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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위두다바

기자명 법보신문

출신에 대한 분노로 사캬족을 멸망시킨 광인

아버지 파세나디왕 폐위하고 코살라국 찬탈
어머니 고향 사캬국서 받은 멸시 피로 갚아

 

 

▲삽화=김재일 화백

 


“왕이시여, 저쪽 히말라야 산기슭에는 한 정직한 민족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코살라국의 주민으로 부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가계는 아딧차(Ādicca, 태양)이며, 태생은 사키야(Sākiyā)입니다. 저는 그런 가문에서 출가했습니다.”


이는 고타마 싯닷타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기 전, 당시 최대강국인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로부터 태생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답한 말이다. 이 대답에서도 드러나듯이 사캬족은 자기 종족의 계보에 대해 매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사캬족의 시조는 아리아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인 감자(甘蔗, Okkāka)왕이라고 한다.
사캬족은 자신들을 고귀한 민족이라 여기며, 자국이야말로 당시 최고의 대국인 마가다나 코살라보다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이런 자부심으로 인해 사캬족 사람들은 약간 오만한 면도 있었던 듯한데 순수 혈통에 대한 자만과 집착은 훗날 사캬국을 피바다로 물들이는 계기를 제공한다.


부처님 당시 사캬국은 코살라국의 속국이었다. 코살라는 마가다와 더불어 당시 2대 강국으로 파세나디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파세나디는 부처님과 아주 친한 사이였다. 죽기 전 그가 부처님께 남긴 “부처님께서도 왕족이시고, 저도 왕족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코살라사람이고 저도 코살라사람입니다. 부처님도 80세이시고 저도 80세입니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은 자신의 속국인 사캬국 출신의 부처님에게 매우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왕은 재가신도로 살며 부처님과 모든 일을 의논하여 결정할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부처님을 향한 존경의 마음은 그로 하여금 부처님과 같은 종족인 사캬족으로부터 왕비를 맞이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나타났다. 즉, 사캬족과 친인척 관계를 형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캬족은 명문(名門)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왕은 서둘러 사캬국으로 사신을 보냈다.


“나는 사캬국으로부터 왕비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당신들과 친척이 되기를 원하니, 부디 내게 어울리는 왕녀를 보내주시오.”
한편, 파세나디의 전갈을 받은 사캬족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사캬족은 코살라왕가를 천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왕족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의 딸을 코살라의 왕비로 보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싫다고 안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행중인 부처님 때문에 3번 회군


“우리들은 코살라왕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은가. 만약 왕족의 여인을 보내지 않는다면 큰 원한을 사게 될 것이네. 하지만 보낸다면 우리들의 순수한 혈통은 파괴되고 말 것일세.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보낼 수도 안 보낼 수도 없는 상황. 그때였다. 당시 사캬국의 왕이었던 마하나마는 자신의 딸 와사바캇티야(Vāsabhakhattiyā)를 보내자고 제안한다. 와사바캇티야는 마하나마가 자신의 노비인 나가문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이 행동이 훗날 사캬족의 비참한 멸망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사캬족 사람들은 마하나마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딸을 사왓티로 보낸다.


파세나디에게 시집온 와사바캇티야는 왕의 첫 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위두다바. 성장하여 16살이 된 그는 무예를 닦기 위해 어머니의 고향인 사캬국을 찾았다. 당시 사캬족은 용맹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유학차 떠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매우 폭력적이고도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사캬국에 가서도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거만한 그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캬족 사람들은 그를 싫어했고, 특히 그가 노비의 자식이라는 점을 거론하며 경멸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공회당에서 그가 앉았던 의자를 가리키며 한 여자가 비아냥거렸다.


