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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신라 순경법사

기자명 법보신문

승속의 존경 한 몸에 받았던 신라 법상종의 시조

현장법사 문하에서 공부
법상·인명·유식에 통달

 

인명 이해는 당대 최고
귀국 후 현장 유식 소개

 

 

▲ 순경법사는 이곳 시안 자은사에서 현장법사에게 유식과 인명학 등을 배웠으며, 규기와 학문적인 교류를 나누기도 했다. 사진은 자은사 내에 있는 대안탑 7층에서 내려다 본 자은사 풍경.

 

 

7세기 신라의 순경법사(順憬法師)는 당나라 현장(玄) 문하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활동한 고승으로 유명하다.
신라 순경은 당나라로 가서 현장삼장(玄三藏)에게 몸을 던져 현장이 번역한 법상종(法相宗) 등을 배웠다. 순경법사는 법상(法相), 인명(因明), 구사(俱舍)에 크게 통달하여 심오한 뜻을 깊이 이해했다. 특히 인명학(因明學)의 경우에는 현장(玄)이 정미한 연구를 부수(付授)하니, 중국의 승려들이 오히려 많이 미달했지만, 순경은 극명하게 통했으니 전생에 닦은 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스스로 이에 이를 수 있겠는가? 훗날 신라로 귀국한 순경은 배운 것을 크게 홍포했다.


이상은 ‘송고승전’ 중 순경전의 기록이다. 찬녕(贊寧, 919∼1002)은 순경의 인명학 이해가 중국 승려에 비해서 앞섰고 극명하게 통했다고 강조했다. 현장은 인명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과 조예가 있어서, 유식비량(唯識比量)을 입론(立論)하고, ‘인명정리문론(因明正理門論)’과 ‘인명입정리론(因明入正理論)’을 번역하여 동아시아 인명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다. 순경은 현장으로부터 인명을 배웠다. 순경은 현장의 유식비량을 배우고 귀국하여 이 비량을 신라에 소개했다.


현장의 유식비량을 얻어 본 원효는 이 논증식에는 오류가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원효는 현장을 “노력하고도 아무런 공이 없다”고 비판했다. 현장의 유식비량에는 자허(自許)라는 한정어를 썼기에 다시 반대되는 비량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원효가 현장의 비량에 ‘유법차별상위(有法差別相違)’의 잘못이 있다고 한 것도 같은 내용이다. 내세운 명제에 관한 이유를 말하는 인(因)이 부정(不定)의 허물이 있어서 명제에 소속성을 갖지 못할 때, 사유법칙 전체에 합리성을 갖지 못함을 유법차별상위라고 한다. 그래서 원효는 현장의 논법과는 다른 비량을 세웠는데, 곧 결정상위(決定相違)가 그것이다.


순경은 원효가 지은 결정상위를 당나라에 전해서 그 의문을 풀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건봉연간(乾封年間, 666~667)에 그것을 당나라로 보냈는데, 현장이 입적한 지 2년 뒤였다. 그런데 순경은 그것이 원효의 지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마치 자기 스스로 유식비량의 잘못을 안 것처럼 했다. 즉 순경은 신라에 돌아와서는 이 비량의 잘못을 알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결정상위를 받아 본 규기는 이를 순경의 작으로 서술했고, ‘송고승전’에도 순경이 결정상위부정량(決定相違不定量)을 입론한 것으로 기술했다. 이 때문에 결정상위의 지은이에 대한 논란이 있게 되었지만 8세기의 신라 도륜(道輪)과 당나라 정빈(定賓)과 일본의 선주(善珠)는 결정상위를 원효가 지은 것이라고 명기했다. 원효는 인명학에 뛰어나 진나보살(陳那菩薩)의 후신(後身)으로까지 불렸다. 진나(480~540년경)는 중기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인명학자(因明學者)다. 진나 이전의 논리학을 고인명, 그 이후의 논리학을 신인명이라고 부를 정도로 진나가 수립한 논리학의 체계는 새로운 것이었다. 원효가 진나보살의 후신이라는 것은 원효가 진나만큼이나 논리학에 정통한 대가라는 의미였다. 아무튼 순경은 법상과 인명에 밝았던 고승임에는 틀림없다. 유식설에 있어서 진실한 지식의 문제는 동시에 진실한 인식의 문제가 된다. 때문에 논리학은 지식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식론이기도 한 것이다. 많은 법상학자들이 그랬듯이 순경 또한 인명학을 더불어 공부한 뜻이 여기에 있었다.


구사는 소승의 교설을 아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대승불교의 기초학으로서도 그 가치는 높다. ‘구사론(俱舍論)’은 현장이 651년에 번역했는데, 현장 문하에서는 유식학에 대한 연구와 함께 ‘구사론’의 연구가 성하였다. 현장의 제자인 순경이 구사에 밝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현장 문하에서 순경과 함께 수학한 당나라 승려 중에는 자은사(慈恩寺)의 규기(窺基)가 있었다. 순경의 지혜로운 판단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는데, 규기는 순경으로부터 엄중한 힐난을 받아 만나기조차 꺼려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규기는 그의 ‘인명입정리론소’에 순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신라의 순경법사는 그 명성이 당나라에 떨쳤고, 그 학문은 대·소승을 포함하여, 업은 가섭(迦葉)을 숭상하여 두타행(頭陀行) 즉 고행을 하였으며, 마음으로는 소욕지족(少欲知足)에 힘써서 언제나 욕심이 없기를 노력했다. 이미 당나라에서 학문을 닦고 그 빛을 신라에 전했으나, 그 명성과 도가 날로 새롭고, 승속이 모두 공경했다. 비록 용상(龍象)이 적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칭한다.”


