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 물질대등과 가치대등, 그리고 불교적 혼란

기자명 법보신문

가치기준 혼란하면 집단의 혼란 가중

 

▲미얀마 스님들의 탁발 모습. 부처님 당시의 승가 모습을 가장 잘 보전하고 있다.

 

 

간혹 법당에 맨발로 들어가는 것을 규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는다. 어찌 이뿐이랴, 민소매와 핫팬츠도 문제가 된다. 그래서 태국 왕궁사원이나 터키 블루모스크처럼 덧입을 수 있는 행주치마와 같은 형식의 의복을 빌려주자는 의견도 있다.


필자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주 듣는 것은 계율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그래서 일단은 “부처님도 회색 몸빼를 입은 할매보다는 짧은 옷을 입은 젊은이들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하며 우스갯소리로 회피하곤 한다.


언뜻 보기에 맨발로 법당에 들어가는 것을 규제하는 것은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인도가 맨발문화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문제가 그리 쉽지 않다. 붓다는 맨발의 성자였다. 또 인도문화권에서 맨발은 존숭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래서 인도문화권에서 중요사원에 들어갈 때나, 존경받는 큰스님을 친견할 때 우리는 맨발을 종용 당한다.
중국문화권에서 맨발은 분명 어른을 뵙는 자세가 아니다. 그러나 제사상에서 중심은 위패가 되듯, 법당에서의 기준은 붓다가 된다. 이럴 경우 맨발은 허용되어야 하는가, 아닌가?


노출문화도 마찬가지다. 유목문화는 옷을 딱 붙게 입는다. 의복의 품이 클 경우 말 타는 것 등에서 크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농경문화는 옷의 품이 넓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도포나 장삼과 같은 옷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품이 큰 옷은 자칫 너무 헐렁하기 때문에 바깥쪽에 끈을 매고는 한다. 이 끈을 ‘신(紳)’이라고 하는데, 신사(紳士)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끈을 두른 교양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도문화와 같은 경우는 아리안족 유목문화와 아열대기후의 무더위 때문에 노출에 매우 관대하다. 그래서 붓다에게 법을 청하거나 할 때, 존숭의 예로 오른 어깨와 팔을 옷 밖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인도의 노출문화는 중국의 비노출문화로 전파되면서 문화 충돌을 겪는다.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홍명집’의 ‘사문단복론(沙門袒服論)’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붓다를 모심에 있어서 노출은 허용되어야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 역시 복잡해진다.


법당 맨발 출입 나라마다 달라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은 물질평등에 기초한 동등성과 법당의 주체인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는 예의규정에 따른 것이다. 즉, 인도에서의 맨발과 우리나라에서의 맨발 그리고 인도에서의 노출과 우리나라에서의 노출을 대등하게 보고, 존숭의 대상이 되는 붓다를 중심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평등에는 이러한 물질평등 말고도 가치평등이라는 것이 있다.


자동차문화와 관련 우리는 접촉사고에도 폭언이 오가는 경우가 있는데, 미국에서는 명함만 교환하는 정도로 쉽게 마무리 한다. 이것을 놓고 우리 자동차문화가 후진적이기 때문이라고 하자, 김용옥선생이 이를 거세게 비판한 적이 있다. 요지는 이렇다. 미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자동차는 탈 것이라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자동차가 필요 없어도 이를 통해 신분을 나타내려는 자존심의 가치이기 때문에, 양자는 같은 자동차라도 서로 비교대상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미국의 자동차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신발정도며, 우리 역시 부주의로 신발을 밟혔다고 해서 얼굴을 붉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전자가 물질평등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면, 후자는 가치평등을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필요에 따라서 소형차와 대형차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나 지위에 따라서 소형차와 대형차를 선택한다. 속칭 소형차를 타면 무시당한다는 인식이 우리문화에는 있는 것이다. 또 차도 못쓰게 돼서 바꾸는 게 아니라, 몇 년 지나면 체면 때문에 바꾸는 경우가 더 많다. 이는 차가 우리에게는 자존심의 상징이라는 주장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사실 이러한 문화배경 때문에 서양에서는 일반화되어 있는 소형차나, 자동차 10년 타기는 우리에게는 그렇게도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가치평등은 물질평등과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실제로 불교에도 이러한 가치평등의 관점에서 현재 제재되는 측면이 있다. 가죽신과 같은 경우는 본래 붓다에 의해서 허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백안시된다. 유목문화인 인도에서 가죽신은 필요에 의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농경문화인 중국에 오게 되면 가죽신은 귀한 것이 된다. 그래서 제재된 것이며, 더 나아가 현재의 각 본사들은 고무신과 털신의 통일을 내적으로 규정화하고 있다. 그런데 고무신과 털신이야말로 붓다적인 타당성이 전혀 없는 신발이다.


이는 육식도 마찬가지다. 유목문화 속에서 탁발에 의존했던 붓다 당시 승려들은, 음식에 대한 선택권이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신도가 공양하는 대로 먹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육식에 대한 거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후대로 오고, 또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사원에서 주체적으로 음식을 해먹게 되자, 육식의 금지문제가 강하게 대두된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불교는 암묵적인 육식금지규정을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스님들 육식도 가치정립 필요


물질평등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가죽신이나 육식은 모두 붓다에 의해서 허용된 것이므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가치평등의 관점에 따르면, 이는 문제가 된다. 이러다보니 자기가 유리한 쪽을 선택해서 이현령비현령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증대한다. 3정육이나 5정육만 아니면 붓다가 허용했다고 하면서, 버젓이 고기를 먹는 스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참으로 난감한 일인 동시에, 새로운 가치정립이 절실히 요청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준을 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기준의 정립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비근한 예로 종단의 권유로 최근에는 사홍서원을 노래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전통식으로 할 때는 3번 반배하던 것이 한글화되면서는 4번이 되고 말았다. 중국문화권에서 4는 사(死)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피해온 전통이 생각 없이 시행된 한글화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힌 것이다. 이러한 무지가 견인해서는 결코 안 된다.

 

▲자현 스님

새로운 기준은 여러 가지 관점의 절충 속에서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지, 단순히 ‘한문은 어려우니까 이제부터는 한글로’라는 식의 즉흥적인 발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치기준이 불분명하면 집단의 혼란은 가중된다. 흐린 물이 맑아지면 고기가 돌아오듯이, 승단이 청정하면 수행자는 많아진다. 물을 맑히려고 하지는 않고, 고기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이 아니겠는가!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