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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부석사에 밝힌 화엄의 등불

기자명 법보신문

궁벽한 산속에 밝힌 법등, 신라 무진등으로 빛나다

 

의상이 676년 태백산에 창건
선묘, 석룡으로 변해 도량수호


정토신앙 배경으로 가람배치
국왕의 토지·노비 시납 거절

 

 

▲해동화엄초조인 의상대사는 미타정토신앙에도 깊이 매료돼 평생 서방의 극락세계를 향해 앉았다고 전해진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무량수전 본존불을 서쪽에 배치하는 등 전체적인 가람구조가 미타신앙과 깊이 관련돼 있다.   부석사 제공

 

 

의상은 화엄을 전할 좋은 터전을 찾아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했다.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의 바람, 그리고 마소의 접근도 어려운 태백산의 한 궁벽한 곳에 이르러 말했다.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한 이곳은 참으로 법륜을 굴릴 곳인데도 어찌하여 권종이부(權宗異部)의 무리들이 500명이나 모여 있을까?”


의상은 또 조용히 생각했다. 대화엄교는 복선(福善)의 땅이 아니면 흥하지 못한다. 전쟁의 시대 7세기를 살았던 의상은 누구 못지않게 전쟁의 참화를 목격했다. 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668년에 고구려가 망했으며 부석사가 창건되던 바로 직전까지도 당나라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태백산에 부석사를 지어 법륜을 굴릴 터전으로 삼고자 했던 의상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그때였다. 항상 의상을 따라다니면서 수호하고 있던 선묘룡(善妙龍)이 의상의 생각을 몰래 알고, 곧 허공중에서 큰 신변을 일으켜 넓이 1리나 되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가람 위를 덮고 떨어질듯 말듯 했다. 놀란 여러 승려들은 갈 바를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의상은 드디어 이 절에 들어가 겨울에는 양지바른 곳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화엄경’을 강의함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몰려들었다.


이는 부석사 창건설화다. 한 마리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며 신라로 왔던 선묘, 그는 이제 의상의 부석사 창건을 돕기 위해 부석(浮石)으로 변하여 권종이부(權宗異部)의 승려들을 축출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에는 선묘룡이 의상의 화엄전교를 돕고 화엄도량을 수호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권종이부를 법상종(法相宗)에 속한 승려들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화엄종의 진실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꾸며진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튼 부석사(浮石寺)가 창건된 것은 문무왕 16년(676)으로 당나라와의 전쟁도 끝난 직후였다.


부석사에서 화엄사상 전교
강의와 제자 양성에 매진


국왕이 새 도성 축성 때엔
직접 편지 써서 중단 촉구


의상을 도와서 천리 이국땅에 오게 된 선묘의 넋은 13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부석사를 지키면서 살고 있으니, 이 절의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 석용(石龍)이 그것이다. 본존 아미타불 바로 밑에서부터 머리 부분이 시작하여 선묘정(善妙井)에 그 꼬리 부분이 묻혀 있다고 하는 이 석용은 선묘화룡의 설화를 한층 더 실감나게 설명해 준다. 그뿐만 아니다. 현재 부석사에는 선묘정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의 동쪽에 있는 선묘정에 가물 때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었다고 한다. 이 우물에는 선묘룡이 살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선묘의 넋이 변하여 되었다는 부석은 지금도 무량수전 뒤편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큰 자연 반석으로서 석괴(石塊) 위에 비스듬히 놓여 있다. 지금은 이 반석이 공중에 떠 있다고 믿을 사람은 없다. 또한 공중에 떠 있지도 않은 돌을 왜 부석이라 하느냐고 따질 필요도 없다. 사도(邪道)에 집착한 무리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이 돌이 공중에 떠다녔다는 이야기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만이다. 지금도 부석사에는 선묘의 상을 봉안한 선묘각(善妙閣)이 있다. 사찰 경내에 여인상을 모신 경우는 오직 부석사뿐이다. 그러나 선묘는 세속적인 사랑을 못 잊어 신라까지 따라온 여인은 아니다. 해동화엄시조 의상과 화엄의 근본도량을 수호하는 화엄신중(華嚴神衆)으로서 오늘도 부석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훗날 선묘설화가 일본의 고산사(高山寺)에서 화엄의 수호신으로 숭상될 수 있었던 것도 비슷한 동기였다.


