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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연재를 마치며

기자명 법보신문

들꽃같은 사람들이 오래된 미래를 꽃피우리

 

 

 

라다크 여정의 마지막 밤, 그동안 뒤죽박죽 싸들고 다니던 짐 가방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렇게나 구겨서 가방 속에 쑤셔 넣었던 옷가지며 참고용 자료와 책, 여정 내내 한 몸처럼 껴안고 다녔던 카메라 등등. 별로 크지도 않은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짐꾸러미들이 침대 위로 한 가득이다. 그 가운데 두통약, 복통약, 감기약, 해열제 등등 온갖 ‘비상약’들이 완비돼 있는 꾸러미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라다크행을 준비하면서 ‘혹시나’하는 마음에 온갖 약들을 구해 한 보따리 챙겨 놓고는 ‘철저한 준비성’에 스스로를 대견해 했었다. 하지만 그 약들은 여정 내내 꾸깃꾸깃 꾸겨진 채 가방 속에 처박혀 있었다. 고산병 예방약 몇 알과 비타민제 약간 외에는 뜯어보지도 않은 약들이다. 약이 저렇게 많이 필요할 만큼 라다크는 ‘위험한 오지’가 아니었다.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한보따리 구겨져 있는 약을 보니 출발 전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설렘, 그 밑바닥에는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두려움과 불안감이 깔려 있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니 결국 라다크에 대해 그만큼 무지했던 것은 아닐까.


하긴, 무지한 여행객의 가방 속 짐이 어디 약보따리 뿐이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둥 삼아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에 만족하고, 현대 문명이 주는 편리보다는 자연과 하나 되어 조화를 이루는 삶. 경쟁과 발전의 논리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 하늘은 늘 청명하게 푸른빛이고, 곰파엔 늘 장엄한 기도 소리가 울리며, 밤이면 쏟아질 듯 촘촘히 별들이 가득한 곳. 여행 가방 속 바리바리 챙겨 넣은 상상 속 라다크는 그런 모습이었다.


물론 이것만이 전부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고달픈 삶의 고민이 있으며, 구름도 끼고 비도 올 것임을 어찌 몰랐겠는가. 다만 눈에 콩깍지가 덮인 연인들처럼 그런 생각들이 늘 뒷자리로 밀려나 있었음이다.

 

무지가 빚어낸 상상 속 라다크


그렇기에 라다크에 처음 발을 디디며 ‘낭만적인 상상에 빠지지 말 것’,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지 말 것’을 스스로에게 수 없이 주문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한 이방인이었으며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서울에서부터 짊어지고 온 상상 속 라다크를 수시로 꺼내 비교하며 때론 만족해 가슴 벅차하고 때론 실망해 얼굴 찌푸리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구겨지고 찌그러진 채 뒤죽박죽되어 널브러져 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좋을지 모를 짐들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 여정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 그리고 허전함이 몰려들어 또 다시 한 보따리 무거운 짐이 된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동안 촬영한 사진들을 돌려본다. 거친 산맥과 하얗게 눈 덮인 산봉우리. 풀 한포기 없이 황량한 벌판과 깎아지른 듯 위태로운 절벽. ‘하늘의 땅’이라는 미사여구 보다는 ‘인간에게 적대적인 땅’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그림들이 수없이 지나간다.


하지만 그 속에는 라다키들의 해맑은 미소도 가득하다. 어린 동생을 업고 있는 소녀, 손때 묻은 염주를 들어보이던 할머니, 굵게 주름 패인 얼굴로 말린 살구 한줌을 나눠주던 스님…. 낯선 이에게 정겨운 미소를 보내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며 여정의 평안을 기원해 주었던 이들. 그 미소는 메마른 땅에서 피어난 들꽃처럼 라다크 곳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빈틈없이 짜여있던 여정 속에는 없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어느 길가, 어느 마을, 어느 사원에서 불쑥 이뤄지는 놀라운 경험이자 즐거움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정을 마무리하는 지금까지도 애초에 품었던 무수한 질문들은 답을 구하지 못한 듯 하다. 그들이 가난한 삶 속에서도 진정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변함없는 의지처인지, 경제적 발전보다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여전히 가늠치 못하겠다. 라다크의 하늘은 수시로 구름에 가려 청명한 푸른빛을 숨겼고 수 백년 된 곰파에선 장엄한 염불 소리대신 텅 빈 바람 소리만 들리기도 했다.


