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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공덕(功德)

기자명 법보신문

공덕은 법신에 있고 결코 복 밭에 있지 않다

 

▲ 혜능 스님의 수계도량인 광효사.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에 대한 논쟁인 풍번문답(風幡問答)으로 유명한 곳이다.

 

 

위사군이 예배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께서 법을 설하심은 실로 부사의합니다. 제자가 일찍이 조그마한 의심이 있어서 큰스님께서 여쭙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큰스님께서는 대자대비로 제자를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의심이 있거든 물으라. 어찌 두 번 세 번 물을 필요가 있겠는가.”


위사군이 물었다.


“대사께서 설하신 법은 서쪽 나라에서 오신 제일조 달마조사의 종지가 아닙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제자가 듣자오니 달마대사께서 양무제를 교화하실 때, 양무제가 달마대사께 묻기를, ‘짐이 한평생 동안 절을 짓고 보시를 하며 공양을 올렸는데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달마대사께서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시니, 무제는 불쾌하게 여겨 마침내 달마를 나라 밖으로 내보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큰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모른 것이니라.”(使君禮拜自言 和尙說法 實不思議 弟子嘗有少疑 欲問和尙 望和尙 大慈大悲 爲弟子說 大師言 有疑卽問 何須再三 使君問 法可不是西國第一祖達磨祖師宗旨 大師言是 弟子見說 達磨大師化梁武帝 問達磨朕 一生已來 造寺布施供養 有功德否 達磨答言 無功德 武帝遂遣達磨出境 未審此言 請和尙說 六祖言 實無功德 使君勿疑 達磨大師言 武帝著邪道 不識正法)

이 내용은 ‘벽암록’이라는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옛날 스님들의 공안을 모아놓은 책인데, 선문제일서(禪門第一書)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책입니다. 지금 위사군이 혜능 스님에게 여쭙고 있는 내용은 ‘벽암록’ 공안 중에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제1칙으로 ‘달마불식(達磨不識)’ 공안입니다.


달마 스님은 남인도 향지국 왕자로 인도를 떠나 중국에 도착해 불심천자(佛心天子)로 불리던 양나라 무제를 만납니다. 무제는 달마 스님을 만나기가 무섭게 묻습니다. “내가 평생에 걸쳐 무수히 많은 절을 짓고, 무수한 스님들을 공양했으며, 많은 경전을 펴냈다. 이런 나의 공덕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자 달마 스님이 한마디로 잘라 말합니다. “없습니다.” 불쾌해진 무제가 다시 묻습니다. “내 앞에 있는 그대는 과연 누구인가.” 그러자 달마 스님이 말씀하십니다.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벽암록’의 달마불식의 내용입니다. 풀이하면 ‘달마 스님의 모른다’ 공안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달마 스님과 양나라 무제가 만났을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두 사람의 활동연대가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달마 스님과 양 무제의 만남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혜능 스님의 제자 하택 신회 스님에 의해서입니다. 당시 북종선과 남종선의 대립 속에서 친 정부적인 북종선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주장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어찌됐든 여기에서 ‘육조단경’에서 말하는 공덕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양 무제는 스스로 출가하기도 하고 또 불심천자(佛心天子), 호불황제(護佛皇帝)로서 누구보다 열심히 불교를 보호하고 포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달마 스님은 왜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했을까요. 우리가 수행하는 목적은 탐진치(貪瞋癡) 삼독을 여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 속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말끔히 비워내고 털어내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며 또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양무제의 마음에는 내가 무슨 일을 했다. 내가 누구를 도왔다. 그리고 이 정도면 상당한 공덕을 쌓은 것 아니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즉 아만(我慢)으로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보상심리가 어떻게 공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를 말합니다. 보시를 했다는 흔적마저도, 보시를 했다는 생각마저도 지워야 참다운 보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면 절을 짓고, 스님들을 공양하고, 포교를 하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놓고 공덕을 이야기하다면 이것은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 혜능 스님의 대답도 여기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습니다. “실로 공덕이 없으니, 사군은 달마대사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삿된 길에 집착하여 바른 법을 모른 것이니라.”


명쾌한 말씀입니다. 진정한 공덕은 육근을 잘 제어해서 탐냄과 분노, 집착, 어리석음 등을 덜어가는 것에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위사군이 물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닦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고 하지는 말라. 공덕은 법신에 있고 복 밭에 있지 않느니라. 자기의 법성에 공덕이 있나니, 견성이 곧 공(功)이요, 평등하고 곧음이 곧 덕(德)이니라.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 만약 모든 사람을 경멸하고 아상(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여 법신에 공덕이 없느니라.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하여 곧으면 곧 가볍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곧 공이요,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덕이니라. 공덕은 자기의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이같이) 복과 공덕이 다르거늘 무제가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요, 달마대사께서 허물 있는 것이 아니니라.”(使君問 何以無功德 和尙言 造寺布施供養 只是修福 不可將福 以爲功德 功德在法身 非在於福田 自法性有功德 見性是功 平直是德 內見佛性 外行恭敬 若輕一切人 吾我不斷 卽自無功德 自性虛妄 法身無功德 念念德行 平等直心 德卽不輕 常行於敬 自修身卽功 自修心卽德 功德自心作 福與功德別 武帝不識正理 非祖大師有過)

혜능 스님은 위사군의 질문에 복과 공덕을 확실하게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절을 짓고 보시하고 공양을 올리는 것은 복이지 공덕이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이 혜능 스님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좋은 행위는 좋은 결과를 도출해 냅니다.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선행이나 착한 행동이나 공양을 베풀거나 남을 돕는 행위들이 궁극적으로 복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복의 밭이라 할 수 있는 복전 또한 복을 짓는 대상입니다. 부처님과 스님들을 복전이라고 하는 것도 이 분들을 잘 모시고 공양을 하는 것은 결국 이 생이든 다음 생이든 불법을 만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인연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덕은 바로 이런 세속적인 복과는 다른 영역입니다. 공덕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으로 불성을 보아 깨달음을 얻는 것을 공(功)이라 하고 밖으로 차별 없는 부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덕(德)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남을 돕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덕은 오로지 수행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내재돼 있는 부처님이 밖으로 현현토록 하는 것이 공덕입니다. 아무리 많은 복을 모아도 성불(成佛)을 할 수는 없습니다. 공덕은 진여본성인 불성을 일깨워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며, 중생심이라는 먹구름에 가려져있는 본래의 자성을 되찾는 일입니다.


이러니 달마 스님에게 자신의 공덕을 물은 무제의 질문은 한참을 벗어난 것입니다. 복을 지어놓고 공덕을 논하니, 달마 스님께서 일언지하에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복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복을 쌓아야합니다. 복도 한 생각 돌리면 바로 공덕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상에서 진정으로 무주상 보시를 행할 수 있다면, 이것은 복을 넘어 공덕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내재돼 있는 선함과 따스함과 자비로움이 밖으로 넘쳐흘러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공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공덕은 자신을 맑히는 일입니다. 본래 부처님인 스스로를 자각하는 일이고, 밖으로 평등하게 보살행을 행하는 일입니다. 평등하다는 것은 차별과 분별이 없다는 뜻이고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말합니다. 더 이상 수승한 경지가 없는 평등 원만한 깨달음, 이것이 바로 평등하고 곧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과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작은 복이 아니라, 법신 그 자체로 허공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활달한 공덕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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