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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사의 명암, 그리고 불교적 대안 [끝]

기자명 법보신문

제각각인 제사, 사찰서 하는 것이 현대적 대안

 

▲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생활의례문화원(원장 이송자)은 9월5일 전법회관 교육관에서 ‘불교식 추석 차례 시연회’를 열었다.

 


하나의 종교가 사라지고 문화로서 영향력을 잃게 되기까지는 약 100년이 걸린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유교도 어느덧 100년이 넘었다. 그 결과 제사와 같은 과거의 영예는 이제는 거북스러운 형식적 가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 부조 역시도 진심어린 축하를 통한 품앗이라기보다는 눈도장이나 찍는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유교의 몰락 속에서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전반적인 재조명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왕권강화 수단이던 제사


중국문화권에서 제사를 통한 맨(man)이즘이 등장하는 것은 은허를 수도로 정하는 은나라의 19대 군주 반경에 의해서다. 반경은 기존의 ‘제(帝)’ 중심의 신관을 조상숭배로 바꾸고 이를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구조를 일신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급속한 신관의 변화는 도리어 은나라를 쇠퇴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비롯된 제사는 점차 외연을 넓혀 안정되면서, 중국문화권의 한 특징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제사의 대두는 왕권강화라는 상당히 이질적인 측면에서 비롯된다. 고대인들은 제사와 관련하여 실제로 조상신 존재를 믿었고, 이러한 종교적인 요소를 정치권력이 이용하려던 시도가 제사의 파생인 것이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가 되면 인간이성의 합리성이 강조되며 제사에서 조상신이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제사의 온전한 전지자는 유교이며, 이들은 제사에서의 조상신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교의 정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공자는 정확하게 제사를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논어’에서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만일 귀신을 멀리하는 것이 지혜라면, 귀신을 가까이 하는 것은 곧 어리석음이라는 의미가 된다. 또 ‘예기’의 ‘단궁편’에는 “제사의 예란 오직 상주 스스로 정성을 다하는 것일 뿐, 어찌 신령이 흠향할 수 있겠는가!”라고 되어 있다.


또 ‘문상편’에는 “종묘에 제사하여 귀신으로 모셔 흠향하시게 함은, 요행으로 (혼백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라고 하여, 조상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외에도 ‘국어’의 ‘초어하’에서는 “(선조께 제사 지내는데) 마치 신령이 임하여 계신 듯이 엄숙하고 경건하다”라고 하여, 제사를 지낼 때 신령이 곧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전국시대 최대 유학자인 순자 역시 ‘예론’에서 “제사를 군자는 ‘인간의 도리’로 여기나, 백성들은 ‘귀신의 일’로 여긴다”라고 하였고, 또 “(제사란, 제사의 대상은) 형체도 그림자도 없으나 그 격식을 완수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즉, 제사는 과거의 대가족제라는 종법제(宗法制) 안에서, 서열을 정하는 ‘문화제전’이지 실재하는 조상신에 대한 의례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현대 중국의 최고지성이며, 대유학자였던 풍우란 역시 ‘중국철학사’에서 “제사는 예술이지 종교가 아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본다면, 제사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허구이면서도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켜주는 기능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조상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제사의 전통을 단절할 수는 없다. 실제로 오늘날 제사 역시 그 가치를 믿어서 지낸다기보다는, 자신의 대에서 그만두기 어려워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제사는 ‘계륵’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는 제사의 근본과 결부된 대가족제도가 붕괴되면서, 그 가치가 더욱더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하면, 하기는 싫지만 막상 끊을 수 없는 것이 제사라고 하겠다.


불교 시대였던 고려와 조선초기까지도 제사의 주된 장소는 집이 아니고 절이었다. 그리고 분할봉사나 윤회봉사와 같은 경우가 다수를 점하게 된다.


분할봉사는 특정 제사를 한 사람이 꾸준히 지내는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재산상속은 여자를 제외한 남자형제, 그것도 장남에게 대다수를 물려주는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장남은 그러한 재산을 상속받는 대신 제사를 모셔는 의무와 권리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재산상속은 요즘식으로 하면, 유언장에 의해서 친가외가와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후손에게 줄 수가 있었다. 이런 경우 많이 받은 후손, 즉 유달리 가까웠던 사람이 돌아가신 분의 제사를 독점해서 모시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분할봉사이다.


예컨대 율곡이 외할머니로부터 서울 수진방의 기와집을 물

려받고서 외가 제사를 지낸 것 등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분할봉사인 동시에 외손봉사라고 하겠다.
윤회봉사는 한 사람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아들딸 관계없이 자녀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딸에게까지도 동등한 가치 속에서 재산을 상속(균분상속)해 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윤회봉사가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의 동등한 권리보장으로 인해서 외손봉사와 같은 경우도 당연시 된다고 하겠다.


고려·조선초 절 문화로 편입


분할봉사는 한 사람이 특정제사를 계속해서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집안에 사당과 같은 별도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패와 진영을 모시는 것이 난해하게 된다.


오늘날 제사에는 위패만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불교시대의 제사에는 진영이 함께 사용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진영은 돌아가신 분을 모사한 것이므로 참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유교의 제사에서는 진영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도 왕실이나 사찰 등에서는 진영을 모시는 제사가 계속 유지되었다.


요즘은 제사 때가 되면 위패를 썼다가 제사가 끝나면 이를 불살라 버리지만, 진영과 같은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계속 지내기 위해서는 집안에 사당과 같은 조상신의 독립공간이 요청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공간은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사찰에 모셔 놓고 제사 때 찾아와 뵙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다.


이는 윤회봉사도 마찬가지이다. 제사를 지내는 장소가 계속 바뀐다는 것은 번거로운 것인 동시에 예에 맞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도 특정 사찰을 정해놓고서, 후손들이 날짜에 맞추어 제사를 올리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다.


오늘날 제사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또 사진을 사용하는 경우도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다. 이럴 경우 위패는 사르고, 사진은 잘 싸서 장롱 위와 같은 곳에 올려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같은 제사의 대상을 어떤 것은 태우고, 어떤 것은 보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틀린 것이다.


▲자현 스님
오늘날 제사가 종속되어야 한다면, 과거와 같은 사찰에 의탁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 합리적인 대안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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