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과 애욕이 그대로 진실한 지혜 해탈
어리석음과 애욕이 그대로 진실한 지혜 해탈
  • 법보신문
  • 승인 2011.10.1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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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라도 집착을 일으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 짓게 돼

 

법의 실상은 생멸 없는 모습으로

부처와 중생을 분별하지 않는다

 

 

중국 돈황 유림굴25굴. 당나라중기 관무량수경.

 

 

100.‘생멸이 없는 마음’을 알고 그 자리서 해탈

 

卽是心行中 求得三種解脫 衆生心性卽眞性解脫 癡愛卽實慧解脫 諸不善行卽是方便解脫. 是知 此一心眞性解脫 能空煩惱繫縛九結十使等. 如一檀樹 改四十由旬伊蘭林悉香 能令煩惱卽菩提故. 又 若斷惑懺罪 比餘漸敎 如華千斤 不如眞金一兩. 故云 若欲懺悔者 端坐念實相 則直了無生之心 當處解脫.

중생이 쓰는 마음에서 세 종류 해탈을 찾을 수 있다. ‘중생이 쓰는 마음의 성품이 그대로 참다운 성품 해탈[眞性解脫]’, ‘어리석음과 애욕이 그대로 진실한 지혜 해탈[實慧解脫]’, ‘온갖 선하지 못한 행이 그대로 지혜로운 방편 해탈[方便解脫]’이다.


이것으로 ‘한마음 그대로 참다운 성품 해탈[一心眞性解脫]’이 온갖 번뇌를 없앨 수 있음을 알아야 하니, 한 그루 전단향이 커다란 숲의 악취를 향기롭게 바꾸는 것처럼 번뇌 그대로 깨달음이 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단숨에 미혹을 끊고 죄를 참회하는 것을 점차 닦아나가는 가르침과 비교하면 고운 천으로 만든 꽃 천근이 황금 한 냥 값만 못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참회하려는 사람이 단정히 앉아 실상을 알아차리면 바로 ‘생멸이 없는 마음’을 보아 그 자리서 해탈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강설) ‘도를 닦아 해탈을 얻는다’는 말에서 뜻하는 해탈은 점차 닦아나가는 과정에서 말하는 해탈이다. 깨달음을 얻어 생사 자체가 해탈이 되면 ‘한마음 그대로 참다운 성품 해탈[一心眞性解脫]’이니 모든 차별이 단숨에 사라져, 중생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해탈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를 않는다. 해탈을 추구하는 ‘주체’와 해탈이라는 ‘객체’가 사라진 이 자리는 본디 고요한 마음으로서 어떤 법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번뇌를 없애지 않고 번뇌 그대로 깨달음이 되는 것이니, 번뇌를 일으킬 ‘나[能]’가 없으므로 내가 일으킬 ‘번뇌[所]’도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 쓰는 마음의 성품’, 어리석음과 애욕’, ‘온갖 선하지 못한 행’도 그대로 해탈이 되는 것이다.


구결(九結)은 중생을 얽매는 아홉 가지 번뇌이니 애욕, 성냄, 아만, 무명, 삿된 견해, 집착, 의심, 질투, 인색한 마음을 말한다.[愛··慢·無明·見·取·疑·嫉·] 십사(十使)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아만, 의심, 내 몸이 있다는 견해(有身見), 상견과 단견에 집착하는 견해(邊執見), 인과를 부정하는 견해(邪見), 잘못된 것을 옳은 것으로 믿는 견해(見取見), 잘못된 계율을 옳다고 집착하는 견해(戒禁取見)를 말한다. 이란(伊蘭)은 악취가 나는 나무 이름이니 이란림(伊蘭林)은 악취가 모여 있는 숲이다. 경전과 논에서는 이란의 악취는 번뇌에 비유하고 전단의 향기는 깨달음에 비유한다.


101. 깨달음은 잡히는 존재 아니고


首楞嚴經云 知見立知 卽無明本 知見無見 斯卽涅槃 無漏眞淨 云何是中 更容他物. 是知 世間生死 出世涅槃等 無量差別之名 皆從知見文字所立. 若無知見文字 名體本空 於妙明心中 更有何物. 如六祖偈云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用拂塵埃.


‘수능엄경’에서 “앎을 내세우는 지견’이 곧 무명의 근본이요 ‘보는 것이 없이 보는 지견’이 그대로 열반이라고 하나, ‘번뇌 없이 참으로 깨끗한 자리[無漏眞淨]’에서 어떻게 다른 것을 받아들이겠느냐.”라고 하니, 이것으로 세간의 생사와 출세간의 열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칭이 모두 지견에서 문자로 주장한 것임을 안다. 만약 지견과 문자로 이루어진 알음알이가 없다면 온갖 명칭의 바탕이 본디 공(空)이니, 이 밝고 오묘한 마음에 다시 어떤 경계가 있겠느냐. 이는 육조 스님께서 게송으로 말한 내용과 같다.


깨달음은 잡히는 존재 아니고

밝은 마음 이름뿐 실물 아니네.

본래가 한 물건도 있지 않거늘

일어날 번뇌가 어디 있을까?


강설) ‘중생의 무명 너머에 있는 부처님 세상’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것인데,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하여 육조 스님이 억지로 이것을 ‘깨달음’이나 ‘밝은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중생의 무명 너머에 있는 부처님 세상’은 잡히는 어떤 존재도 아니요, 이름만 있을 뿐이지 어떤 실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임시로 내세운 개념일 뿐 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지견과 문자로 이루어진 알음알이가 없다면 온갖 명칭의 바탕이 본디 공(空)이니 이 밝고 오묘한 마음이 깨달음이다.

