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김흠돌의 난
45. 김흠돌의 난
  • 법보신문
  • 승인 2011.12.1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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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골왕권에 도전하는 신라 중대 최대의 정치사건

신문왕의 장인이자 공신
문무왕 죽자마자 곧 반란

 

혼란스런 왕실 허점 공격
일부 고위관리·귀족 동참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신문왕은 정치적인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성골왕족에서 진골왕족으로 바뀐 무열왕권에 대한 정당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사진은 경주시 배반동의 신문왕 능.  문화재청 제공

 

 

7세기 신라에는 세 차례의 반란이 있었다. 631년에 일어난 칠숙의 반란과 647년의 비담의 난, 그리고 681년의 김흠돌(金欽突)의 난이 그것이다.


진평왕은 재위 54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신라에서 가장 오래 왕위를 지켰던 왕이다. 왕 53년(631)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평왕은 이를 알아차리고 칠숙을 잡아 동시(東市)에서 목 베고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석품은 백제로 도망가기 위해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자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몰래 총산(叢山)으로 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서로 바꾸어 입고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서 처형되었다. 칠숙 등이 일으킨 반란의 원인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도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던 점에 유의하면 아마도 왕위 계승과 관련된 문제였을 가능성이 많다.


진평왕의 맏딸 덕만(德曼)이 왕위를 이어받았으니, 곧 선덕여왕이다. 신라는 선덕여왕 11년(642)에 백제의 침략을 받아 대야성 등 40여 성이 함락됨으로써 사직의 보전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국가적 재난의 책임을 선덕여왕에게 돌리는 여론이 있었다. 여왕은 위엄이 없어서 이웃 나라가 업신여겨 침략을 도모한다는 여론이었다. 선덕여왕 12년(643) 9월 신라 사신을 당에 파견해 원조를 청했다. 당나라 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제시했던 계책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으니 주인을 잃고 도적을 불러들여 편안한 세월이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 임금으로 삼되, 자신이 홀로 임금이 되기 어려우니,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호위를 하겠다. 그대 나라가 편안해짐을 기다려 그대들에게 맡겨 스스로 지키게 하겠다.”
태종의 계책이란 신라를 병탐하려는 흉계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고, 여왕이 다스리는 신라를 그 자신이 업신여기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선덕여왕 16년(647) 정월에는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난을 일으켰다. 여왕이 능히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담 등은 군사를 동원하여 왕을 폐하려 했다. 반란군은 명활성에 주둔했고 김유신 등이 이끄는 왕의 군사는 월성에 진을 치고 방어했다. 열흘 동안의 공격과 방어에도 승부는 결정 나지 않았고, 선덕여왕은 이달 8일 아직 난을 평정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진평왕의 아우 국반(國飯)갈문왕의 딸 승만(勝曼)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곧 진덕여왕이다. 이달 17일에 비담과 그와 연좌된 30명을 처형함으로서 이 난은 평정되었다.


김흠돌의 난은 왕권에 도전하는 신라 중대 최대의 정치적 사건 중의 하나였다. 정명(政明)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그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였다. 정명은 문무왕 5년(665)에 태자가 되었고, 이때 김흠돌의 딸을 태자비로 맞았다. 681년 7월 1일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태자는 문무왕이 돌아간 1주일이 되는 7월 7일에 선왕의 구전(柩前)에서 왕위를 계승하고, 그 10일 후에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에서 선왕을 장사지냈다. 8월 8일에 김흠돌(金欽突)·흥원(興元)·진공(眞功) 등이 난을 일으켰다. 장례를 치룬지 미처 한 달도 되기 전이었다. 이처럼 김흠돌의 난은 신문왕이 즉위하고 안정을 찾기도 전에 그 허를 노려 일어난 것이었다. 난을 진압하고 신문왕이 내린 교서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상(喪)중에 서울에서 난이 일어날 줄이야 누가 생각인들 했겠는가. 사인(士人)을 놀라게 했으니, 우려하고 괴이하게 생각하는 마음 어찌 조석으로 잊을 수 있겠는가?”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이 난은 김흠돌 등이 왕실 내부의 주요 관직에 있는 일부 귀족세력과 사전에 긴밀히 모의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당시 상대등(上大等)과 병부령(兵部令)을 겸하고 있던 김군관(金軍官)까지 이 난에 관련되어 있었다. 흉악하고 사특한 자를 불러들이고 근시(近侍)들과 서로 결탁하여 화가 안팎으로 통하고 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 기일을 정한 후에 반역을 행하려 하였다는 교서의 내용 등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소집된 병사로 나머지 잔당을 토벌하는데 5일이 걸림으로써 사인이 놀라게까지 했던 사실은 이 반란 세력의 규모가 상당한 것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상대등 김군관은 김흠돌 등과 교섭하여 역모의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달 28일에 군관을 죽였다.


