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3. 라다크왕국의 심장 레팔레스

기자명 법보신문

수직의 성벽으로만 남은 옛 왕국의 위엄

 

▲ 험준한 바위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레팔레스. 9층 높이의 이 오래된 성은 건축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를 넘어 라다크로 들어오던 날, 눈 아래 펼쳐진 첩첩의 설산을 보며 마음속에서는 두 생각이 갈등을 하고 있었다. ‘조금 어렵더라도 육로를 이용해 오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휙 지나버리고서야 어찌 히말라야에 다가섰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비행기로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저 험한 산길,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설산을 구비구비 갔었다면 레에 도착하기도 전에 질려 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쪽 생각에도 온전히 손을 들어줄 수 없어 이랬다, 저랬다하고 있는 사이 비행기는 레 상공으로 접어들었다. 바로 그 순간 비행기 타고 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포탈라궁이 모델로 삼은 웅장함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둥지를 틀고 있는 녹색의 도시 레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보기 전까지 고갯길의 땅, 해발3500m의 아득한 도시 레의 이미지는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거칠고 메마른 땅이었다. 하지만 상공에서 바라본 레는 히말라야의 한 자락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푸르고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이미지는 기억 속에 각인되어 지금까지도 ‘푸른 도시 레’로 남아 있다. 비행기에서 보았던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은 레 시내를 굽어보고 있는 고성, 레팔레스에 올라서였다.


레팔레스는 라다크의 중심도시 레의 옛 영광을 말해주는 거대한 추억이다. 라다크왕국의 수도였던 레에서는 도심 곳곳 어디에서나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레팔레스와 눈을 맞출 수 있다. 가파른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 레팔레스는 먼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도시의 이정표기도 하다.


레팔레스는 1553년 체왕 남걀왕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레팔레스를 완성한 이는 그의 조카이자 라다크왕국의 전성기를 열었던 셍게 남걀왕이었다. 라다크왕국 전성기, 그 화려했던 시절의 결정체가 바로 레팔레스였다. 레팔레스는 건축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며 반세기즘 후에 건축된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이 바로 레펠레스를 모델로 했다 하니 당시 라다크왕국의 국력과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일이다. 포탈라궁과 비슷한 모습이어서 ‘소 포탈라’라 불리는 애칭도 레팔레스로서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남겨두었다가 맨 마지막에 먹는 어린아이처럼 라다크 여정의 끝자락에서 레팔레스로 향한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험준한 바위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레팔레스로 향하는 길은 역시나 비탈진 산길이다. 그나마 입구까지 도로가 놓여있어 차를 이용할 수 있다. 산길을 타고 오르다보면 아래로 구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흙벽돌을 쌓고 그 위에 다시 흙을 이겨 바른 라다크의 흙집들. 얼핏 보아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창문마다 드리워진 커튼과 여기저기 쌓여있는 땔감용 나무, 그리고 옹색한 살림살이들이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좁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이 구시가지의 모습은 수 백 년 전이나 지금이 별다르지 않을 듯 하다. 레팔레스 입구에 도착하니 시가지가 온전히 한 눈에 들어온다. 왼편은 산비탈을 따라 흙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올드타운, 그러나 오른쪽엔 시가지 너머로 푸른 나무들이 담장처럼 둘러쳐져 있어 왼편의 풍경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 있는 레팔레스는 가까이 와서 보니 더욱 웅장하다. 9층 규모의 높이를 자랑하는 레팔레스는 땅에서 솟아 오른 듯 위로 향하는 수직의 성벽을 이루고 있어 도시 전체를 압도하는 느낌이다. 온통 바위뿐인 산비탈 위에 어떻게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쌓아 올렸을까. 전성기에 달했던 라다크왕국의 국력과 강력했던 왕권의 위엄이 고스란히 성벽에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위용에 압도당하는 것도 잠깐,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레팔레스를 소개하는 간단한 안내판 하나와 입장권을 파는 조그만 매표소만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나마 10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성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질 않는다.


텅 빈 성안엔 불빛조차 없어

 

 

▲ 레팔레스에서 내려다보이는 레 시내. 흙집이 즐비한 구시가지 우측으로는 푸른 숲이 펼쳐져 있다.