“이게 그 와사바캇티야라는 노비가 앉았던 의자구나.”
그리고는 우유를 섞은 물로 씻어내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혈통을 경멸하는 말을 들은 위두다바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며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이제야 어머니의 과거를 알았구나. 그래 내가 앉았던 자리를 우유 섞은 물로 씻어내려면 씻어내라. 내가 왕위에 오른다면 너희들의 숨통을 끊어 그 피로 내가 앉았던 자리를 씻어내고야 말겠다.”
어머니에 얽힌 불편한 진실, 혈통을 근거로 한 어머니와 자신에 대한 조소와 경멸…. 아직 어린 그의 마음은 심하게 상처받았고, 가슴 속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이 일을 계기로 와사바캇티야의 혈통은 코살라국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파세나디는 그녀와 위두다바를 예전처럼 대우하지 않았다. 자신의 호의를 무시한 채 자신을 감쪽같이 속인 사캬족에 대한 서운함 내지 분노 때문이었을까. 파세나디는 그들을 노비처럼 대했다. 이 일을 전해들은 부처님은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왕이시여, 사캬족이 한 일은 옳지 못합니다. 주려면 왕족의 여인을 주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십시오. 와사바캇티야는 왕녀이며 크샤트리야족의 왕 밑에서 관정을 받았습니다. 또한 위두다바는 크샤트리야족의 왕에 의해 태어났습니다. 예로부터 현자들도 ‘어머니의 성이 무엇이든 아버지의 성이야말로 표준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들은 파세나디는 “그래, 아버지의 성이야말로 표준이 아니겠는가”라며 옹졸했던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예전처럼 위사바캇티야와 위두다바를 대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위두다바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분노의 불길은 거세게 타올라갔다. 사캬국에서 있었던 일을 계기로 부왕과의 관계도 서먹해진 그는 결국 부왕을 폐하고 왕위를 빼앗게 된다. 파세나디가 궁을 비운 사이, 위두다바는 평소 파세나디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던 장군 카라야나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한 전승에 의하면 이때 파세나디는 부처님을 찾아뵙고 담화를 즐기고 있었는데, 이야기가 끝난 후 밖으로 나와 보니 수행 차 따라왔던 카라야나는 온데간데없고 한 필의 말과 시녀 한 명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위두다바의 야망을 안 카라야나가 그로부터 파세나디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왕이 부처님과 함께 있는 동안 왕권의 상징물을 빼앗아 위두다바에게 넘겼다고도 한다.


여하튼 부처님과의 즐거운 대화를 끝내고 나온 왕에게 들려온 소식은 아들 위두다바에 의한 반란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안 왕은 왕궁으로 향하지 않고, 그 길로 조카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마가다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왕이 도착했을 때 이미 밤은 깊어 성문은 닫혀 있었고, 근처 공회당에 지친 몸을 뉘었으나 결국 피로와 노쇠로 인해 탈진 상태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다음 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마가다국의 왕 아자타삿투는 숙부 파세나디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다고 한다.


사캬국 멸망시킨 후 갑작스레 사망


한편, 왕위에 오른 위두다바는 이제야 원한을 갚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대군을 일으켜 카필라성을 향해 출발했다.


“내 오늘 사캬족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리리라.”
그날 부처님은 아침 일찍 세상을 두루 관찰하시다 사캬족 사람들이 위두다바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게 되었다. 이미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성자이지만 어찌 친족에 대한 정과 측은함이 없을 수 있을까. 위두다바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친족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신 부처님은 카필라성 근교에 있는 앙상하여 그늘도 지지 않는 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위두다바왕국의 경계선 근처에는 잎이 무성한 큰 나무가 있었지만, 부처님은 굳이 이 나무를 선택하신 것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카필라성을 공격하러 가던 위두다바는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님을 발견했다. 그러자 다가가 예를 갖춘 후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 어찌하여 이렇게 더운 날씨에 앙상하여 그늘도 지지 않는 나무 밑에 앉아 계십니까? 저기 푸른 잎으로 우거진 나무 밑에 앉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냥 두십시오. 대왕이시여, 친족의 나무 그늘이 시원한 법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위두다바는 부처님이 사캬족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와 계신 것이라 생각해 부처님께 예를 갖춘 후 대군을 철회하여 사왓티성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사캬족에 대한 증오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다시 대군을 일으켜 카필라성으로 향했지만 다시 똑같은 나무 아래에 앉아계신 부처님을 발견하고는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기를 세 번. 하지만 네 번째 출병했을 때 부처님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사캬족이 이전에 지은 악업을 관찰하신 부처님은 그들이 저지른 악업이 마치 강물 속에 던져진 독과 같이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카필라성으로 들어간 위두다바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사캬족 사람들을 해쳤고 그들의 목을 따 얻은 피로 일찍이 자신이 앉아 모욕을 받았던 의자를 씻은 후 돌아갔다. 승리를 거둔 위두다바는 사왓티로 돌아가 왕궁에서 축하연회를 열었는데, 이때 하늘이 울며 큰 폭풍우가 몰아쳐 왕궁은 불타 강에 떠내려가고 왕과 군사들 역시 사라져갔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예기치 못한 불행으로 위두다바가 생을 마친 것만은 분명한 듯 하다.

 

▲이자랑 박사

부처님의 만년에 일어난 사캬족의 멸망. 어떻게든 친족의 비참한 최후를 막고 싶어하셨던 부처님의 간절한 마음, 그리고 이와는 달리 분노의 끝을 향해 질주한 위두다바의 광적인 행동이 묘하게 엇갈리면서 서글픔을 남긴다.
 

이자랑 박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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