 

102. 자신도 깨닫고 남도 깨칠 수 있어

 

迦葉問 涅槃解脫之義 世尊答 一百句解脫. 釋曰. 上來一百句解脫 文現不繁 更釋大意 只明一心眞性解脫. 以實慧解脫 顯此眞性 然後成方便慧解脫 故能自覺覺他 名之爲佛 卽是平等法身 天眞之佛.

가섭이 열반과 해탈의 뜻을 물으니, 세존께서 온갖 해탈을 설명하셨다. 그 온갖 해탈을 다시 언급하자면 번거롭지 않을까 싶어 다만 대의를 드러내니 오직 ‘한마음 참성품 해탈[眞性解脫]’을 밝힐 뿐이다. ‘진실한 지혜 해탈[實慧解脫]’로 참성품을 드러낸 뒤 ‘방편해탈方便解脫’을 이루니, 그러므로 자신도 깨닫고 남도 깨칠 수 있다. 이를 일러 ‘부처님’이 된다 하니, 곧 ‘평등법신’으로서 ‘천진한 부처님’이다.

강설) ‘일백구(一百句)’는 수많은 내용을 총괄하여 한마디로 말한 것이니 ‘일백구해탈’은 온갖 해탈을 말하는 것이다.

 

103. ‘생멸의 모습이 없는 법신[無相法身]’을 보지 못한다면

 

華嚴論 云 若也但修空 無想法身 卽於智不能起用 若但一向生想 不見無相法身 卽純是有爲. 又云 如是大悲 如是智慧 如是萬行 皆爲長養初發心住 初生佛家之智慧大悲 令慣習自在. 故時亦不改 法亦不異 智亦不遷 猶如竹葦 依舊而成 初生與終 無有細. 亦如小兒 初生而後 長爲大 無異大也. 是知 差別行門 皆入畢竟空中 無有分別. 如龍樹菩薩問曰.

‘화엄론’에서 “만약 공(空)만 닦아 ‘아무 생각이 없는 법신[無想法身]’이라면 지혜를 쓸 수 없고, 반대로 항상 어떤 생각만 일으켜 ‘생멸의 모습이 없는 법신[無相法身]’을 보지 못한다면 모두 유위법이 된다.”라고 하였다. 또 “부처님의 자비, 지혜, 만행은 모두 처음 발심한 사람을 도와 그들의 지혜와 자비가 무루 익어 자유자재하게 하니, 그러므로 시간이 바뀐 것도 아니고 법 또한 달라진 것도 아니며 지혜 또한 변한 것이 아니다. 이는 대나무와 갈대의 모습이 그대로 성장하여 처음이나 나중의 모습이 조금도 다름이 없고, 또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난 모습과 뒷날 어른이 된 그 모습이 사람의 모습과 다름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온갖 수행이 모두 다 언젠가는 공(空)에 들어가 분별이 없음을 알 것이다. 이는 용수 보살이 질문한 것과 같다.

 

若菩薩知佛是福田 衆生非福田 是非菩薩法 菩薩以何力故 能令佛與畜生等. 答曰 菩薩 以般若波羅蜜力故 一切法中 修畢竟空心 是故 於一切法 無分別. 如畜生 五陰十二入十八界和合生 名爲畜生 佛亦如是 從諸善法和合 假名爲佛. 若人憐愍衆生 得無量福德 於佛著心 起諸惡因緣 得無量罪. 是故 知一切法畢竟空 故不輕畜生 不著心貴佛. 復次 諸法實相 是一切法無相 是無相中 不分別是佛是畜生. 若分別 卽是取相.

 

문: 보살이 ‘부처님은 복전福田이요 중생은 복전이 아니다’고 알고 있다면 이는 보살의 법이 아니니, 보살은 어떤 힘으로 부처님과 축생을 평등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까?

답: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힘으로 온갖 법에서 마침내 공(空)인 마음을 닦은 까닭에 온갖 법에 분별이 없다. 오음(五陰) 십이입(十二入) 십팔계(十八界)가 어울려 생겨난 것 이를 일러 축생이라 하듯, 부처님도 이와 같이 온갖 좋은 법이 어울린 것을 임시로 일러 부처님이라 한다. 중생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덕을 얻겠지만, 부처님이라도 집착하는 마음으로 나쁜 인연을 일으킨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를 짓는다. 이 때문에 온갖 법이 마침내 공(空)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축생을 경멸하지도 않고 또한 집착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온갖 법의 실상은 모든 법에 ‘생멸이 없는 모습’이니, ‘생멸이 없는 모습’에서 부처님이니 축생이니 하는 분별을 하지 않는다. 분별한다면 이는 ‘상(相)’을 취하는 것이다.

 

강설) ‘아무 생각이 없는 법신’이라고 번역한 무상법신(無想法身)은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무기(無記)’에서 ‘기(記)’는 선인지 악인지를 판단하여 기록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기는 선으로 단정할 수도 없고 또한 악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기에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성품을 말한다. 이런 경계에 집착하여 깜깜한 곳에서 더 이상 공부를 챙기지 않고 안주함으로써 부처님의 지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무기공’이다. 이 이치를 모르는 수행자들이 이 경계를 높은 소견으로 삼기도 하는데 이는 공부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생멸의 모습이 없는 법신’인 무상법신(無相法身)이어야 참다운 법신이요 깨달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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