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복성과 주술성-1
15. 기복성과 주술성-1
  • 법보신문
  • 승인 2011.11.1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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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발원기도는 불교교리와 배치
타인 소망과 어긋나는 일 말아야

바야흐로 입시철이다. 애오라지 자식이 잘되기만 애가 닳도록 소망하는 부모들은 절을 찾아와 부처님께 빌고 또 빈다. 이를 놓칠새라 절들은 합격발원기도 현수막을 내걸고 불안에 떠는 부모들을 끌어들인다. 영험이 있기로 소문난 절은 이 기간 동안 가뿐하게 수십억 원의 수입을 올린다. 하지만, 어느 부처님이 다른 자식을 떨어뜨리고 내 자식만 합격시켜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실까. 이것은 부처님의 뜻과 어긋난다. 합격발원기도를 부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 생각하면 무지한 것이고,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라 알면서 돈을 받는다면 바르지 않은 것이다. 절이 정녕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마음에 이르려 수행정진하는 도량이라면, 합격발원기도 현수막을 내려야 한다. 소망을 빌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소망을 빌지 않고 어찌 종교가 성립될 수 있으랴. 타인의 소망과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유럽의 중세시대도 이와 유사하였다. 편두통이 걸려 신부를 찾으면 면죄부를 사라 했다. 그래도 낫지 않아 다시 찾으면 신부는 더 비싼 면죄부를 요구했다.


또 낫지 않아 신부의 문을 두들기면 신부는 악마가 머리에서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니 악마가 나갈 길을 뚫어야한다며 정으로 머리를 쪼았다. 신도 대다수가 무지할 때 이는 속된 말로 약발이 먹혔다. 하지만, 신도들은 차츰 악마가 깃들어서 두통이 난 것이 아니라 머리에 산소가 공급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산소가 많은 숲과 해변을 산책하거나 뇌에 산소를 공급하는 촉매제를 먹으면 낫는다고 생각하였다. 합리성과 과학성을 갖춘 신도들은 교회의 정당성을 부정하였다. 결국 혁명을 맞았고, 신부는 권력을 시민에게 내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교회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교회가 재빨리 주술성과 기복성과 결별하고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는 ‘계몽, 신식, 선진’이었고, 불교는 ‘미개, 구식, 후진’이었다. 이 때문에 계몽기의 엘리트들은 거의 교회로 달려갔다. 지금도 젊은이들은 불교를 그리 생각하고 기피한다. 우리는 불교를 공부할수록 불교야말로 과학이라고 주장하지만, 불교철학이 외려 현대과학도 채 인식하지 못한 우주의 숨은 진리를 밝히는 등불이라고 말하지만, 불교 철학의 과학적인 맛을 음미하기 전에 젊은이들은 절집을 멀리 한다. 그 정점에 합격발원기도와 같은 기복적인 의례가 자리하고 있다.


이제 한국 절은 기로에 서 있다.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어 합격발원기도 같은 것을 지속하다가 중세의 늪에서 계속 허우적거리느냐, 아니면 과감하게 이를 떨쳐버리고 현대의 광장에서 대중과 함께 하느냐. 어떤 이는 아들의 합격발원기도를 하러 절을 찾았는데 스님께서 “그럼 나보고 다른 자식을 떨어트리고 네 자식만 붙으라고 부처님께 빌란 말이냐?”라는 힐난을 받고 크게 깨우쳤다 한다. 그 뒤로 그는 더욱 스님을 존경하고 더욱 절을 찾고 더욱 많은 것을 절에 희사하게 되었더란다.


▲이도흠 교수
그렇다고 합격발원기도를 완전히 해체하라는 것이 아니다. 역사와 전통으로서 기복 불교까지 부정할 것은 없다. 절마다 사정이 판이하니, 정 없애기 어려우면 합격을 기원할 것이 아니라 수험생이 건강하고 정당하게 실력을 발휘하여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빌면 된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불자 000가/ 늘 따스한 감성으로 온 생명들을 돌보고/ 늘 냉철한 이성으로 세상을 직시하고/ 늘 밝은 지성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찰하며/ 늘 맑은 마음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에 맞서고/ 늘 깊은 마음으로 낮은 사람을 가여이 여겨/ 그를 부처로 이끌어 자신도 부처가 되기를 바라옵니다.”라고 발원하면 안 될까?
 

이도흠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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