이번 여정동안 일행의 안내를 맡은 텔렉 남걀군과 며칠 전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올해 스물 네살인 텔렉은 라다크의 누브라벨리가 고향이지만 부모님의 도움으로 델리로 유학을 했고 지난 봄, 대학을 졸업했다. 역사학을 전공했고 공부를 더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연로하신 할머니와 농사 짓는 부모님, 그리고 아직 미혼인 여동생이 있는 그는 사실상 집안의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당장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텔렉은 라다크에 관광객이 몰리는 여름 시즌 동안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졸업 전에도 여름방학 동안은 레로 돌아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집안 살림을 도왔었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일자리를 구할 예정이다.

 

불쑥 이뤄지는 만남은 경탄의 연속


“경찰이나 군인이 되고 싶어요. 만약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면 정치, 경제, 역사학 중에 한 가지를 전공하고 싶지만 아직 결정을 못했어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물론 델리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싶죠. 하지만 아는 사람도 없는 델리에서 취직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에요. 그러니 그냥 고향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역사학을 전공한 그가 경찰이나 군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재차 물었다. 하지만 그는 경찰이나 군인이 가장 좋은 직업 아니냐며 오히려 반문한다. 자신의 적성이나 전공보다는 사회적 인지도나 안정적인 측면에서 군인이나 경찰은 라다크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직업인 것이다.


“남자들은 21살 이후, 여자들은 18살을 넘으면 결혼하는 게 보통이에요. 저는 학교를 다니느라 결혼이 늦어진 편이죠. 결혼 상대는 라다크 여자도 좋고 델리여자라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좋아하는 여자라야 해요. 아직 여자 친구도 없으니 언제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팝음악을 좋아하고 유럽 축구에 관심이 많으며 디지털카메라나 노트북에 열광하는 텔렉은 그 나이 또래의 여느 인도 젊은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부모님과 고향을 사랑하지만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대도시에 나가 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정착하고 싶어 한다. 그의 바람은 아마도 라다크 젊은이들 대다수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텔렉은 곰파에 들어갈 때마다 능숙한 솜씨로 마니차를 돌리고 법당에 들어가 기도하며 바람 부는 언덕 위엔 타르초를 내걸었다. 타르초를 걸때면 “모든 생명에게 평화가 깃들길”이라는 라다크식 발원을 허공에 큰 소리로 외치곤 했다. 우리 눈에 그는 분명한 라다키였지만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삶, 희망하는 미래는 우리가 상상하는 라다키들의 삶과는 분명 달랐다. 그것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라다크를 찾아오는 대다수의 여행객들이 상상하고 보고 싶어 하던 ‘오래된 미래’와 동떨어져 있다고 해서 얼굴을 찌푸릴 일은 더더욱 아니다. 적은 생산과 적은 소비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공동체의 삶이 라다크에서 지속돼야 한다고 주장할 일도 아니다.

 

따뜻한 미소있어 행복했던 여정


여행이란 그들의 삶을 우리의 입맛으로 재단하는 과정이 아니다. 비록 라다크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어느 길로 나아가게 될지 알 수 없고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아쉬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그리워하던 라다크의 오래된 미래는 끊임없이 재탄생할 것이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


터키가 낳은 위대한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시처럼 우리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라다크의 변화가 계속되는 한, 더 좋은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여정도 그들과 걸음을 맞춰야 할 것이다. 비록 우리의 이번 여정은 여기서 끝나더라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쉼 없이 눌러대던 카메라 셔터도, 빼곡히 적어 내려가던 취재수첩과 펜도 모두 가방 속에 차곡차곡 넣었다. 숨 가쁘게 진행됐던 여정동안 더 바쁘게 움직였던 그 모든 기록의 도구들을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라다크의 하늘과 땅, 미소가 가슴으로 떠오른다. 비록 짧은 순간, 좁은 시야와 단견으로 그들을 대했지만 언제나 환한 미소와 과분한 친절을 베풀어주었던 이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듯 여겨지는 하늘의 땅을 따듯하고 풍요로운 사람의 땅으로 만들어 주었던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라다크의 마지막 밤을 청한다. 줄레! 라다크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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