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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당나라의 신라 구법승

기자명 법보신문

중국불교 꽃피우고 신라문화 끌어올린 주역들

전쟁 중에도 구법은 여전
유학승 대부분 삼한 승려

 

신라 승현·신방·지인 등
현장법사 문하에서 활약

 

 

 

▲17년간의 구법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현장법사는 650년 이곳 서안 대자은사에서 대대적인 역경불사에 착수했다. 황실의 지원 아래 현장법사가 주도한 역경작업에는 많은 신라 스님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국가에는 국경이 있어도 문화에는 국경이 없기에 전쟁의 와중에도 승려들은 국경을 넘어 구법했고 불교문화는 널리 전해졌다.


해동 삼국의 많은 구법승들은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갔다. 수나라 양제 시대에는 홍로시(鴻寺) 사방관(四方館)에서 외국 학승의 교육을 실시했다. 608년에는 정업(淨業)이 번승(蕃僧)을 교수했고, 613년에는 정장(靜藏)이 동번(東蕃)의 승려에게 불교를 전수했다. 614년에는 영윤(靈潤)이 삼한(三韓)을 가르쳤고, 이 해에 신형(神逈)도 ‘대지도론(大智度論)’을 강의하여 삼한의 여러 구법승을 교육시켰다. 이처럼 교육을 담당하는 중국의 승려를 608년에는 교수번승(敎授蕃僧)이라 했는데, 차차 교수동번(敎授東蕃), 교수삼한(敎授三韓)으로 불렀다. 아마도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여러 나라 유학승 중에서도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한 승려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조통기(佛祖通紀)’에 의하면, 당 정관(貞觀) 8년(634)경 삼국의 승려들이 입당하여 불법을 배우고자 했을 때, 이들이 당나라 내부의 허실을 엿본다고 하여 입국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 무렵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는 전쟁의 위험이 높아진 때였기에 해동의 승려들이 당나라 내부의 사정을 엿본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 나라를 잘 대해주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선에서 그들의 입국이 허용되었다.


당나라로 구법을 떠났던 승려 중에는 끝내 본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당에서 활동한 경우도 있고, 본국으로 귀국한 경우도 있다. 당나라의 현장(玄, 602~664) 문하에는 신라 승려 여러 명이 번역을 도왔다. 현장이 17년 동안의 서역 및 인도 여행을 마치고 장안(長安)에 돌아온 것은 645년이다. 중국불교사에 끼친 현장의 영향과 공적은 크다. 그는 수많은 불전을 가져왔고, 번역 사업에 주력해서 76부 1347권을 번역했었다.


이로써 인도 및 서역의 불교가 중국 불교계에 소개되었고, 또한 신역경론(新譯經論)이 번역되어 유포되면서 유식학(唯識學)을 주로 하는 새로운 불교학풍이 두루 유행했다.


장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학풍은 곧 신라 불교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신역경론의 수용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신라의 여러 승려들이 현장의 문하에 참여하여 수업할 뿐 아니라, 귀국하여 이를 널리 펴는 경우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650년에 원효와 의상이 융성한 현장의 교학을 사모해서 입당을 시도했던 사실은 이 무렵 현장의 새로운 학풍이 신라에까지 크게 불어오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648년에 번역된 ‘유가사지론’이 1년 만에 신라에 전해진 예로 미루어 볼 때, 신역경론의 대부분이 곧 신라로 전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현장의 문하에는 여러 명의 신라 유학승이 있었다. 즉 신방(神昉), 지인(智仁), 승현(僧玄), 순경(順憬) 등이 그들이다.


현장 문하 고족(高足)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던 신방은 신라 출신이다. 신방은 현장의 역장(譯場)에 참여해서 여러 경론의 번역에 종사했는데, 645년 홍복사(弘福寺)에서 번역이 시작될 때부터 신방은 증의(證義)로 참여했다. 그 후 650년 9월 현장이 대자은사(大慈恩寺) 번경원(飜經院)에서 ‘본사경(本事經)’ 7권을 번역할 때 신방은 필수(筆受)였다. 651년에는 현장에게 ‘십륜경(十輪經)’ 번역을 요망하여 그를 도와 번역한 뒤에 그 경서(經序)를 지었는데 지금도 그 서문은 전하고 있다.


또한 661년 ‘연기경(緣起經)’을 번역할 때 신방이 필수를 맡기도 했다. 신방은 규기(窺基), 보광(普光), 가상(嘉尙)과 함께 현장 문하 사영(四英)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또한 현장으로부터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를 받았기에 대승방(大乘昉)으로도 불렸다. 신방은 ‘종성차별집(種性差別集)’을 찬술했는데 이 책에는 신라 황룡사(皇龍寺) 사문(沙門) 신방기(神昉記)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로써 그가 신라 황룡사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에서는 그를 법해사(法海寺) 사문 혹은 자비사승(慈悲寺僧)이라고 했다. 아마도 신방은 신라에 있을 때 황룡사에 주석했던 것 같다. 여러 목록에 나타나는 신방의 저서를 정리해 보면, ‘십륜경초(十輪經抄)’ 3권, ‘십륜경소(十輪經疏)’ 8권, ‘현유식론기(顯唯識論記)’ 1권, ‘성유식론기(成唯識論記)’ 1권,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유식문의기(唯識文義記)’) 13권, ‘종성차별집(種性差別集)’ 3권 등이 있었다. 이 밖에도 ‘신방장(神昉章)’과 ‘순정리론술문기서(順正理論述文記序)’를 짓기도 했다. 이처럼 신방은 유식의 연구에 힘쓰는 한편, ‘십륜경’을 배우고, 부지런히 고행을 하며, 육시(六時)에 예참(禮懺)하고, 걸식하는 수행을 했다.


