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순석 목판연구소장, 김광식 박사 비판
특별기고-김순석 목판연구소장, 김광식 박사 비판
  • 법보신문
  • 승인 2011.12.1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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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성립, 민족불교로는 설명 못한다”

민족불교론은 식민지 실상 외면한 이상론
‘굴절된 근대불교’라는 관점이 더 바람직

 

▲김순석 목판연구소장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에 선정된 ‘근대한국불교사 기술의 문제’라는 논문에서 “그동안의 연구 방식은 단순한 ‘항일·친일’의 이분법적 구도로서 근대한국불교의 다양성을 모색하는 기회를 제거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근현대불교사연구의 권위자인 김광식(동국대 연구교수) 박사가 본지 기고문을 통해 “조성택 교수의 민족불교론 비판이 조계종 정체성 흔든다”고 강하게 반박함에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는 근대불교사를 전공한 김순석<사진> 한국국학진흥원 목판연구소장이 김광식 박사의 민족불교론을 비판하는 견해를 밝혀와 이를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


최근 법보신문사는 근대불교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조성택 고려대 교수(이하 조 교수)와 김광식 동국대 교수(이하 김 교수) 사이에 지상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조 교수와 김 교수는 학계에서 열정적으로 연구 성과를 배출하는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 교수는 최근 근대불교사에 관한 적지 않은 연구 성과를 발표하면서 근대불교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폭넓게 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김 교수는 170편에 달하는 논문과 20권이 넘는 저서 그리고 많은 자료집을 펴낸 학자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근대불교사를 두고 이같은 논의가 이루어지게 된 것도 어쩌면 김 교수의 연구성과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토론의 발단은 조 교수가 작년에 발표한 ‘근대한국불교사 기술의 문제’라는 논문에서 김 교수의 민족불교론을 목적론적 해석이라고 평가한 데서 비롯되었다. 조 교수는 김 교수의 민족불교론이 근대 불교계를 친일과 항일의 이분법으로 구분하였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되면 근대불교계의 다양한 고뇌들이 간과될 수 있다고 조 교수는 지적한다. 예를 들면 민족불교론은 근대 사회가 되면서 도입된 자유, 과학, 시민 등과 같은 새로운 관념들을 해명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친일 승려들이 제기한 근대불교개혁론과 같은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묻는다.


조 교수는 민족불교론으로 근대 불교를 제대로 해명하기 어렵다고 평가하고 대안으로 딜레마론을 제시하였다.
조 교수의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하여 김 교수는 20년 동안 근대불교사를 연구하면서 찾아낸 것이 민족불교론이며, 그 관점에서 조계종사를 서술하였다고 한다. 김 교수는 민족불교론을 산중불교에서 새로운 문명사회의 중심으로 나가려는 불교대중화론과 국가와 민족의 재건 및 수호에 기여하려는 불교사회화론의 결합이라고 한다. 김 교수의 민족불교론은 1910년대 임제종 설립운동에서부터 시작하여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의 성립까지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김 교수는 오랜 세월 동안 친일불교론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 결과 민족불교론을 검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다양한 논의를 수용할 용의는 있지만 구체적인 사료와 입론으로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김 교수의 연구성과에 대한 평가는 향후에 자연스럽게 진행되리라고 본다.


