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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진정의 출가

기자명 법보신문

홀어머니 권유로 출가해 출세간의 도를 이루다

군 복역 중에도 품 팔아
홀어머니 봉양하며 생활

 

훗날 출가하려 했으나
어머니 권유로 곧 삭발

 

 

▲의상 스님의 4대 제자 중 한 분인 진정 스님은 어머니의 거듭된 권고로 출가를 결심한 후 이곳 부석사에서 의상법사의 제자로 화엄을 공부했다. 부석사 제공

 


의상(義相)이 부석사에서 화엄대교(華嚴大敎)를 강의하여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이 신라 사회에 두루 퍼지자, 진정(眞定)도 군대에 있으면서 이 소문을 들었다. 진정의 마음은 이미 화엄도량 부석사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는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군대 복역의 여가에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다리 부러진 솥 하나, 그것이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그 솥마저 절 지을 쇠붙이를 구하는 승려에게 보시해 버렸다. 밖에서 돌아온 진정에게 이 사실을 말하며 어머니는 아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살펴보았다. 진정은 기뻐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불사(佛事)에 시주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솥이 없다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에 질그릇으로 솥을 삼아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했다.
진정은 어느 날 망설이며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불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나 빠른데, 효도를 다 마친 후면 역시 늦지 않겠느냐? 어찌 내 생전에 네가 불도를 알았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속히 가는 것이 옳겠다.”
진정이 말했다.


“어머님 만년에 오직 제가 곁에 있을 뿐인데, 어찌 차마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아, 나를 위하여 출가하지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온갖 풍성한 음식으로 봉양하더라도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간에서 빌어서 생활하더라도 또한 타고난 수명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니, 꼭 나에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진정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는 즉시 일어나 쌀자루를 거꾸로 터니 쌀이 일곱 되가 있었는데, 그 날로 밥을 다 짓고 말했다.
“네가 도중에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까 염려된다. 내 눈 앞에서 당장 그 하나를 먹고 나머지 여섯을 싸 가지고 빨리 떠나도록 하라.”
진정이 흐느껴 울면서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도 역시 사람의 자식으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며칠간의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 가지고 간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세 번 사양하고 세 번 권고했다. 진정은 어머니의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 길을 떠나 밤낮으로 갔다.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법명(法名)을 진정(眞定)이라고 했다.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출가하기를 망설이는 진정과 당장 집을 나서라고 재촉하는 어머니의 대화는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아들의 봉양을 마다하고 출가를 권하여 출세간의 업을 닦게 한 진정 어머니, 그는 풍성한 음식으로 봉양받기보다 아들이 불도를 알았다는 소식 듣기를 원했기에 아들의 출가를 권했다.


진정은 부석사 의상 문하에서 부지런히 수업했다. 의상은 제자들에게 ‘화엄경’과 그의 저서 ‘화엄일승법계도’를 강의했다. 의상에게는 십대제자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진정(眞定)·상원(相元)·양원(亮元)·표훈(表訓)은 더욱 뛰어나 사영(四英)이라고 불렸는데, 진정은 사영 중의 한 명이었다.


진정은 출가한 지 3년 만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진정은 가부좌를 하고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7일 만에 일어났다. 설명하는 이는 추모와 슬픔이 지극하여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정수(定水)로써 슬픔을 씻은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선정(禪定)으로써 어머니의 환생하는 곳을 관찰했다고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실리(實理)와 같이 하여 명복을 빈 것이라고 했다.


선정에서 나온 뒤에 이 일을 스승 의상에게 아뢰었다. 의상은 문도를 거느리고 소백산의 추동(錐洞)에 들어가 풀을 엮어 초막을 짓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중에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장장 90일 동안이나. 강의가 끝나자 어머니는 진정의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했다.”
울면서 홀어머니를 떠나갔던 진정. 문전걸식하며 살던 어머니. 석 달간의 ‘화엄경’ 강의를 듣고 하늘에 환생했다는 소식. 화엄대교의 정법을 듣고 해탈한 영혼은 훨훨 하늘을 날았을 것이다.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집착도 없이.
“갖가지 음식과 여러 진귀한 보배로 공양하는 것은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요, 부모를 인도하여 바른 법으로 향하게 하여야만 은혜를 갚음이라고 한다.”


‘부사의광보살소설경(不思議光菩薩所說經)’의 말씀이다. 불교의 효는 부모를 인도하여 정법(正法)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解脫)케 하는 것이다.

 

의상 문하에서 참학 정진
어머니 부고에 7일간 선정

 

의상, 진정 위해 화엄 강의
지통이 내용 정리해 편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오지만, 부모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으로 올 수밖에 없다. 자식이 자라면 사랑하는 마음도 끊고 놓아 준다. 자신의 몸을 통해서 왔을망정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지는 않는다. 둥지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기를 빌어준다. 자식은 잊지 못한다. 그 지중한 은혜를.