지인(智仁)은 신라 출신의 승려로 당나라 현장 문하에서 번역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즉 현장이 649년에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 1권과 ‘인명정리문론본(因明正理門論本)’ 1권을 번역할 때 그는 필수(筆受)였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종남산 취미궁(翠微宮)에서 5월24일에, 그리고 ‘인명정리문론본’은 12월25일 대자은사의 번경원에서 각각 번역된 것이었다. 현장이 입적한 664년 이후에도 지인은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의 장안에 있던 광명사(光明寺)에 주석하고 있었다. 667년에 도선(道宣)이 계단(戒壇)을 창립하고 구족계(具足戒)를 줄 때 지인도 또한 참여했다. 지인은 ‘십일면경소(十一面經疏)’ 1권, ‘사분율육권초기(四分律六卷抄記)’ 10권, ‘불지경소(佛地論疏)’ 4권 ‘현양론소(顯揚論疏)’ 10권 ‘잡집론소(雜集論疏)’ 5권 등 5부 30권의 저서를 남겼지만, 지금은 전하는 것이 없다.


신라의 승현법사(僧玄法師)도 현장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에게는 ‘오종성의(五種性義)’ 1권의 저술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도륜(道倫)의 ‘유가론기(瑜伽論記)’에는 현법사(玄法師)의 설이 여러 차례 인용되었는데 아마도 현법사는 곧 승현법사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원측(圓測, 612~696)은 3세 어린 나이로 출가하고 15세에 당나라로 갔다. 그는 서장어(西藏語), 범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여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 ‘신역화엄경(新譯華嚴經)’ 등의 번역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구유식학을 공부하여 장안의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면서 규기의 자은학파와 대립하기도 했다. 원측의 명성이 알려지자 신라의 신문왕이 원측의 귀국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측천무후가 그를 존경해서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도 중국 서안(西安)의 흥교사에는 현장법사탑 좌측에 원측의 탑이 있고 탑 안에는 원측의 목상(木像)이 전해오고 있다.

 

신방은 다양한 논서 찬술
원측은 측천무후도 존경

 

명효·명랑·혜통 등 귀국
신라에 새 불교사상 전파


당나라에서 구법한 뒤에 신라로 귀국하여 활동한 7세기의 승려로는 자장(慈藏)·순경(順憬)·혜통(惠通)·의상(義相)·명랑(明朗)·도증(道證)·명효(明曉)·승전(勝詮) 등이 있다. 이들은 신라 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자장은 선덕여왕 7년(638)에 문인 승실(僧實) 등 10여명과 함께 당으로 갔다가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했다. 의상은 661년 입당하여 지엄 문하에서 수학하고 670년에 귀국하여 신라에 화엄교학을 전했다. 순경은 입당하여 현장 문하에서 법상(法相), 인명(因明), 구사(俱舍) 등을 배우고 신라로 돌아와 활동했다. 승전(勝詮)은 당나라 법장(法藏)의 문하로 가서 수학했다. 그는 692년에 귀국하면서 ‘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를 비롯한 법장의 여러 저술과 편지를 의상에게 전했다. 법장의 여러 저술이 신라에 유통된 것은 승전의 공이었다. 승전은 금오산 서쪽에 갈항사(葛項寺)를 창건하고 여러 돌멩이를 상대로 화엄경을 강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신라 승려 명효(明)는 귀국에 앞서 낙양의 불수기사(佛授記寺) 번경원에 주석하고 있던 북인도 람파국의 승려 이무첨(李無)을 찾아가서 ‘불공견삭다라니경(不空索多羅尼經)’의 번역을 부탁했다. 번역이 끝난 700년 8월 이후에 귀국함으로서 이 경은 신라에 전해졌다.


명효는 ‘해인삼매론(海印三昧論)’을 지었다. 원측의 제자인 도증(道證)이 신라로 귀국한 것은 692년이고, 그는 10여 부의 저서를 남겼다. 8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에 활동한 흥륜사의 도륜(道倫)은 18부의 저술을 남겼고, 특히 705년경에 쓴 ‘유가론기(瑜伽論記)’ 24권(또는 48권)은 ‘유가론’ 100권에 대한 주석인데, 그 내용이나 분량으로도 전무후무한 대작이었다. ‘금광명최승왕경소(金光明最勝王經疏)’ 등의 저술을 남긴 승장은 원측의 제자였다.
7세기 신라의 밀교승으로는 명랑(明朗)과 혜통(惠通) 등이 있었다. 명랑(明朗)은 선덕여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 9년(635)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670년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해 오자 명랑은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문두루비법으로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7세기 중반의 혜통(惠通)은 당나라로 가서 무애삼장(無畏三藏)을 예방하고 배우기를 청했다. 삼장은 신라 사람이 어떻게 법기(法器)가 되겠느냐고 하면서 3년이나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에 혜통은 불화로를 머리에 이고 정수리가 터질 정도로 간절히 법을 구한 끝에 재기(才器)를 인정받아 삼장으로부터 인결(印訣)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물론 혜통은 문무왕 5년(665)에 귀국했다고 하는데, 무외, 즉 선무외(善無畏)는 716년(성덕왕 15)에 당나라로 왔기에 혜통이 무외삼장에게 사사했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문제가 있다.


▲김상현 교수
이 설화는 혜통의 열렬한 구도심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귀국 후 혜통은 신문왕의 등창을 주문을 외워 치료하는 등 여러 사람을 구하고 감화·함에 밀교가 발전했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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