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연재를 마치며
31. 연재를 마치며
  • 법보신문
  • 승인 2011.12.2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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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고매한 가치 되살려 세상 이롭게 했던 ‘다성’

조선후기 많은 지식인들
질곡의 시대 차로써 극복

 

초의 업적 육우만큼 위대
차의 진정성 다시 드러내

 

 

▲독서를 하다가 책을 베고 자는 노인과 뜰 한 모퉁이에서 찻물 끓이는 동자의 모습을 격조 있게 표현한 이재관의 오수도(午睡圖). 조선후기 초의 스님에 의해 부흥한 차문화가 사대부 사이에 널리 확산됐음을 알 수 있다.(왼쪽) 1980년대 중반 초의차의 맥을 잇는 응송 스님과 그의 제자인 박동춘 소장이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오른쪽)

 


“초의스님의 다삼매를 찾아서”가 처음 연재된 것은 2010년 9월 초이다. 연재를 위해 답사를 떠나던 날은 음력 7월15일, 백중(百中)이었다. 백중은 목건련이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제도하기 위해 음식을 만들어 스님에게 공양했던 날이다. 그 날 서울에는 굵은 장대비가 내렸다. 비가 개인 것은 천안쯤이던가. 맑게 갠 하늘이란 눈이 시리도록 투명하고 파랬다. 어릴 적, 읊조리던 “비 개인 하늘, 아득히 기러기 날고, 넓은 바다, 외로운 배가 느릿느릿 가네(天晴一雁遠 海闊孤帆遲)”란 ‘추구(推句)’의 한 구절, 막연히 좋았지만 청천(晴天)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백중날 천안을 지나면서 비로소 청천(晴天)의 시리도록 말간 하늘을 가슴으로 알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초의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던 날은 답사를 통해 경험할 다양한 의미들을 미리 예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제와 음식, 그리고 청천이 품고 있는 상징적인 동의성(同意性)은 분명 알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는 듯도 하였다. 음식과 약으로써 차. 처음 사람들은 이렇게 차를 이용했다. 이후 차의 건영(健靈)인 담박한 맑음으로 현현된 차의 가치는 청천처럼 투명하게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정화해 위안을 주었다. 백중의 공양물인 음식은 몸을 양생케 한다. 차는 수행자들의 공양물로, 정신을 보양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차는 최고의 공양물인 셈이고, 음식 중에 가장 고결한 세계를 지녔다. 따라서 차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보양하는 매개물로 점차 확대된 것이다.


초의 스님이 구축했던 차의 본질과 효용은 이 두 축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신성한 공양물인 차를 부처님께 올린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이를 살필 수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충담사(忠談師)의 고사(古事)이다. 그가 3월3일과 9월9일에 남산의 삼화령 부처님께 차를 공양했던 일과 경덕왕을 만나 차를 대접했던 것은 경덕왕 24(764)년의 일이었다. 이는 신라 말 구법승들이 차를 들여오기 전부터 신라에는 소수의 승려들이 차를 마시고, 공양물로 불전에 올린 정황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차는 언제부터 불교와 융합되어 불가분의 연관을 맺었던 것일까. 이는 초의 스님이 애써 복원한 차의 본질적인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럼 차의 단계적인 발전 과정을 살펴보자. 처음 차가 음식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닝보(寧波)지역 하모도 유적지에서 발굴된 차나무를 통해서이다. 어느 날 샘을 파던 시골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이 유적지는 5000년 전, 쌀을 주식으로 삼았던 부족들의 주거지였다. 이 유허지의 부엌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조열(條列)로 심겨진 차나무를 발굴한 것. 이는 고대에 차가 음식으로 활용된 사례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셈이다.


한편 약용으로 사용한 용례는 신농씨의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농씨는 농사법과 약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준 성인이다. 그가 약초를 실험하던 중, 중독되었다가 차를 먹고 위기를 모면했다는 옛 이야기는 차의 중화 능력을 특별히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차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음식이나 약용으로 이용되던 원시적인 방법론이 지혜로운 사람의 출현으로 점진적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의 발전 단계는 유사한 특성을 지닌 차라는 점에서 한국이나 중국의 고민은 같았으리라. 특히 음약(飮藥)의 수준에서 수행의 음료로,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 선종이었다면 한국의 차문화는 중국과 그 축을 함께하면서 점차 환경적인 특성이 함의된 한국적인 차의 정체성을 모색했으리라. 선종과 차의 융합은 필연적인 것으로, 참선 수행의 장애였던 수마(睡魔)를 해결하기 위해 차를 마신 것이다. 이로 인해 수행에 필요한 양질의 차를 얻기 위한 수행승들의 부단한 노력은 차문화사를 화려하게 꽃 피운 원동력이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차를 만드는 법이나 탕법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 나갔다. 이것은 8세기 육우가 ‘다경’을 저술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저산(山)의 묘희사 승려 교연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난다. 그는 육우에게 사원에서 축척된 차의 안목을 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차의 멘토(mentor)이었다.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 호주로 내려간 육우는 여기에서 중국 차문화를 집대성할 이론을 세웠다. 그리고 제다법과 탕법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이러한 공적은 차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후대에 그를 ‘중국의 다성(茶聖)’이라 평가한 연유는 여기에 있다.