 


“1834년 왕족들이 스톡팔레스로 쫓겨난 이후 레팔레스는 버려진 궁전이 되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줄곧 비어있어서 궁 안에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최근 들어 일부 복원공사를 하고 있긴 하지만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정도입니다.”


가이드는 굳이 레팔레스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며 일행을 만류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 보지도 않는다는 것이 꺼림칙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마침 성 안에서 한 외국인 청년이 나온다. 그에게 결정권을 주겠다는 심정으로 안의 사정을 물어보니 대답이 간단하다. “Nothing!” 아무것도 없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자 디지털카메라로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보여준다. 온통 컴컴한 계단과 아무것도 없이 텅빈 방, 그리고 어설프게 벽에 걸려 있는 몇 장의 흑백사진뿐이다.


사진 속의 모습이 티베트왕국조차 포탈라궁을 지으며 모델로 삼았을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레팔레스의 현실인가 싶어 망연자실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라다크에 도착한 첫 날, 우뚝 솟은 레팔레스를 올려다보며 이곳이 라다크의 심장임을,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음을 새삼 느끼며 얼마나 가슴 설랬는지.  레 시가지를 오갈 때 마다 시선을 사로잡는 수직의 아름다움에 끌려 단박에 뛰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달래며 라다크기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고이고이 아껴두었던 레팔레스였다. 그런 레팔레스의 초라한 속사정 앞에서 한동안 할 말을 잊는다.


아쉬운 발길을 그냥 돌리지 못한 채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언덕 위로 펄럭이는 타르초가 보인다. 레팔레스가 자리하고 있는 바위산 정상에 서 있는 승리요새와 남걀체모 곰파다. 승리요새는 16세기 라다크왕국이 발티 카슈미르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워졌고 곰파는 그보다 앞선 15세기에 건축된 사원이다. 레팔레스의 아쉬움을 곱씹으며 바위산 기슭을 따라 30여분 정도 숨 가쁘게 올라가니 작은 곰파의 입구다. 곰파 안에서는 3층 높이의 미륵불이 엷은 미소로 거친 산길을 올라온 이들을 위로해준다. 레팔레스에서 보았던 시가지가 좀 더 넓은 시야로 눈에 들어온다. 이래저래 맥이 풀려 아무 곳에나 털썩 주저앉아 한 눈에 들어오는 레를 하염없이 굽어본다.

 

 

▲ 레팔레스에서 올려다 본 남걀 체모 곰파(좌). 레팔레스 입구. 들어 가는 이도, 나오는 이도 없는 쓸쓸한 명승지(우),

 


황폐해진 레팔레스, 껍데기만 남아있는 과거의 영광을 혹자는 오늘날의 라다크에 비유하곤 한다. 노르베리 호지 여사가 ‘오래된 미래’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라다크는 이미 레팔레스의 속살처럼 사라져가고 있는 과거의 추억이라는 것이다. 레는 이미 시장경제의 수중에 떨어졌고 시가지의 주요 상권은 서쪽의 카슈미르를 비롯해 외지에서 들어온 장사꾼들이 장악하고 있다. 전통적인 농업 공동체의 모습은 구세대에게나 적용될 뿐 라다크의 젊은이들은 고등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나고 더 좋은 직장을 위해 라다크를 벗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과 힌두교도의 숫자가 점점 늘어가고 요즘에는 기독교의 유입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니 라다크에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라다크를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된 미래가 모두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것이 라다크의 현실이라면 굳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올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동안의 여정 속에서 보았던 라다크의 표정은 모두 퇴색해버린 과거의 그림자일 뿐이었을까.


오래된 미래는 어디에 머무는가


낯선 이방인에게 불쑥 사과를 내밀던 어린 사미니 스님의 손,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던 시골 마을의 소녀, 희박한 공기에 숨을 헐떡이던 일행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노스님, 그리고 따듯한 차 한 잔을 건네며 남은 여정의 평안을 빌어주었던 어느 이름 모를 노인의 미소까지. 그것들은 분명 살아있는 라다크의 오늘이었다. 라다크가 품고 있는 오래된 미래는 허물어져가는 레팔레스가 아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보여주었던 그 꾸밈없는 미소와 거칠지만 따뜻한 손안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물음과 대답 속에서 맴돌고 있는 사이 오늘 하루도 변함없이 달려온 라다크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