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2. 라다키들의 손님맞이

기자명 법보신문

“손님은 부처님이 보내신 귀한 인연이다”

 

▲200년 된 켐벨씨의 옛집 거실. 화덕을 중심으로 앉은뱅이 탁자가 놓여있는 모습은 새로 지은 집의 거실과 다를 바 없다.

 

 

“차 한잔 하고 가세요.”


라다크를 여행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두 가지 말은 “줄레”라는 인사와 “차 한잔 마시고 가라”는 초대의 말이다. 곰파에서 만난 스님도, 길에서 만난 어르신도, 마을 입구에서 마주친 아이들도, 심지어는 공사장 한 구석에 임시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일꾼들도 눈만 마주치면 ‘줄레’하고 인사를 건네며 스스럼없이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한다. 처음엔 그냥 인사치레려니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네는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처럼 ‘차 한잔 하고 가라’는 라다키들의 친절도 그냥 인사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냥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어쩌다 그 초대에 응해보면 그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손님을 대접하는지 쉽게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모든 만남은 전생 인연의 결과


“줄레, 어서 들어오세요.”


제법 두툼한 겉옷을 걸친 주인이 문을 활짝 열어 방문객을 맞이한다. 오후가 되면서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더니 바람까지 한 몫 거들어 턱이 덜덜 떨릴 정도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바람은 덜하다. 오늘 저녁식사는 스톡마을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 라다크식 가정집에 부탁을 했다. 안주인은 해가 잘 드는 창가 쪽에 카펫을 깔고 앉은뱅이 탁자를 놓아 마련한 자리로 손님을 안내한다. 손님이 앉자 식구들을 모두 불러 차례로 인사를 시킨다. 이 집에는 주인 캠벨씨와 부인, 그리고 세 명의 아이들이 함께 살고 있다. 마침 캠벨씨의 누이동생, 그리고 세 살짜리 조카도 놀러와 있어 집안은 아이들로 북적인다.


라다크의 전통 가정은 대가족 형태로 이뤄져 왔다. 단순히 할아버지, 아들, 손자뿐 아니라 형제들과 사촌까지도 한 집에 사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니 한 식구가 20~30명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물론 요즘엔 직장과 학교 등을 이유로 아이들은 도시로 떠나고, 형제들은 분가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옛날처럼 방이 여러 개 있는 큰 집이 꼭 필요하지는 한다. 하지만 캠벨씨는 9년 전에 이 집을 새로 지으면서 전통 방식대로 방을 많이 만들었다. 지금은 그 방의 일부를 관광객용 홈스테이로 사용하고 있다. 캠벨씨의 집 뒤편엔 예전에 살던 집이 그대로 남아있다.


안주인은 서둘러 차를 준비한다. 양이나 염소의 젖에 찻잎을 넣어 미리 끓여 놓은 차를 굵은 파이프 같이 생긴 긴 나무통에 담고 나무 막대기를 이용해 위 아래로 한 참 동안 휘젓는다. 여기에 버터를 조금 넣으면 버터차로 불리는 남겐짜가 된다. 저렇게 긴 나무통에 넣고 휘젓는 것이 힘들어 보이지만 “그래야 제 맛이 난다”니 기다려볼 밖에.


라다크에서 자주 맛볼 수 있는 음료는 남겐짜 외에도 소금을 조금 넣어 만든 라다크 전통차 간테짜, 그리고 양이나 염소의 젖을 발효해 만든 요구르트 우마 등이 있다. 간테짜는 조금 짠 맛이, 남겐짜는 좀 더 진한 맛이 난다. 어느 쪽이든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특히 요구르트 우마에는 꿀이나 과일 등을 입맛대로 곁들일 수 있어 간식이나 후식으로 제격이다.


한참 동안 나무통을 휘저어 차와 버터가 적당히 섞이면 주전자에 따라 화덕에 올려놓고 수시로 따라 마신다. 안주인은 방금 만든 남겐짜를 찻잔에 넘치도록 따라 가장 먼저 손님에게 준다. 고소한 버터향이 감도는 따뜻한 차가 움츠러든 몸을 단번에 녹여준다. 이어 각종 비스킷과 빵, 말린 살구 등 주전부리를 줄줄이 내온다. “이만 하면 충분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이쯤 되면 너무 극진한 대접에 도리어 미안할 지경이다.

 

 

 


200년 된 옛집도 살뜰히 보살펴


“손님은 부처님이 보낸 귀한 인연입니다. 이생에서는 비록 처음 만나는 사람일지 라도 수 없이 많은 전생의 인연이 있었기에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맺은 인연이 또 다음 생으로 이어질 것이니 결코 소홀할 수도 없습니다.”


캠벨씨의 설명을 들으니 그들의 유난스런 손님 접대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더욱이 혹독한 기후와 거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라다크니 어떤 손님이든 멀고 험난한 길을 지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지치고 배고픈 나그네에게 따듯한 차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단순한 친절을 넘어 어쩌면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그 공이 크고 인연은 지중할 수 밖에.  우리는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지구 반대편인 이곳까지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까. 손님과 주인의 자리를 따지기 전에 삼생에 걸쳐 이어지고 이어질 인연을 생각하니 식구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다시 보인다.


안주인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캠벨씨의 옛집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 캠벨씨 가족과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 무려 200년이나 된 고택이다. 옛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 집을 지을까도 생각했는데 당시 생존해 계시던 캠벨씨의 어머니가 너무 아쉬워해 그냥 남겨 두었다. 그 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캠벨씨는 지금도 틈이 날 때마다 찾아와 옛 집에 상하지 않도록 손을 본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옛 물건들도 잘 모아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라다크 전통 가옥 전시장이 되었다. 제법 입소문도 나서 여름 시즌 동안에는 일부러 그의 집을 찾아오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다.