초의 스님은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그는 조선후기 민멸된 차를 복원, 초의차를 완성했다. 조선후기 차문화를 중흥할 수 있었던 토대는 초의차였다. 이 명차는 초의의 부단한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물이지만 초의차의 원류는 대흥사로 전해진 사원차이며, 수행의 공력이 깊게 반영된 선차(禪茶)였다. 따라서 초의차에는 오랜 시간 연찬된 삼매(三昧)의 공력이 녹아든 반야선(般若船)이었다. 이러한 초의차의 명징한 덕성은 추사(秋史)와 유산(酉山), 신위, 황상, 박영보 같은 당대의 사대부들을 매료시켰다. 그들은 혼란했던 질곡의 시대적 상황을 차를 통해 극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격조 높은 차의 경지를 알게 된 것 또한 초의차를 통해서이다. 이는 당시 초의와 교유했던 사대부들의 편지 속에 누누이 드러난 정회(情懷)였다.


초의는 그들의 후원에 힙 입어 사라져가는 차의 가치를 다시 세상에 드러냈는데, 초의가 세운 차의 업적은 육우만큼이나 위대한 일이다. 다시 말해 육우는 차의 활용에 무지했던 이들에게 합리적인 차의 이용 방법을 제시한 인물이었고, 그의 조력자는 승려 교연이다. 한편 초의는 사라져가는 차의 진정성을 다시 드러낸 인물로, 그의 후원자는 유학자들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대적 상황을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차의 고상한 가치를 되찾아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업적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차의 긍정성 고금이 동일
차 문화는 곧 소통의 문화

 

답사하며 초의에 큰 감동
공감해준 독자들에 감사


이 연재를 준비하는 동안 차를 애호했던 사람들이 탁마자(琢磨者)였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순리대로 흘러가는 차의 긍정적인 힘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초의 스님의 다삼매를 찾아서’는 초의가 살았던 삶의 여정을 따라 그가 지나간 발자취를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이었다. 이 과정은 그가 만난 사람들과의 고만고만한 관계와 시대성을 종횡으로 맞춰 보려는 퍼즐게임과도 같았다.


▲차꽃과 차씨.
초의 스님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이번 여정에서 가장 관심을 끈 부분은 차를 통한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요즘처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현실에서는 가슴 따뜻한 인연을 만나기 어렵다. 이것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생긴 폐단이기도 하지만 속내를 공유할 진정한 만남을 얻지 못한 공허감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초의가 차를 통해 나눈 따뜻한 소통의 속내를 무엇일까.


차는 물질이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진정성은 삼매수(三昧手)로 드러난다는 말 속에 차란 무엇인가의 진실한 해답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 통해 드러난 차의 색, 향, 미는 차의 내적인 요소를 감싸고 있는 겉모습이고, 차의 기운은 사람을 위안하는 맑음을 담는 그릇이고, 온화함을 담은 내적인 요소였다. 이러한 차의 내재적 가치와 겉으로 드러난 차의 세계는 사람을 즐겁게 하며, 만남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었다. 그래서 문인들의 동반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만남을 맛으로 비유하고 향으로 비유한다. 난향을 좋아하는 연유는 고상함이요, 은근함이다. 차의 향은 난향에 버금가는 은근함을 지녔다. 차를 군자와 같다고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초의와 추사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그들은 차를 통해 더욱 굳건한 만남을 이루었다. 좋은 만남은 삶의 활력소이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의미에서 초의의 생애에 첫 만남은 운흥사로 출가해 벽봉의 제자가 된 것이었다. 운흥사에서 완호 스님를 만난 것은 초의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숙명적인 만남은 다시 위대한 스승, 다산을 찾게 된 다리가 되었다. 다산으로 부터 유산으로 이어진 그들의 만남은 대를 이은 것이었고, 유산은 초의의 교유 폭을 한층 넓혀준 사람이었다. 초의는 유산을 통해 추사를 만났다. 학림암에서 추사를 만난 초의의 설렘은 그가 추사에게 보낸 편지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 장의 편린은 초의 삶을 복원해 진한 감동을 이끌어 내는 보물. 초의를 연구하면서 언제나 만났던 지묵서(紙墨書)에 남겨진 그의 붓 길은 오래오래 긴 여운을 남겼다.


초의에게 또 다른 특별한 만남은 소치이다. 그는 추사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추사와 초의의 정 깊은 편지를 전해준 인물이다. 소치는 초의가 공들여 길러낸 제자였다. 한편 초의의 상경을 재촉한 것은 완호의 탑명을 구하는 일이었다. 결국 초의가 유수한 경화사족들과의 만남은 추사와의 인연이 만든 인드라망이었는데, 홍현주가 베푼 청량산방시회는 초의의 문재(文才)와 수행력, 그리고 초의차의 명성을 경향에 드러냈던 시절 인연이었다.


▲박동춘 소장
이 답사를 통해 초의의 품 넓은 인품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가 차에 쏟은 열정을 가슴으로 느꼈다. 필자가 차에서 느꼈던 부담감도 이번 여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차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라는 해답도 얻은 듯하다. 끝으로 이 연재의 행간을 함께 공감해 준 독자들과 소중한 지면을 할애해 준 신문사 여러 분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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