의상에 의한 것이었다. 낙산에는 관세음보살이 언제나 머물고 있다고 믿는 것을 관음진신주처신앙(觀音眞身住處信仰)이라고 한다. 이 신앙의 배경은 ‘화엄경’에 있다. 이 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의하면, 금강산에는 법기(法機)보살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천관산에는 천관(天冠)보살이 상주설법(常住說法)한다고 한다. 그러나 관음주처 신앙은 이 경전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그 배경이 있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28번째로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데, 그가 곧 관음보살이다. 관음보살은 남방 해상의 광명산(光明山), 곧 보타락가산에서 상주 설법하고 있었는데, 선재동자가 묻는 보살도(菩薩道)에 대해, 일체 중생들이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서원을 세워 대비법문광명행(大悲法門光明行)을 성취했다고 했다. 이처럼 낙산의 관음신앙이 ‘화엄경’에 토대한 것이라면, 과연 의상에 의해 이 신앙이 유포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관음의 주처가 ‘육십화엄’에는 광명산으로, ‘팔십화엄’에는 보타락가산으로 되어 있는데 ‘팔십화엄’은 의상이 돌아가기(702년) 직전인 699년에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타락가산이라는 산 이름은 반드시 ‘팔십화엄’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646년에 쓰여진 현장(玄)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도 포달락가산(布洛迦山) 산꼭대기에 천궁(天宮)이 있어서 관자재보살이 왕래하며 뵙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나타나 위유(慰喩)한다고 했다. 그리고 보타락가산은 소백화산(小白花山)으로도 불리는데 ‘삼국유사’에도 서역의 보타락가산은 백의대사(白衣大士)가 머무는 곳이므로 이곳에서는 소백화라고 한다고 했다. 이처럼 보타락가산이라는 지명은 ‘팔십화엄’에만 쓰인 것이 아니고, 또한 그 한역(漢譯)인 소백화산으로부터 의상이 백화도량(白花道場)이라는 용어를 이끌어 쓴 것으로 볼 때 낙산의 관음신앙과 의상과의 관계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에서 예배·발원할 때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었다. 이 발원문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이제 관음 거울 속의 제자 몸이 제자의 거울 속 관음대성에게 목숨 바쳐 귀의하옵니다. 간절한 발원의 말씀 사뢰오니 가피(加被)의 힘 드리워 주옵소서. 오직 바라옵건대 제자는 세세생생토록 관세음을 칭송하며 스승으로 모시고, 보살이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듯 저도 또한 관음대성을 정대하겠습니다.”


자비에도 두 측면이 있다. 관음의 응현(應現)과 구제를 강조하면 타력신앙이, 그리고 중생구제를 서원하는 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실천적 자비행인 이타행(利他行)이 된다. ‘법화경’에 의거한 관음신앙은 구복과 구난의 성격이 강하지만, ‘화엄경’ 입법계품에 의한 관음신앙은 구도적이고 실천적이다.


“관음대성의 거울 속에 있는 제자의 몸이 제자의 거울 속에 계시는 관음대성에게 귀명정례(歸命頂禮)합니다.”
이 발원에는 자리와 이타의 두 뜻이 있다.


관음보살은 이 세상의 하고 많은 중생들을 구하고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낙산사의 관음 또한 갖가지의 모습으로 화현해서 교화했다는 영험설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특히 한 마리 파랑새로 변하여 사람들을 일깨워 준다는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물론 지극한 정성과 독실한 신앙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파랑새는 그 모습을 나타낸다.

 

구도적·실천적 관음신앙
신라에 뿌리내리는 계기

 

원효도 낙산사 향했으나
세 번 보고도 못 알아봐


의상이 동해의 관음굴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원효는 의상에게 뒤질세라 관음을 친견하기 위해 낙산사로 향했다. 원효가 낙산사의 남쪽 교외에 이르렀을 때,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희롱삼아 그 벼를 얻고자 청했다. 여인은 벼가 황무(荒蕪)하다고 장난삼아 대답했다. 원효가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자가 월경이 묻은 옷을 빨고 있었다. 원효가 물을 청하니, 여인은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쏟아 버리고 다시 깨끗한 물을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 있던 소나무 위에서 한 마리 파랑새가 말했다.


“제호(醍)를 마다한 화상아!”


파랑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가 절에 이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는데, 그때야 먼저 만났던 성녀(聖女)가 곧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하였다. 원효가 관음굴에 들어가 관음의 진용(眞容)을 보려 했지만,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관음송은 구불구불한 줄기와 가지가 주위를 수십 보나 덮고, 무척이나 기이한 형태의 소나무로 고려후기까지도 살아 있었다. 원효가 빨래하던 여인으로부터 물을 얻어 마신 그 우물은 낙산 아래에 있었는데, 냉천(冷泉)이라 했다.


원효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논에서 벼를 베고 있던 여인도, 다리 밑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여인도 모두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원효는 처음부터 눈치 채지 못했다. 원효는 벼 베는 여인에게 다가가 농담을 걸었다. 벼를 얻고 싶다고. 그 여인도 농담으로 받아 넘긴다. 벼가 흉년이라고. 원효는 멋 적게 당한 편이다. 벼가 흉년이라는 농담조의 대답에는 “당신은 황당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낙산사의 관음보살을 친견하기에는 정성이 부족하다는 암시였는지도 알 수 없다. 빨래를 하던 여인은 물을 청하는 원효에게 더러운 물을 떠 주었다. 그러나 원효는 그 물을 버리고 다시 깨끗한 물을 떠 마신다. 두 번째의 시험에서도 불합격이었다.


그 때 우물 가 소나무 위의 파랑새가 빈정댄다. 원효를 향해 “제호를 마다하는 화상”이라고. 더러운 물을 버리고 다시 깨끗한 물을 떠서 마시는 원효를 두고 가장 좋은 맛인 제호의 맛을 모르는 중이라고 나무라고는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원효는 아직도 더러움과 깨끗함, 참된 것과 속된 것 등을 분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상태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더럽다고 마시지 않고 버린 그 물이야말로 참으로 좋은 맛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원효는 그 때까지도 파랑새의 말뜻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파랑새가 관음의 화신이었다는 사실도 물론 알 턱이 없었다. 낙산사 관음보살의 자리 아래에 있는 신발 한 짝이 파랑새가 앉았다가 날아간 소나무 밑에서 본 신발과 같은 것임을 보고서야 비로소 모든 상황을 깨닫게 되었다.


원효는 세 차례나 관음의 화신을 만나고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다시 관음굴에서 관음을 친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풍랑이 크게 일어 허락하지 않았다. 원효는 끝내 관음을 만나지 못하고 낙산사를 떠났다. 지극한 기도로 관음으로부터 수정염주까지 받았던 의상에 비하면 풍랑으로 인해 관음굴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갔다는 원효의 모습은 초라하게 그려져 있다. 낙산사의 주인공은 역시 의상이다.

 

▲ 김상현 교수

원효는 조연으로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원효도 나중에는 알았다. 벼를 베는 여인도 빨래하던 여인도, 그리고 파랑새도 모두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