이 모반사건의 구체적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는 없지만, 이 사건을 왕비의 무자(無子)로 인하여 장래 자기 세력의 고약(孤弱)함을 우려한 나머지 나온 행동, 혹은 왕비를 통해 그 지위를 획책했던 것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난의 성격으로 볼 때, 이 난의 원인이 단순히 장래 자기 세력의 고립과 약화를 우려했기 때문이나 왕비를 통한 그 지위를 획책한 것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난은 무열왕권을 부정하는 반란으로써 김흠돌 등이 신문왕의 즉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김유신계의 도움을 얻어 무열왕권의 출범을 본 무열왕의 백제정벌이 무열왕가의 명예회복을 위한 정치적 수단과도 무관하지 않았고, 이어 문무왕은 재위 21년간에 삼국통일을 완성함으로써 무열왕권의 권위를 확립시켰다. 왕위계승이 성골왕족으로부터 진골왕족으로 바뀐 무열왕 및 문무왕이 재위하는 동안은 골품제에 의한 어떤 형태의 반발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기록에는 별다른 반란사건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이 시기가 통일전쟁이라고 하는 대외적인 관심에 집중되고 있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통일의 주역을 담당했던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등이 죽고 신문왕이 즉위한 한 달도 채 못 되는 사이에 김흠돌의 난이 일어났다. 사전에 계획되어 추진되었던 이 난이 무열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진골 왕권에 대한 반발
난 진압 후 개혁 잇따라

 

귀족 세력의 약화 초래
전제왕권 확립하는 계기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후의 신문왕은 많은 정치적인 개혁을 추진한다. 이는 물론 통일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적인 추이와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김흠돌의 난과 같은 중대한 도전을 받으면서 무열왕권의 정당화 및 그 강화에 따른 노력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신문왕은 즉위하여 9년에 이르는 동안에 뚜렷한 정책변화와 관제의 정비를 통해 중대왕권의 확립을 꾀한다. 이 때문에 중대(中代)로의 사실상의 전환기는 신문왕 9년 전후라고 보는 견해는 설득력을 갖는다. 이때의 주요한 변화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대등(上大等) 및 병부령(兵部令)을 격하했다. 상대등과 병부령을 겸하고 있던 김군관이 김흠돌의 난과 관련하여 처형되었다. 김군관의 처형은 중대에 있어서의 상대등 자체의 운명을 결정지어 준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상대등 및 병부령의 지위가 달라졌음을 현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귀족 세력 전반의 사회적인 저하를 의미하고 반대로 전제왕권의 확립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왕권 확립을 위해 중앙관부를 정비했다. 위화부(位和府) 및 예작부(例作府)를 설치함으로써 14부(府)의 중앙관부를 일단 정리했다. 오묘제(五廟制)도 확립했다. ‘삼국사기’ 신문왕 7년(687) 4월조에는 대신을 선조의 사당에 보내어 제사를 드리며 말했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며 두 번 절하옵고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의 영(靈)에게 말씀드립니다.”


이 기록으로 당시에 오묘제가 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신라의 오묘제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그 정확한 년대를 알 수는 없다. 무열왕의 오묘제 시정 가능성을 추측하는 견해도 있고, 문무왕이 그 즉위 8년 11월 6일에 여러 신하와 함께 선조묘(先祖廟)에 배알했던 사실이 있음을 보면 이미 신문왕 이전에 오묘제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신문왕은 오묘제에서 요구하는 태조 및 고조·증조·조의 사친(四親)으로 오묘제를 확립시키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정난황음(政亂荒淫)으로 축출되었던 진지왕을 조묘에 봉사(奉祀)하여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 동시에 무열왕권이 유지되던 신라중대의 전 시기를 통하여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을 불천(不遷)의 묘주(廟主)로 삼게 함으로써 무열왕가의 법통을 공식적으로 완결시켰다. 오묘제는 직접 자기 세계(世系) 조상을 제사하는 가묘제(家廟制)로서 가조적(家祖的) 성격이 농후한 것이라고 볼 때, 신문왕의 오묘제 확립은 무열왕가의 강화나 그 신분의 합리화에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지방통치제도를 정비했다. 신문왕은 그 즉위 5년에 서원경(西原京)과 남원경(南原京)을 설치하고 완산주(完山州)와 청주(菁州)를 설치하여 9주 5소경의 제도를 갖추었다. 이는 고구려 및 백제 고토의 완전 장악과 지방의 통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전제왕권의 확립과 그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유교정치이념의 확립을 위해,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당나라에 ‘예기(禮記)’를 구하기도 했다. 신문왕은 그 9년에 중외관리(中外官吏)의 녹읍을 폐하고, 매년 조(租)를 차등 있게 내리는 것으로 상례로 삼게 했다. 이는 왕권의 확립을 위한 적극적인 조처로 간주된다.


▲김상현 교수
김흠돌의 난은 무열왕권을 부정하는 대규모의 반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난을 진압한 뒤에 진행된 신문왕의 일련의 정치적 개혁은 왕권의 강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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