가섭은 부처님의 10대제자 중에서 두타(頭陀) 제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가섭을 순경은 존경하고 자신도 두타행을 닦았다고 한다. 번뇌를 떨쳐버리고 의식주 등에 탐착(貪着)하지 않고 청정하게 불도를 행하는 것이 곧 두타행이다. 순경은 분명 탐욕을 버리고 청정한 수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미망(迷妄)의 깊이를 자각하고 수행을 긴 시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려는 것이 유식의 수행관이다. 이러한 유식의 입장에서 두타행에 힘쓰고 있던 순경은 ‘화엄경’ 중의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는 구절을 보고 비방하며 믿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지옥에 떨어졌다는 순경나락가(順憬捺落迦)설화가 ‘송고승전’에 전한다. 즉 다음이 그것이다. 순경은 ‘화엄경’ 중의 시종발심변성불이(始從發心便成佛已), 즉 처음 마음을 발할 때에 곧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는 구절을 보고 비방하여 믿지 않았다. 혹은 이르기를 당장 손발을 묶고 제자들에게 명해 부축해서 땅으로 내려감에 땅이 서서히 열리자 순경의 몸이 갑자기 떨어졌다고 한다. 현재 살아 있는 몸으로 지옥에 빠졌던 것이다. 깊이 뉘우쳐 몸을 구했지만, 길이가 10여 척이나 되는 구덩이는 순경나락가라고 불렸고 언제나 고약한 모습으로 끓는 물이 솟아올랐다고도 한다.

 

가섭 본받아 두타행 수행
10세기 ‘송고승전’도 기록

 

규기도 ‘독보적 존재’ 찬탄
열기가 태수 되는데 일조


아마도 이 설화는 신라에서 형성·유포되었을 것인데, 두타행으로 정진하고 도속의 존경을 받고 있던 순경이 살아 있는 몸으로 지옥에 빠졌다는 이 설화를 얼른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이 설화에는 법상(法相)과 화엄(華嚴)의 교학 상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보인다. 화엄종 승려에 의해서 순경나락가와 같은 설화가 생겨났을 수도 있다.
김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정권을 잡았는데, 열기(裂起)가 찾아가서 군수(郡守)가 되기를 원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열기가 기원사(祇園寺)의 승려 순경에게 말했다.


“저의 공이 큰데 군수를 청하여 되지 않으니, 삼광이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갔음으로 해서 저를 잊었는가 합니다.”


순경이 삼광에게 말하니, 삼광이 열기에게 삼년산군(三年山郡) 태수(太守)를 제수했다. 삼광은 김유신의 맏아들로, 문무왕 6년(666) 2월 천존(天存)의 아들 한림(漢林)과 함께 당에 건너가 숙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삼광이 열기를 만났을 때는 김유신이 돌아간 이후였고, 이 무렵은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니, 이는 김유신의 음덕이 그의 아들에게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열기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군대가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당병(唐兵)에게 군량 수송 작전을 폈던 662년에 남다른 공을 세웠다. 고구려의 국경을 넘어 평양에서 가까운 장쇄(獐塞)에 도착한 김유신은 열기 등 15명을 선발해서 먼저 당나라 진영에 보내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말을 달려 왕복 4일이 걸린 이 작전은 목숨을 건 일대 모험이었다. 활과 칼을 겨눈 채 말을 휘몰아가 가는 기세에 눌린 고구려인들은 바라만 볼 뿐, 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할 만큼 이들은 용감했다고 한다. 열기가 돌아왔을 때 김유신은 그에게 급찬의 벼슬을 주었고, 왕경(王京)에 돌아와서는 다시 왕의 허락을 얻어 사찬(沙)의 직을 더해 주었다.


이처럼 많은 전공을 세웠던 열기였지만, 훗날 삼광을 만나 태수(太守)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는데, 기원사의 순경이 삼광에게 다시 부탁해서 열기가 삼년산군(三年山郡)의 태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일은 문무왕(661~680)의 재위 후반기에 있었던 것 같다. 이 무렵 순경이 주석했다는 기원사는 진흥왕 7년(566)에 창건된 왕경 내의 중요한 사찰이었다. 아무튼 순경이 삼광을 만나서 열기가 삼년산군의 태수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삼국사기’의 이 기록을 통해서 당시 순경의 사회적 권위와 신뢰를 짐작해 볼 수 있는데, 순경이 승속의 존경을 함께 받았다는 ‘송고승전’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신라의 법상학(法相學)은 7세기 중반으로부터 8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 동안 융성했다. 7세기 후반으로부터 8세기 초에는 원효, 경흥(憬興), 법위(法位), 현일(玄一), 영인(靈因), 현범(玄範), 의영(義榮), 행달(行達), 의빈(義賓), 혜경(慧景), 도륜(道倫) 등 많은 법상학인이 활발한 연구를 진행해서 법상교학의 융성을 이루었다. 특히 순경, 의적, 원효, 경흥 등의 학문적 업적은 뛰어난 것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순경은 신라 법상종의 시조로 평가받기도 했다.


법상학파는 법상종(法相宗)으로도 불렸다. 독자적인 승정(僧政)의 운영 등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종파 개념과는 약간 다르지만 학파적인 경향을 법상종이라고 부른 경우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다.

 

▲김상현 교수

순경은 ‘법화경요간(法華經科簡)’, ‘법화경음의(法華經音義)’, ‘대비바사심론초(大毘婆沙心論抄)’, ‘성유식론요간(成唯識論料簡)’, ‘인면입정리론초(因明入正理論抄)’, ‘법경론(法鏡論)’, ‘대집경소(大集經疏)’ 등 여러 저술을 남겼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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