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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초의 스님의 추사 상청 조문

기자명 법보신문

벗이 세상을 떠나니 슬픔이 용란의 소리처럼 사무치네

1857년 10월 추사 별세
초의, 노구 이끌고 상경
영전에 제문과 차올리며
이생 하직한 ‘지음’ 위로

 

 

▲초의와 추사는 ‘지음(知音)’이었다. 그 옛날 종자기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이해해주던 백아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던 것처럼, 초의 스님은 추사가 세상을 뜨자 더 이상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림은 초의 스님(왼쪽)과 추사(오른쪽)의 영정.

 


초의 스님의 마지막 상경은 1857년 무렵이다. 이때 초의는 봉은사에서 간행된 화엄경의 교증(校證)에 참여하는 한편, 아끼고 그리던 벗, 추사 김정희의 조문(弔問)을 위해 상경하였다. 실제 추사의 서거일은 1856년 10월10일이다. 하지만 그는 단걸음에 추사의 상청(喪廳)을 찾지 못하고, 1858년 2월쯤에야 과천을 찾는다. 물론 추사의 부음이야 1856년 11월 초순경에 들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초의 신변의 사정으로 인해 뒤늦게 조문을 한 셈이다. 언제나 추사의 강녕(康寧)을 빌었던 초의였고, 상경하는 소치(小癡) 편에 차와 문안편지를 보냈던 해가 1855년 봄이 아니었던가. 실로 추사의 부음은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으리라.


그는 추사의 영전에 제문(祭文)과 차를 올려, 이생을 하직한 벗을 위로하였다. “함풍 8년 무오 2월 청명한 날에 방외의 벗, 의순은 삼가 맑은 차를 올려 완당선생 김공의 영전 앞에 고하나이다(惟咸豊八年二月淸明日 方外淸交某 謹以淸酌 敢昭告于阮堂先生金公筵帳下)”로 시작되는 제문은 그의 담담한 정회(情懷)가 행간에 오롯이 배어난다.


아! 42년 동안 아름다운 교유 어긋나지 않아, 수천만겁 향화의 인연 함께 맺은 사이지만, 먼 곳에 떨어져서 만나기가 어려우니 항상 편지로 (서로) 대면하였고, 자신 (귀한 신분)을 낮춰 이야기할 때에는 서로의 신분조차 잊었습니다. 제주도에서 반년을 위로했고, 용호에서 두 해를 머물렀습니다. 어느 때, 진리를 담론하자면 다투는 소리가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위태로웠고, 마음을 논할 때에는 온화한 기운이 마치 봄바람이나 따뜻한 햇살처럼 훈훈하셨습니다. 손수 뇌협이나 설유를 다려 함께 마시고, 슬픈 소식에 적삼(옷)을 적시기도 하였습니다. 생전에 바른 말씀은 둥근 거울처럼 성의 있었고, 돌아가신 후에 이 슬픔 용란(龍鸞)의 소리처럼 더욱 사무칩니다.(嗚呼 四十二秊 不金蘭交契 幾千百劫 共結香火因緣 別遠會稀 遺書常遞對面 紆尊降貴 發語時多忘形 瀛海慰半年 蓉湖留兩載 有時談道 爭危如暴雨迅雷 有時論心和氣若春風惠日 手煎雷莢雪乳同傾 耳觸聲悲 蘿衫具濕 生前一悟 憑珠鏡而 身後雙悲 倂龍鸞而彌切)

 

 

▲유산 정학연의 편지. 이 글에는 초의 스님이 추사의 문상에 들렀다가 노자가 떨어져 고생하던 정황이 잘 드러난다.

 


그와 추사의 교유는 1815년 시작되어, 42년의 세월을 함께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이생에서의 짧은 40여년의 인연이 아니라 수천만겁동안 맺어진 도반(道伴)이었음이 분명하다. “수천백겁 함께 향화로 맺어진 인연(幾千百劫 共結香火因緣)”이라는 초의의 확신은 그들의 오랜 숙연을 드러낸 셈이다. 따라서 그들은 지중한 인연으로 연결된 사람들, 항상 속 깊은 서로의 정을 나누었고, 신분을 초월한 승속(僧俗)의 교유는 후세의 표상이 되었다. 한편 그들의 교유에 매개물은 차였다. 추사가 손수 다린 질 좋은 차를 함께 마시며 세상의 희노(喜怒)를 공유했던 사람들, 하지만 진리를 논할 땐 서슬처럼 푸른 정론(正論), 한 치의 양보를 허락하지 않았다. 봄바람처럼 따뜻한 추사의 마음을 “봄바람이나 따뜻한 햇살”로 비유했던 초의는 추사 댁에서 그 해 겨울을 지내고, 다음 해인 1859년 대흥사로 돌아와 산문 밖을 나아가지 않았다.


마치 ‘백아절현(伯牙絶絃)’처럼 초의에게 지음(知音)은 오직 추사뿐이었다. “백아절현”은 전국 시대 인물, 백아와 종자기에서 유래된 것. 거문고의 명인 백아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종자기뿐이었다. 백아가 푸른 바다를 그리며,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는 어김없이 “아! 깊고 푸른 바다이여”라 하여 백아의 깊은 음악 세계를 공감했다. 바로 지음(知音)은 그들의 고사(故事)에서 연유된 것. 후일 자신의 음악을 이해했던 종자기가 돌아가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깊은 산 속으로 은둔하였으니 초의가 출입(出入)을 잊은 것은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故事)와 비견(比肩)될 만하다. ‘완당김공제문’의 종구(終句)는 제문의 백미(白眉)로, 초의의 불교관이 또렷이 나타난다.


