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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는‘상락아정’ 덕을갖춘 열반의 곳간만을 증득할뿐

기자명 법보신문

만법 무상하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요
열반이 영원하다고 보는 것 또한 상견
모든 마장은 본디 근본이 없는 것인데
바른 생각을 잊는데서 그 싹이 움튼다

106. ‘열반의 비밀스런 곳간’

 

 

▲돈황 막고굴419. 수나라.

 


夫境識俱遣 衆生界空 諸佛究竟 成得何法.


문:  경계와 마음을 다함께 버리면 중생의 세계가 공(空)이니 여기서 끝내 모든 부처님이 무슨 법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一切異生 因識對境 於生死中 妄生執著 起常等四倒. 二乘之人 於涅槃中 妄求解脫 起無常等四倒. 諸佛如來 因境識俱空 能離八倒 成得眞常樂我淨四波羅蜜. 寶性論 云 依二種法 如來法身有淨波羅蜜 一者 本來自性淸淨 以同相故 二者 離垢淸淨 以勝相故. 有二種法 如來法身有我波羅蜜. 一者 遠離諸外道邊 以離虛妄我戱論故 二者 遠離諸聲聞邊 以離無我戱論故. 有二種法 如來法身有樂波羅蜜. 一者 遠離一切苦 二者 遠離一切煩惱習氣. 有二種法 如來法身有常波羅蜜. 一者 不滅一切諸有爲行 以離斷見邊故 二者 不取無爲涅槃 以離常見邊故. 勝經 云. 世尊 見諸行無常 是斷見非正見 見涅槃常 是常見非正見. 妄想見故 作如是見. 所以 如來 唯證四德涅槃 密之藏.


답:  중생은 경계를 맞이하여 생사 속에 허망하게 집착하니 네 가지 잘못된 상(常)·락(樂)·아(我)·정(淨)을 일으키고, 이승(二乘)은 열반 속에서 허망하게 해탈을 구하니 상(常)·락(樂)·아(我)·정(淨)이 없다는 네 가지 잘못된 견해를 일으킨다. 모든 부처님은 경계와 마음이 다함께 공(空)이므로 앞에 말한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를 벗어나 참된 상(常)·락(樂)·아(我)·정(淨)의 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를 ‘보성론’에서 말한다.


“두 가지 법에 의하여 여래의 법신에 맑고 깨끗한 ‘정(淨)바라밀’이 있다. 하나는 본래 자성이 청정하여 그와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더러움을 벗어난 청정으로 뛰어난 모습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법이 있음으로 여래의 법신에는 ‘참나’인 ‘아(我)바라밀’이 있다. 하나는 온갖 외도의 잘못된 견해를 멀리 벗어남으로써 허망하게 내가 있다는 희론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모든 성문의 잘못된 견해를 멀리 벗어남으로써 내가 없다는 희론도 떠났기 때문이다. 두 가지 법이 있음으로 여래의 법신에는 즐거움인 ‘락(樂)바라밀’이 있다. 하나는 온갖 고통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온갖 번뇌의 습기를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두 가지 법이 있음으로 여래의 법신에는 영원한 ‘상(常)바라밀’이 있다. 하나는 모든 현실의 삶을 인정하므로 잘못된 단견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무위(無爲)의 열반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잘못된 상견도 벗어났기 때문이다.”


‘승만경’에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흘러가는 모든 법이 무상하다’고만 보는 것은 단견이니 올바른 견해가 아니요, ‘열반이 영원하다’고만 보는 것도 상견으로 올바른 견해가 아니니, 허망한 생각으로 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견해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오직 ‘상(常)·락(樂)·아(我)·정(淨)네 가지 덕을 갖춘 열반의 비밀스런 곳간’을 증득할 뿐입니다.”


강설) 범부는 자신과 세상의 모습이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인 줄을 모르기에 네 가지 잘못된 견해를 낸다. 사람의 모습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견해[常], 인생은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樂] 나라는 존재를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我], 몸과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견해[淨]를 말하니 이것이 상견이다.


불교에서는 이 네 가지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기 위하여 몸은 깨끗하지 않다고 살피는 법인 ‘관신부정(觀身不淨)’,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느낌은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살펴보는 법인 ‘관수시고(觀受是苦)’, 중생의 마음은 무상하여 늘 변하는 것이라고 살펴보는 법인 ‘관심무상(觀心無常)’, 모든 법은 실체가 없으므로 내 것이라고 집착할 것이 없다고 살펴보는 법인 관법무아(觀法無我)를 가르쳐 왔다. 이것이 몸, 느낌, 마음, 법 네 곳에 마음을 집중하여 삶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공부 ‘사념처관(四念處觀)’이다. 이 공부는 삶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이승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에 집착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으니 이를 단견이라고 한다.


