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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란 한 글자는 온갖 오묘한 이치 드러나는 문

기자명 법보신문

근기 둔한 중생 진리 바로 알기 어려워
이해 정도에 따라 법 설하는 것이 교종


선종은 번뇌적고 총명한사람 공부법으로
바로 일행삼매 들어가 한결 같이 마음 써

 

111. 자성이 청정한 마음

 

 

▲중국 신강 쿠차현 쿠무투라석굴에 모신 부처상.

 


寶藏論云 知有有壞 知無無敗 眞知之知 有無不計 旣不計有無 卽自性無分別之知. 是以 此眞心自體之知 卽無緣心 不假作意 任運常知 非涉有無 永超能所. 水南和尙云 卽體之用 曰知 卽用之體 爲寂 如卽燈之時 卽是光 卽光之時 卽是燈 燈爲體 光爲用 無二而二也. 又云 知之一字 衆妙之門 如是開示靈知之心 卽是眞性 與佛無異. 故名顯示眞心卽性敎 全同禪門第三直顯心性之宗.


승조(僧肇)의 ‘보장론’에서 “유(有)를 알되 유에 집착하지 않고 무(無)를 알되 무에 집착하지 않는다. ‘참다운 앎’은 유와 무를 헤아리지 않고, 유와 무를 헤아리지 않는다면 곧 ‘자성의 분별이 없는 앎’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참마음 자체의 앎’은 곧 ‘반연이 없는 마음’이니, 의도하지 않아도 삶속에서 모든 것을 늘 알면서 유와 무에 집착이 없으니 대상을 보는 주체인 능(能)과 대상경계인 소(所)의 시비분별을 영원히 초월한다.


이를 수남 스님은 “참마음 바탕 자체의 쓰임새를 ‘앎’이라 하고, 쓰임새 자체의 바탕이 ‘적(寂)’이 된다. 이는 등불과 불빛의 관계처럼 등불이 불빛이요 불빛이 등불이니, 등불이 바탕이 되고 불빛이 쓰임새가 되는 것과 같아 다를 것이 없으면서도 다른 모습이다.”라고 말한다. 또 “앎이란 한 글자는 온갖 오묘한 이치가 드나드는 문이다. 이와 같이 ‘신령스런 앎’이 드러난 마음이 곧 ‘참성품’이니 부처님과 다를 것이 없다.”라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일러 ‘참마음을 드러낸 것이 곧 그 성품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현시진심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라고 하니, 이는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바로 마음의 성품을 드러내는 종’인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과 완전히 같은 내용이다.


강설) 모든 번뇌의 뿌리인 무명을 타파하면 시비 분별하는 나와 그 대상 경계가 사라지니, 대상 경계로서 분별하는 ‘유’와 ‘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유와 무를 보지 않는 그 자리가 텅 빈 고요한 참마음이요 올바른 깨달음이며 열반이다. 이 ‘텅 빈 고요한 참마음’이 모든 중생에게 본래 다 갖추어져 있는 ‘참성품’임을 바로 드러내 보여 주는 가르침을 현시진심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라고 한다. 어떤 모습을 가지고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또한 어떤 상(相)을 타파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에 ‘즉성(卽性)’이라 표현하고, 방편으로 보여주는 은밀한 뜻도 아니기에 ‘현시(顯示)’라고 말하는 것이다. 종밀 스님은 ‘화엄경’ 출현품(出現品)에 나와 있는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를 본래 다 갖추고 있다.”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현시진심즉성교’를 설명하고 있다. 교종의 ‘현시진심즉성교’나 선종의 ‘직현심성종’은 상근기가 자신의 참마음이 곧 참성품임을 알아 그 자리에서 단박에 깨달아 들어가는 돈교(頓敎)를 설하고 있다.


故西域傳心 多兼經論 無二途也. 但以此方 迷心執文 以名爲體 故達磨善巧 揀文傳心. 標擧其名[心是名也] 示其體[知是心也]. 喩以壁觀 令絶諸緣 絶諸緣時 問 斷滅否. 答 雖絶諸念 亦不斷滅. 問 以何證驗 云不斷滅. 答 了了自知 言不可及. 師卽印云 只此是自性淸淨心 更勿疑也.


그러므로 서역에서는 마음을 전함에 대개 경론을 겸하고 있으니 선(禪)과 교(敎)가 서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중국 사람들이 마음을 모르고 문자에 집착하여 겉으로 드러난 이름이나 개념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달마 스님은 훌륭한 방편으로 문장을 가려 뽑아 마음을 전하고 있으니, 그 이름을 본보기로 들어[마음은 이름을 붙인 개념이다] 그 바탕을 묵묵히 보여 준 것이다[앎이 마음이다]. 이를 달마는 묵묵히 앉아 벽을 바라보는 것으로써 모든 반연을 끊도록 깨우쳐 주었다. 혜가가 모든 인연을 끊었을 때 달마 스님은 물었다.


달마 : 모든 반연을 다 끊었는가?
혜가 : 모든 반연을 다 끊었더라도 반연을 끊어 없앤 것이 아닙니다.
달마 : 무엇을 증득하고 경험하였기에 반연을 끊어 없앤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혜가 : 분명히 스스로 알 뿐 말로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달마 : (곧 인가하여 말하기를) 오직 이것이 ‘자신의 성품 맑고 깨끗한 마음’이니 다시 의심하지 말라.