종전의 모든 일, 다 없는 것이지만(從前萬事摠成空)/ 공이 진공에 이르면 오히려 묘유가 되는 것(空到眞空還有妙)/ 만 떨기 연꽃, 불 속에서 더욱 붉다네(蓮花萬朶火中紅)/ 하나를 높이 들어 다시 생각해 보니(高一着更思惟)/ 내가 온 것도 원래 온 것이 아니고(我來原不至)/ 그대 가신 것도 돌아간 것이 아니라네(公去亦無歸)/ 다만 이것은 오고 감이 없거늘(只這無去來)/ 이는 무엇인가(這箇是阿誰)/ 세상사람, 다 모르겠지만(盡大地人都不識)/ 그러나 그대만은 아시겠지(祗許先生獨自知)

 

1815년부터 42년간 교유
신분 초월한 우정의 사표
“수천백겁의 도반” 고백

두 사람 교유 매개는 차


그가 추사의 영전에서 나눈 공의 이치는 지인(知人)만이 아는 세계. 초의가 추사의 영전에 조문하는 것도, 추사가 세상을 하직한 일도 큰 이치에서 보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도리를 아는 이는 오직 추사뿐, 초의의 불이선(不二禪)은 조문(弔文)에서도 빛난다. 한편 초의는 조문 후에도 과천에 머물며, 그 해 겨울을 보냈다. 당시 초의는 완호의 탑에 쓸 석재뿐 만 아니라 비문도 한양에서 새겼으며, 배편으로 대흥사에 이운하였다. 실로 스승의 탑을 세우기 위한 초의의 노력은 1858년 봄에야 끝을 맺는다. 한편 1858년 경 초의가 한양에서 대흥사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곤란했던 경제적인 어려움은 유산(酉山) 정학연이 전주 현감에게 보낸 편지로 추정되는 글을 통해 밝혀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주 아전(지금은 혹 퇴거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김재모(아전의 이름은 자주 바뀝니다. 반드시 자세히 물어 본신 후에야 그가 전에 쓰던 이름을 알 것 입니다 ), 자(字)가 가범이라는 사람이 해남 초의선사에게 제 선친의 필첩을 속여 취하여 서문에 사는 모씨(某姓)에게 팔아먹었다고 합니다.(그 사람의 이름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는) 선친의 도장을 칼로 긁어 동기창이라 써서 팔았다고 하더군요. 김 아전을 불러들여 엄히 분부하시면 그가 서문 안의 모처에서 (초의의 필첩을)찾아내 가져 올 것입니다. 곧 엄격히 색출하시어, 곧 초의에게 찾아 주심이 어떨지요. 초의는 호남지방의 이름난 승려인데, 일찍이 (그가) 어떤지를 듣지 못했습니까. 지금 초의 노인이 영하(營下)에 있으니 다행히 바로 불러 보시고 친히 그 사정을 물으신다면 상세히 알 수 있어서 이런저런 말이 없을 것입니다. 초의를 불러보신 후, 소략하게 그의 여비를 마련해 주실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만년을 보낸 과지초당 전경. 초의 스님도 조문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작년 여름 병이 있는데도 한양에 온 것은 김정희를 조문하기 위한 것이고, 그의 선사 비각의 일 때문인데 일이 여의치 않아 가을에 돌아가지 못하고 추사 댁에서 겨울을 지내고, 지금 남쪽 해남으로 돌아가려합니다만 그의 행색으로는 돌아갈 여비가 한 푼도 없다고 합니다. 가련하고 염려됩니다. 겨우 3~4량의 비용이면 절에 돌아갈 수 있다더군요.(全州吏(今惑有退去之慮)金在謨(吏頻改名 必詳詢然後 知其前名) 字曰可範者 欺取鄙家先親筆帖於海南草衣禪師 賣食於西門內某姓人(其人姓名未詳云)而先人圖章刀刮以董其昌三字塡書賣之云 招入金吏嚴分付卽自可推出於西門內某處而來納 須卽日嚴速索出仍付草衣如何 草衣之爲湖南名僧 曾未聞知否 今草衣老人 方在營下 幸卽招入賜顔 親問其委折 則可諒得矣 不在多言耳 草衣招見後 略助其行費 則甚好甚好 未知如何 昨夏扶病上京者 一則弔秋史也 一則爲其先師碑刻事 而事不如意 秋間未歸 過冬於秋史宅 今始南歸 其行色囊乏一錢云 可憐可念 所以奉提 不過三四兩 可抵寺云耳)


이 편지는 당시 초의가 처한 어려움이 무엇이지를 소상히 드러낸다. 특히 초의가 다산의 서첩을 전주 아전에게 속아서 빼앗긴 전 후 사정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어서 주목할 만 하다. 더구나 다산의 도장을 긁어내고 “동기창(董其昌)”이라 새겨 팔아먹었던 탐관오리의 부패상도 함께 밝혀져서 속된 풍속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동기창(1555~1636)은 명대의 명필가이다. 그의 친필은 조선 사람들에게 선호도가 높았던 예술품이었음도 함께 밝혀진 셈이다.


▲박동춘 소장
한편 대흥사로 돌아갈 여비조차 궁색했던 초의의 간난(艱難), 유산의 속내 깊은 배려는 후인들의 귀감이 되기에 족하다. 뿐 만 아니라 한 줄의 행간 속에 드러난 진솔한 성의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언제나 잔잔한 여운과 감동을 남기는 일인 듯하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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