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대립·상대 끊긴 세계로 돌아가야 참생명 찾아

전장서 살아온 건 부처님 가피
불법 널리펴는 ‘심부름꾼’ 서원


광덕·성철 스님 만나 불교 눈떠
직장 은퇴 후 육순에 정식 출가

 

 

▲한탑 스님

 

 

아미타부처님은 모든 부처님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는 명호다. 법장 비구는 청정국토 원력을 세우고 보살행을 실천하며 48대원을 성취해 아미타불의 명호를 얻게 되었다. 무량광불로서 지혜광명을 상징하는 아미타부처님이기에 그 명호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을 모두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염불행자가 부르는 명호가 ‘아미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 스님을 찾아뵙고 ‘아미타’ 세계의 진수를 들어보고자 담양으로 향했다.


고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스님은 한국은행, 한국전력, 교보생명보험 등에서 세속 일을 마친 후 육순에 출가했다. 늦깎이 출가지만 사실 마음출가는 이미 청년시절에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청년 김경만도 입대했다.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기 하루 전인 9월14일 뱃머리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 전에 서원했다.


“부처님이시여, 여기서 살아 나가면 민주주의 발전에 헌신하고 부처님 법을 펴는 심부름꾼이 되겠습니다.”
어릴 때 할머님께서 들려주신 일언을 다시 한 번 새겼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주신단다.”


전쟁에서 살길은 염송밖에 없다는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전장에 나섰다. 인천상륙작전서부터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는 동안에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어느 순간, 총알이 자신을 피해가는 듯했다’고 한다. 염불가피를 몸소 느꼈으니 염불신념은 더욱 굳건해졌을 터.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불교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를 때였다. 그럼에도 ‘부처님 법을 펴는 심부름꾼이 되겠다’ 서원했으니 불연은 이미 전생에서부터 맺어졌음이 분명하다.


군 제대 후 종로 길을 걷던 중 벽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소천 스님 금강경 강의’가 대각사에서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단숨에 달려갔다. 소천 스님의 ‘금강경’ 강의는 청년의 눈을 열어주기에 충분했다. 광덕 스님과의 인연도 이때 맺어졌다. 성철 스님과의 인연도 뒤따랐다. 원각회를 결성해 회장을 맡으며 굳건한 신행단체로 세우고, 불광법회 총무를 시작으로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불교대중화에도 앞장섰다. 당시 김경만 법사는 교계에서도 내로라하는 법사였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불교 일을 놓지 않았던 건 자신이 세운 서원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 해도 육순 출가는 쉽지 않은 선택이요, 결정 아닌가.


“육순이면 다 산거나 진배없지 않습니까? 남은 생 동안 불법 펴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지요.”


군더더기 없는 명쾌한 설명이다. 원력 앞에 무슨 의미를 더할 수 있겠는가. 그 어느 법석에서든 한탑 스님이 꼭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나무아미타불’은 곧 ‘부처님 생명이요, 참생명이다’는 전언이다.


“아미타란 시간적으로 무한하고(무량수) 공간적으로 대립이 없는 (무량광)존재, 즉 절대 무한을 말합니다. 울타리가 없는 존재, 이를 부처님이라 합니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무량수, 무량광은 어느 정도 유추되는데 ‘절대무한’이라는 뜻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무상(無常)’인데 어떻게 ‘절대(絶對)’가 용인될 수 있을까? 불현듯 이웃종교의 ‘절대자’가 스쳐간다.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이웃종교에서 말하는 절대는 ‘무엇인가 있다’하는 상을 세우지만 불법에서는 그 반대가 절대입니다. 대립이 없고 상대가 없으면 한계가 없습니다. 울타리가 없으니 어느 때는 있고 없고, 누구에겐 있고 없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흔들림 없는 절대무한이지요. 절대 무한을 찾아간다 하더라도 내 밖에서 그 신앙의 대상을 찾는다면 절대무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절대무한이란 ‘진리’를 말하고 있음인 듯하다. 부처님 말씀에 따른 세계가 절대무한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세계관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절대세계를 내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내’ 밖에서 진리를 찾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밖에서 찾으려 한다면 외도(外道)지요.”


그렇다면 다시 ‘나’가 중요해진다. 어떤 ‘나’이어야 하는가. 스님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는 말을 잘 새겨보라 한다. 그 때 ‘나’는 우리가 말하는 ‘나’가 아니라 한다.


“좋은 물을 담으려면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야 합니다. 법을 들으려는 사람이 마음을 비워놓지 않으면 선법문은 물론이고 부처님 법문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비우는 마음은 곧 내려놓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전제는 무아(無我)다.
“아상은 내 생명이 따로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내 힘으로만 산다고 하고, 내 힘으로만 살려 하니 내 이익을 먼저 따지게 되지요. 하지만 무아를 체득하면 세상이 반대로 보입니다. 나와 너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지요. 나와 너가 둘이 아님을 알면 나와 자연이 또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연기에 따라 여기에 서 있음을 여실하게 알 수 있지요.”