잘못된 집착으로 생겨난 이런 상견과 단견을 벗어난 것이 깨달음이요 중도이며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승만경’에서 “여래께서는 오직 ‘상(常)·락(樂)·아(我)·정(淨) 네 가지 덕을 갖춘 열반의 비밀스런 곳간’을 증득할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107. 마음이 올바르면 성인인 줄 알아야 


起信論云 或有衆生無善根力則 爲諸魔外道鬼神之所惑亂 若於坐中 現形恐怖 或現端正男女等相 當念唯心境界則滅 終不爲惱. 是知 聖者正也 心正卽聖. 故云 心正可以邪 如日月正當天 草木無邪影. 故知 此心是凡聖之宅 根境之原. 只爲凡夫執作賴耶之識 成生死苦惱之因 聖者達爲如來藏心 受涅槃常樂之果.


‘기신론’에서 “때로 선근이 없는 어떤 중생들은 온갖 마구니나 외도와 귀신(鬼神)들의 홀림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앉아 공부할 때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미남 미녀들의 모습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럴 때 ‘이는 오직 마음의 경계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면 이 경계는 사라지므로 마침내는 괴롭지가 않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성인은 올바른 사람이며 마음이 올바르면 곧 성인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올바르면 삿됨을 물리치는 것이,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 떠 있어 풀과 나무에 그늘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성인과 범부의 집이며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의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다만 범부는 집착하여 중생의 알음알이로 생사고뇌의 원인을 만들고, 성인은 통달하여 부처님의 마음으로 영원한 열반의 즐거움을 받는다.


강설) 원효 스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기신론소별기’에서 설명하기를 “마구니라고 말할 때 좋은 모습으로 나타나 불법을 방해하는 것은 천마이고, 귀신(鬼神)에서 귀(鬼)는 좌선할 때 공부를 방해하는 퇴척귀(堆鬼)이며, 신(神)은 시간에 맞추어 나타나 수행자를 괴롭히는 정미신(精媚神)이다. 이들은 부처님의 법을 어지럽혀 삿된 도에 떨어지게 하니 외도라고 한다. 이런 마구니와 귀신들은 세 가지 경계로 수행자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첫째는 두려움을 일으킬만한 경계를 만들고, 둘째는 미남 미녀의 모습으로 나타나 애욕을 일으키게 하며, 셋째는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에 거슬리지도 않고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닌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사수(捨受)’의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경계가 공부를 방해하면 수행자는 곧 눈을 감고 마음을 모아 ‘나는 지금 그대를 안다. 그대는 사바세계에서 불을 먹고 향기를 맡으며 사는 귀신이다. 그대는 삿된 소견으로 아름다운 미래의 삶을 파괴하려고 하지만, 나는 지금 올바른 삶을 가꾸어 끝내 그대를 두려워 않고 공부하리라.’고 해야 한다. 그리하여 온갖 경계가 오직 자신의 마음에서 일으키고 있는 분별인 줄 안다면 마음 밖에 다른 경계가 없어 나타난 경계는 곧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마구니와 귀신을 모두 없애는 방법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마음이 올바르면 삿됨을 물리치는 것이,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 떠 있어 풀과 나무에 그늘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한 것이다.
서산 대사도 “마(魔)는 본디 근본이 없는 것인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바른 생각을 잊는 데서 그 싹이 움튼다.”라고 하셨다.


벽에 틈이 있으면 바람이 들어오고(壁隙風動)/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군이 침범한다(心隙魔侵)


108. 대상을 바로 아는 것


佛言 但覺自心現量 妄想不生 安隱快樂 世事永息. 安隱快樂者 則寂靜妙常 世事永息者 則攀緣已斷. 可謂 遇圓滿寶藏 頓絶希求 到常樂涅槃 更無所至. 是凡聖之際 如達家鄕 爲迷悟之依 已窮根本.


부처님께서 “다만 ‘자기 마음에서 모든 생각과 분별을 떠나 대상을 바로 아는 것’만 깨달으면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에 은근하고 편안하고 즐거워서 세속의 일이 영원히 쉬어진다.”라고 말씀하셨다. ‘은근하고 편안한 즐거움’은 ‘고요하고 오묘하며 영원한 자리’이며, ‘세속의 일이 영원히 쉬어진다’는 것은 번거로운 세상의 인연이 이미 끊어진 것이다. 이것은 오롯한 보물 창고를 만나 문득 욕망을 끊고 영원한 즐거움의 열반에 도달하니 더 나아갈 곳이 없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범부와 성인이 같아지는 자리이니 고향집에 도달한 것과 같고, 어리석음과 깨달음의 의지처가 되니 이미 근본에 통한 것이다.


강설) 현량이란 어떤 대상 경계를 감각기관[전오식(前五識)]을 통해 바로 아는 것을 말한다. 현량에는 진현량(眞現量)과 사현량(似現量)이 있다. 진현량은 환상이나 착각이 없는 상태에서 분별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바로 아는 직접 경험이요, 사현량은 환상이나 착각으로 중생의 분별심이 개입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왜곡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보통 현량이라는 말을 쓸 때는 진현량을 뜻하고, 이 현량은 ‘자기 마음에서 모든 생각과 분별을 떠나 대상을 바로 아는 것’이니 곧 ‘부처님의 앎’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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