“라다크 전통 가옥은 보통 2층 구조인데 1층엔 가축우리와 곡식 저장고, 창고 등이 있고 2층엔 주방을 겸한 거실과 침실, 화장실 그리고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기도실이 있습니다. 라다크의 겨울은 길고 추워서 바깥출입이 쉽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집안에 마련해 놓는 것이지요.”


캠벨씨의 옛집엔 오래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구석구석 먼지가 소복이 쌓여있다. 하지만 새 집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고풍스러워 보이는 화덕을 중심으로 앉은뱅이 탁자가 놓여 있는 거실의 구조는 옛집과 새집이 다르지 않다. 다만 옛집 천장엔 작은 창이 있다. 거실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작은 화로에서 나온 연기가 집밖으로 쉽게 빠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다크에서는 비가 거의 오지 않으니 지붕을 조금 뚫어 놓아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거실 옆 작은 방은 기도실이다. 지금은 오래된 북 하나와 염주만 놓여있지만 10년 전만 해도 이곳에선 온 가족이 모여 경을 읽고 기도를 했다. 그 역시 어린 시절 이곳에서 아버지의 독경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옛 집은 아무래도 불편하죠. 난방은 그렇다 치더라도 욕실과 화장실은 현대식이 편리하니까요. 하지만 옛 집은 가족 모두가 거실을 중심으로 함께 식사하고 생활하는 구조였습니다. 거실엔 주방이 딸려 있으니 여자들도 지금처럼 별도의 주방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모여 있는 거실에서 늘 함께 할 수 있었지요. 생활이 편리해지긴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님과 숙부들 그리고 형제, 사촌들이 함께 지내던 어린 시절이 가끔 그립기도 합니다.”


옛집을 안내해주던 캠벨씨가 한 동안 거실을 서성인다. 그 곳은 그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추억의 한 복판인 셈이다. 2층의 옥상 겸 마당엔 우리의 옛 베틀과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베틀이 놓여 있다. 캠벨씨가 오랜 만에 솜씨를 자랑하려는 듯 베틀에 앉더니 능숙한 솜씨로 베를 짠다.
“라다크에서는 남자들도 베를 짭니다. 저도 예전엔 자주 베를 짰습니다. 오랜만이긴 해도 솜씨가 녹슬지 않았죠.”
축사와 곡식저장 창고가 있는 1층 처마 밑엔 연료로 쓰일 말린 소똥이 가득 쌓여 있다. 요즘엔 라다크의 대다수 가정에서도 취사용으로 가스와 석유를 사용하지만 전통 조리기구인 화덕에는 뭐니뭐니해도 말린 소똥이 제격이란다. 냄새와 연기는 거의 없으면서도 화력이 일정하게 오래 유지 되니 가스나 석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제비 닮은 츄타키 맛 ‘일품’


전통가옥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특징은 집안으로 들어서는 대문 위에 조성해 놓은 작은 초르덴 3개다. 각각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그리고 바즈라다라로 불리는 환희불을 상징한다. 집 입구에 삼존불을 상징하는 초르덴을 조성해 부처님의 가르침과 자비가 집안에 늘 함께하길 기원하는 것이다. 켐밸씨는 새 집으로 이사한 후에도 이곳에 들를 때마다 초르덴이 허물어졌는지를 꼭 살펴본다. 혹시라도 허물어진다면 그는 곧바로 새 초르덴을 세울 것이다.


옛집을 둘러보고 새집으로 돌아오니 순식간에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기분이다. 거실에 놓인 화덕 대신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안주인이 준비된 저녁 식사를 내온다. 얼핏 보니 우리 수제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숭덩숭덩 썰어 넣은 감자가 곁들어진 것이 영락없는 감자 수제비다. 다만 밀가루 대신 보릿가루를 반죽해 얇게 편 후 삼각형 모양으로 접어 모양을 내고 각종 야채를 넣어 함께 끓였다. 츄타키라는 라다크 전통 요리다.


커다란 접시에 한 가득 츄타키를 담아준 안주인은 어서 먹어보라며 잔뜩 기대에 찬 표정이다. 제법 자신있어 보인다. 맛을 보니 그럴만 하다. 갓 끓인 츄타키는 밀가루보다 쫄깃한 맛이 덜한 대신 보릿가루의 고소함이 담백한 맛을 낸다. 강렬한 향신료의 인도 요리와는 전혀 다른 라다크의 맛이다. 화덕에 구운 보리빵 타키도 소박하고 거칠지만 정직하고 은근한 맛이다. 한 그릇을 다 비우기도 전에 더 먹으라며 한 국자 듬뿍 떠서 그릇에 덜어주는 인정은 마치 우리의 옛 어머니들 같다.


더 먹으라는 권유를 몇 번이나 거듭 사양하고 나서야 겨우 저녁 식사가 끝났다. 달콤한 차와 말린 과일 등으로 후식까지 마치고 나니 이미 해가 저물었다. 숙소가 있는 레로 돌아가는 길, 오후 반나절 짧은 인연이었지만 캠벨씨와의 작별 인사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보내신 인연’과 헤어져야 하는 켐벨씨도,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듯 따뜻한 저녁 식사를 즐긴 일행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때문이다. 몇 번이고 손을 흔들고 줄레, 줄레 인사를 건넨 후에야 차는 출발한다. 오늘 맺은 이 인연이 다음 생에 어떤 만남으로 이어질까. 레로 돌아오는 내내 식구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