若所答不契 卽但遮諸非 更令觀察 畢竟不與他先言知字. 直待他自悟方驗眞實 是親證其體然後 印之 令絶餘疑. 故云 傳心印. 所言者 唯知字 非總不言. 六代相傳 皆如此也. 至荷澤時 他宗競起 欲求契 不遇機緣 又 思惟達磨懸絲之記[達磨云 我法 第六代後 命若懸絲] 恐宗旨滅絶 遂言 知之一字 衆妙之門.


만약 제자의 대답이 ‘참다운 앎’과 일치하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면, 곧 모든 잘못된 망상을 타파하고 다시 마음을 관찰하도록 할뿐, 끝내 그에게 먼저 ‘앎’이란 한 글자를 말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스스로 깨달아 바야흐로 진실의 체험을 기다리는 것이니, 이는 그 바탕을 몸소 증득한 뒤에 인가하여 나머지 의심을 끊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연히 심인(心印)을 전한다.”라고 말한다. ‘묵연히[]’란 말은 오직 ‘묵연히 안다[知]’라는 뜻의 글자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육대(六代)에 걸쳐서 심인(心印)을 전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하택 시대에 이르자, 다른 종파들이 다투어 일어나 묵연히 심인(心印)과 하나가 되려고 하였지만 그럴 인연을 만나지 못하였고, 또 달마 스님이 “뒷날 법맥이 전해지는 것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라고 한 예언을 생각하고,[달마 스님은 “나의 법이 육대(六代)에 걸쳐 전해진 뒤 그 명(命)이 가느다란 실 끝에 매달린 것처럼 위태롭다.”라고 예언하였다]. 하택 스님은 선종의 종지가 없어질까 걱정이 되어 마침내 ‘앎이란 한 글자는 온갖 오묘한 이치가 드나드는 문[知之一字 衆妙之門]’이라는 말까지 하게 되었다.


강설) 이 단락의 글[들]은 종밀 스님의 도서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종밀은 우선 공(空)으로써 모든 현상을 타파하는 파상종이 적멸(寂滅)만을 주장하여 ‘참된 앎[眞知]’을 부정하고 있는 것과 법상종에서 중생과 부처를 나누어 ‘마음 자체가 부처님이다[卽心卽佛]’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종밀은 파상종(破相宗)과 법상종(法相宗)의 잘못을 비판하고 달마선의 근본에는 ‘앎[知]’의 사상이 흐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달마 스님부터 육조 스님까지 ‘앎[知]’을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코 ‘앎[知]’의 사상이 없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이심전심의 묵계로써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달마 스님이 예언하듯 신회(神會) 때 스승과 제자가 묵계하여 법을 전하는 일도 없게 되자, 신회는 달마의 종지(宗旨)가 사라질까 걱정하여, ‘앎이란 한 글자는 온갖 오묘한 이치가 드나드는 문[知之一字 衆妙之門]’임을 드러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問 悟此心已 如何修之 還依初說相敎中 令坐禪否.
答 若沈厚重 難可策發 掉擧猛利 不可抑伏. 貪嗔熾盛 觸境難制者 卽用前敎中種種方便 隨病調伏. 若煩惱微薄 慧解明利 卽依本宗一行三昧.


문: 이 마음을 알았다면 어떻게 이를 닦아야 합니까? 처음에 말한 설상교(說相敎)에 의지하여 좌선 수행을 해야 합니까?
답: 마음이 흐릿하고 무겁기에 공부할 마음을 내기 어렵고, 마음이 끊임없이 어지럽고 들뜨기에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으며, 탐욕이나 성냄이 치성하여 부딪치는 일마다 통제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설상교의 여러 가지 방편을 사용하여 병의 상태에 따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번뇌가 적고 총명한 사람이라면 본종(本宗)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지한다.


강설) 교종(敎宗)의 설상교(說相敎)는 밀의의성설상교(密意依性說相敎)를 줄여 말한 것이다. 부처님이 중생계를 볼 때 근본바탕이 모두 부처님의 세상으로서 참성품의 모습이었지만 중생들은 무명에 덮여 이 실상을 모르고 있다.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나’를 내세움으로써 온갖 시비 분별을 하여 그 과보로 고통을 받지만, 근기가 둔한 중생들은 이 사실을 금방 알기 어려우므로 그들이 보는 경계와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법을 설하는 것이 설상교이다. 이 가르침은 겉으로는 아직 참성품의 실상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密意] 그 성품에 의지하여[依性] 법을 설하기 때문에 밀의의성설상교(密意依性說相敎)라고 한다. 설상교(說相敎)의 수행은 번뇌를 하나하나 퇴치하기도 하고, 사선팔정(四禪八定)을 수행하기도 하며 단계적으로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다.


반면 선종의 진심즉성교(眞心卽性敎)의 수행은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지한다. 일행삼매(一行三昧)는 일상생활 모든 곳에서 바로 부처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말한다.


“선지식들이여, 일행삼매란 오고가며 앉고 눕는 모든 삶 속에서 한결같이 곧은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이는 ‘정명경’에서 ‘곧은 마음이 수행터며 부처님의 맑고 깨끗한 국토니라.’ 말한 것과 같다. 언제 어디서나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이 순수하고 곧아 흔들림이 없는 수행터로서 참으로 맑고 깨끗한 국토를 이루는 것, 이를 일러 일행삼매라고 한다. 일행삼매를 갖춘다면, 땅속에 묻혀 있어 보이지 않던 씨앗이 점점 자라나 결실을 맺듯, 이들 삼매 또한 부처님의 삶으로 드러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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