의상은 정토신앙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그는 오로지 안양(安養)을 희구했기에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을 정도였다. 부석사는 신라 화엄종의 근본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람배치는 미타정토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부석사의 석단은 일주문에서 무량수전까지 크게 세 구획으로 나누고 구체적으로는 9단으로 구분된다. 이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토대하는 구품왕생(九品往生)을 의미하고, 안양루(安養樓)를 지나서,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이르러 아미타불을 친견할 수 있도록 배치된 것도 정토신앙과 관계된다. 남향의 무량수전 본존불인 아미타불을 동향으로 봉안한 법당의 구조는 일생 서방의 극락세계를 향하여 앉았다는 의상의 정토신앙과도 통한다.


궁벽한 산속에 밝힌 화엄의 법등(法燈), 그 등불은 무진등(無盡燈)으로 빛났다. 의상이 켜든 화엄의 불빛은 곧 신라사회로 퍼졌고, 그의 명성 또한 바람처럼 번졌다.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 부처님의 후신(後身) 등으로 추앙되어 왔고, 또한 성인(聖人)으로 존경되기도 했던 의상법사. 그가 이처럼 존경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화엄대교(華嚴大敎)를 전함으로써, 그 밝은 화엄의 빛을 신라 사회에 두루 비춰주었던 은혜 때문이다. 최치원이 그의 ‘전등묘업(傳燈妙業)’을 찬양했던 것도,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의상전교(義湘傳敎)라는 제목을 설정하고, “온갖 꽃 캐어와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같은 봄이구나”라고 찬양했던 뜻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부석사를 중심으로 전개한 의상의 전교 활동은, 신라 사회에 널리 소문이 퍼져서 국왕이 그를 더욱 공경하게 되고 가난한 백성들의 입에까지 그의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였다. 국왕은 토지와 노비를 부석사에 시납(施納)하여 공경의 뜻을 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상은 국왕의 호의를 사양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여러 성을 쌓고 궁궐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단장했다. 특히 21년(681) 6월. 왕경(王京)을 새롭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관리에게 명했다. 도성(都城)을 새롭게 축성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부석사의 의상은 왕에게 글을 올려 간(諫)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밭에 선을 그어서 성(城)이라고 하더라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다 하더라도 재앙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의상의 이 글을 접한 문무왕은 역사를 중지하였다.
의상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십대제자는 더욱 유명했다.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십대제자는 모두 아성(亞聖)으로 불렸고 각기 전기가 있었다고 한다. 십대제자는 ‘십성제자(十聖弟子)’로 불리기도 했다. 십대제자 중에서도 진정, 상원, 양원, 표훈 등은 특별히 사영(四英)이라고 했다.


의상은 제자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태백산의 부석사와 대로방(大蘆房), 그리고 소백산의 추동(錐洞) 등지에서 화엄교(華嚴敎)를 전했다. 어떤 때는 그가 지은 ‘법계도(法界圖)’를 가르치고, 또 어떤 때는 ‘화엄경’을 강의했으며, 법장이 보내온 ‘탐현기(探玄記)’를 해석하기도 했다. 부석사에서 사십일회(四十一會)를 개최하기도 했고, 추동(錐洞)에서는 90일 동안이나 ‘화엄경’ 강의에 전념하기도 했다. 제자들이 도움을 청해서 물어올 때면, 그는 급히 서두르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서 살핀 다음 의문 나는 점을 술술 풀어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게 계발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훈계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잘 쓰도록 하라. 그리고 언제나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표훈과 진정 등 10여 명 제자가 스승 의상에게 ‘법계도’를 배울 때였다. 그는 제자들을 향해서 범부 오척(凡夫五尺)의 이 몸이 곧 법신불(法身佛)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했다.


“자네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 한다.”
의상은 어느 날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만약 정해진 것이 옛날부터라고 한다면, 곧 연기(緣起)에 성품이 있게 되어서 자재(自在)하지 못할 것이다. 연기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없는 것은 머무름이 없는 것이고, 머무름이 없는 것은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며,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개최한 90일 동안의 ‘화엄경’ 강경법회에서 의상은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을 따라 가면서 마음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정(返情)이다. 들리는 것을 따라가면서 들은 대로 취하지 말라. 그러면 그것으로 말미암은 바를 능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존재의 참다운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내는 것을 ‘싹이 난다(芽生)’고 하고, 무상보리심을 내지 않는 것은 등짐[背]이 되니 ‘싹이 난다’고 하지 않는다.”

 

▲ 김상현 교수

이것은 제자 지통이 스승의 강의를 기록하여 남긴 ‘지통기(智通記)’ 중의 한 구절이다. 의상은 태백산에 밝힌 화엄교의 등불이 신라에 두루 비칠 것을 염원했고, 그 법등이 오래오래 전해지도록 노력했다. 그 노력은 교단의 조직과 확대, 제자 교육 등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태백산에서 밝힌 그 하나의 등불은 백이 되고 천이 되고 만이 되어 세월의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타는 무진등이 되었던 것이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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