착실한 제자 지통(智通)은 추동에서 계속된 스승 의상의 ‘화엄경’ 강의 요지를 정리하여 두 권의 책을 만들어 ‘추동기(錐洞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유통시켰다. 출가 전의 지통은 이량공(伊亮公)의 가노(家奴)였다. 그는 661년 어느 날 7세의 어린 나이로 영취산의 고승 낭지(朗智)의 문하로 가서 출가하였다. 낭지는 당시 유명한 고승이었다. 낭지의 문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지통, 훗날 그는 의상의 처소로 옮겨 화엄교학을 배웠다. 부석사가 창건되던 676년에 지통은 22세의 청년 승려였다. 고승 낭지로부터 이미 많은 것을 배운 이후에 의상의 문하를 찾은 지통이 의상의 여러 제자 중에서도 출중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지통은 부석사 사십일회(四十日會), 추동의 구십일회(九十日會), 태백산 대로방(大蘆房) 등지에서 의상의 강의를 들었다. 지통이 태백산 미리암굴(彌理窟)에서 화엄관(華嚴觀)을 닦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갑자기 큰 돼지가 굴의 입구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지통은 평상시와 같이 목각존상(木刻尊像)에게 정성을 다해 예했더니, 그 상(像)이 말했다.


“굴 앞을 지나간 돼지는 네 과거의 몸이고, 나는 곧 네 미래 과보로서의 불(佛)이다.”
지통은 이 말을 듣고 ‘삼세(三世)가 곧 일제(一際)’라는 법문을 깨달았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지통은 스승 의상을 찾아 이를 아뢰었는데, 스승은 그의 그릇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고 마침내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주었다. 스승으로부터 인가(認可)를 받기도 했던 지통, 그가 의상의 십성제자(十聖弟子), 혹은 의상 문하 사영(四英)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는 분명 의상의 상족 제자였다.


의상의 제자들 중에는 스승의 강의 내용을 기록·정리하여 책으로 펴내는 경우가 있었다. 의상은 이런 경우에도 제자의 이름을 따르거나 혹은 강의가 이루어진 장소에 의해 책 이름을 붙였을 뿐, 자신을 저자로 드러내지 않았다. ‘도신장(道身章)’은 제자의 이름을 따른 경우이고, ‘추동기’는 지명을 따른 것이다.


‘추동기’는 ‘화엄추동기(華嚴錐洞記)’, ‘추혈기(錐穴記)’, ‘추혈문답(錐洞問答)’, ‘지통기(智通記)’, ‘지통문답(智通問答)’ 등 여러 이칭이 있었다. 의상의 강의 내용을 기록한 ‘추동기’는 문장이 잘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고, 신라의 방언이 섞여 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고려의 의천(義天)은 “이 책을 엮은이가 문체에 익숙하지 못해서 문장이 촌스럽고, 방언이 섞여 있어서 장래에 군자가 마땅히 윤색을 가해야 할 것”이라고 했고, 실제로 고려후기의 이장용(1201~1272)은 이 책에 윤색을 가하여 ‘화엄추동기’라는 제목으로 유통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추동기’는 고려 후기까지 전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의 유통 기록은 없다. 다만 균여의 저서와 ‘법계도기총수록’에 ‘추동기’가 15회 정도 인용되어 그 단편적인 일문(逸文)이 전할 뿐이다. 일본에는 저자가 법장(法藏, 643~712)으로 명기된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 2권이 고대로부터 전해오고 있지만, 필격(筆格)이 매우 조잡한 이 책이 과연 법장의 저술인지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있었다.


필자는 ‘화엄경문답’이 곧 ‘지통기’의 이본(異本)이라는 사실을 10여년 전에 밝힌 바 있다. 균여의 저서 및 ‘법계도기총수록’에 인용되어 전하는 ‘추동기’의 일문을 ‘화엄경문답’과 대조해 보았더니, 균여의 저서 등에 인용되어 전하고 있는 ‘추동기’의 일문 15회 모두를 ‘화엄경문답’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전해온 ‘화엄경문답’은 법장의 저술이 아니라 의상이 강의하고 제자 지통이 기록·정리했던 ‘추동기’ 바로 그 책이다.

 

▲김상현 교수

의상이 ‘화엄경’을 강의한 내용의 165 문답이 그대로 수록된 ‘추동기’의 이본이 현존하고 있음은 다행스럽고도 반가운 일이다. 이 책에는 의상의 자상한 가르침이 넘쳐난다. 의상은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보이는 것을 따라 가면서 마음을 집착하지 말라. 들리는 것을 따라가면서 들은 대로 취하지 말라.”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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