필자 또한 근대불교사를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이 토론을 지켜보면서 국외자로 방관하기보다는 한 마디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토론의 결실을 보다 풍성하게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근대불교사를 공부하는 학자가 많지 않고, 이런 토론의 장은 처음 마련된 자리인지라 그 의미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조 교수의 딜레마론은 김 교수의 지적처럼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이지 역사를 보는 시각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역사 속의 딜레마는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시기, 어느 곳에서나 있어왔다. 그리고 그 딜레마는 항상 긍정적으로 해소되는 길을 걸어왔다. 역사발전론의 견지에서 본다면 사회 혼란으로 역사가 한 때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후퇴가 아닌 2보 전진을 위해서 1보 후퇴라는 것이 입증되어왔다. 우리는 최근 아프리카 및 중동지역의 자스민 혁명에서 그러한 실례들을 보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갈림길에서 선택의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를 현재 시점에서 평가하면서 딜레마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딜레마가 되고 만다. 근대불교사를 딜레마의 역사로 남겨둔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책임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겠는가. 이제는 근대불교의 성격을 논의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조 교수가 김 교수의 민족불교론을 목적론적 해석이라고 평가한 것은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뜻일 것이다. 김 교수는 근대불교사를 일관되게 민족불교론으로 설명하면서 일제시대 조선불교 조계종의 성립을 민족불교론의 귀착지로 설명한다. 한국 불교사는 한국사의 한 부분이고 한국사는 세계사의 일부분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로버트 버스웰의 다음과 같은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한국 학자들끼리만 한국학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말고 세계의 다른 학자들 특히 일본학, 중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협력하는 방안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를 한반도의 불교로 국한시키지 말고 광역 종교네트워크의 중요한 허브로 보아야 한다. 한국 불교만의 전통을 고집하는 것은 한국 불교 전통을 명확히 이해하기보다 오히려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버스웰의 이러한 지적은 근대불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다시 생각해 보아야할 금언이다. 민족불교론은 근대사회에서 불교도들이 민족주의적인 의식을 가지고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국권을 상실한 시기에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투쟁의 역사를 부각시키는 일은 중요하다. 이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정밀하게 검증되고 엄정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필자는 그 이전 시기도 문제가 있지만 특히 1937년부터 설립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41년에 성립된 조선불교 조계종 성립의 역사를 민족불교론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육군지원병제가 실시되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실시되어 당시 모든 사회조직이 효율적인 전쟁수행을 위해 재편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40년에는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이 시행되었다. 학생들은 근로보국대에 동원되었고, 여성들은 정신대근무령으로 생산현장과 공장 등으로 동원되었고, 심지어는 위안부로 전쟁터에 끌려가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농작물을 헐값에 수탈당하였고, 숟가락, 젓가락, 밥그릇 등 놋그릇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징발되고, 국방헌금을 내어야 하던 시기였다. 조계종 설립에 앞장섰던 승려들의 의식 속에 설사 민족의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발설하는 순간에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던 때였다. 이 시기의 사회적인 조건은 승려들이 국가와 민족을 재건하려는 의식을 드러내면서 조계종을 창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더구나 1940년에 만들어진 조선불교총본사설립위원회의 사무국은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에 두어졌고 설립위원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었던 시오하라 도키자부로(鹽原時三郞)였다. 2명의 부위원장 가운데 한 사람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이었던 계광순(桂珖淳)이었고, 나머지 한 명이 당시 월정사 주지였으며 조계종 성립 이후 해방이 되는 순간까지 종무총장을 지냈던 이종욱(李鍾郁)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학위논문과 책에서 논증한 바 있다.


필자는 조 교수의 딜레마론과 김 교수의 민족불교론이 의미있는 학설이기는 하지만 근대 불교계의 상황을 제대로 그려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그 대안으로 ‘굴절된 근대불교’라는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굴절된 근대불교’란 한국의 근대 진입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됨에 따라서 불교계의 근대 또한 굴절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굴절된 근대불교’라는 표현이 근대불교사를 너무 비하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족불교라는 이상론으로 근대불교사를 서술하기는 곤란하다고 본다. 조선은 무력을 앞세운 외세의 침략으로 문호를 개방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근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근대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들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자주적인 근대 민족국가 수립은 좌절되었고, 우리의 근대는 식민지 시기 파행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근대불교계는 조선왕조의 탄압과 개항 이후 밀려든 외세로 혼미한 상황이 거듭되었다. 일제시대 교단지도부는 나름대로 개혁운동을 진행하였지만 그것은 한계를 가지면서 식민지 권력과 일정하게 타협을 하면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혁과 자주 노선의 추구는 식민정책의 탄압 강도에 따라 시기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총독부의 탄압이 강하면 불교계의 대응방식은 약하게, 탄압의 강도가 약하면 대응은 강하게 나타났다. 1919년 3·1운동 이후부터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기 전까지 불교계의 개혁과 자주화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다. 이 시기는 이른바 문화정치시기로 탄압의 강도가 이완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국내의 사회적 조건은 표면적으로 민족운동을 진행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1941년 이후부터는 일제의 탄압 강도가 최고조에 이르기 때문에 이 시기 조계종 성립을 민족불교론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끝으로 필자는 오늘 근대불교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이 토론이 후학들에 의해서 의미있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뜻 깊은 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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