스님은 이어  의사와 제자 이야기 한 토막을 전했다.


한 의사가 제자를 10년쯤 공부시킨 뒤 ‘약초로 쓸 수 없는 풀을 뽑아오라’ 명했다. 온 산을 뒤지고 온 제자가 스승 앞에 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약초 안 되는 풀이 없습니다. 제 공부가 부족한 듯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이에 의사가 한마디 했다. “너는 이제 의사가 될 수 있다.”


“독초는 약에 쓸 수 없다 생각하는 건 단견입니다. 약초의 상대적 개념으로 독초를 보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 독초를 약으로 쓸 수 없습니다. 타인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기 전에 자신이 타인을 훌륭한 사람으로 보는 걸로 바뀌어야 합니다. 집안에 다툼이 많은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때문입니다. 상대를 존중하면 자신의 아집을 버리게 됩니다. 상대는 선지식으로 바뀌지요. 내 안에 나 잘났다는 마음을 뽑아 버리게 하는 스승인 셈이지요.”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건 바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것임을 직감할 수 있다. 아미타부처님을 부르며 자신을 비우다 보면 어느덧 무아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무는 내 생명을 다 바쳐 돌아간다는 귀명(歸命)의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으로 돌아간다는 건 결국 상대와 대립이 없는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결국 유한인 ‘나’라는 존재가 절대 무한인 부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의문이 든다. 내가 본래 없는 무아인데 어떻게 부처님께 다시 돌아간다는 것인가?


“그 의문을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경전과 법문 등을 통해 그 답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의문이 깊어지다 보면 본래부터 내가 부처님생명을 살고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참생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하나로 돌아감(歸一)이다. 선가에서 말하는 ‘불성’을 보는 일이기도 하다. 가능한가? 가능하다!


“부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은 다 불성이 있다 하셨습니다. 참생명을 다 지녔다 하신 겁니다. 다만, 내가 부처님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내가 깨어서 부처님이 되는 겁니다. 그리되고 보면 세상사람 모두가 부처님이고, 우주 만물이 부처님 아닌 게 없음을 알 수 있지요.”

 

‘아미타불’ 염송하며 무아 체득
‘참생명’은 이미 내 안에 있어


‘너와 나는 모두 존귀한 부처님
‘윤회믿고 참회하며 바라밀 실천


개별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는 ‘나’는 없다는 뜻이다. 본래부터 없었던 것인데, 개별 생명이 있는 줄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만 하는 귀중한 일언이 ‘금강경’에 있습니다. ‘상(相)을 취하지 않으므로 여여(如如)하여 동하지 않느니라.’ 겉모양으로만 보면 이 세상을 차별상으로 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을 살고 있는 유한자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유한자인 내가 절대무한(아미타) 앞에 서야 상대적 존재로서의 내가 부정되어 버린다. 아미타부처님에게 의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더 나아가 무아를 체득하면 아미타세계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극락, 아미타세계가 어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저 하늘 어딘가에 있다 생각하면 벌써 분별화된 이분법 사고입니다. 이미 아미타세계와 극락을 실체화 시킨 것이지요.”


따라서 극락왕생이란 말도 할 수 없이 하는 말이라고 한다. 중생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돕기 위한 방편의 일언인 셈이다. 스님은 오히려 ‘극락에 가는 게 아니라, 극락이 내게로 온다’고 말한다.

 

 

▲한탑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전남 담양 정토사.

 


“무엇보다 업과 윤회를 믿어야 합니다. 조금만 사유해 보아도 윤회가 이 세계에 여실하게 펼쳐져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업장참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과거 탐진치에 의한 신구의 삼업을 뉘우치는 사참(事懺)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사참 후엔 이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죄업의 근본도 본래로 공함을 관해서 악업이 끊기고 본래 생명인 부처님생명의 절대 청정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죄업도 그 실체가 없기에 참회에 의해 소멸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아미타부처님께 의지해 무아, 무상을 체득해 가자는 게 스님의 뜻이다. 처음엔 의지하지만 결국 자신이 부처님생명인 참생명을 올곧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세상은 달리 보일 것이라는 게 스님의 요지다. 타력이지만 자력이기도 하다.


한탑 스님은 정토를 일구기 위해 오늘도 법문을 한다. 마음을 비우고 스님 법문 한 자락에 귀를 기울여 보라. 대립과 상대가 없는 아미타세계의 진수를 엿들을 수 있을 것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한탑 스님
1930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고려대 상대를 졸업했다. 원각회, 불광법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세납 61세에 출가한 스님은 금산사, 안국사 등에서 상임법사를 맡은 후 수행공동체 문사수법회 회주 소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반야심경의 재발견’, ‘황금의 수레바퀴’, ‘반야심경과 나무아미타불’ 등이 있다. 현재 전남 담양 정토사에 주석하고 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