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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준비

기자명 법보신문

막상 닥치면 캄캄해지는 게 죽음죽음 준비 잘 할수록 삶도 충실

준비 없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모하다. 공부도 그렇고, 수행도 그렇고, 세상 일이 모두 그렇다. 힘들고 더디더라도 벽돌로 집을 지어야지 귀찮다고 짚이나 판자로 쉽게 만들면 후~ 하는 늑대의 입김 한 번에 무너져버리기 십상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때 되서 죽으면 되지 준비는 무슨 준비냐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평소 의연한 듯해도 막상 닥치면 눈앞이 깜깜해지는 게 죽음이다. 죽음은 우리 삶의 전반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고 넘어서지 못하면 늘 삶이 죽음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삶에 대해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초기경전에서 죽음의 문제를 그토록 강조했던 것도 그것이 곧 삶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2007년 6월, 나는 암이라는 판정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다. 그때 나는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동안 나는 애써 죽음을 외면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수술이 끝나고 다행히 의식이 돌아왔다. 그러나 암은 완쾌가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다 나은 것 같아도 조건만 맞으면 금세 생겨나는 게 암이다. 마치 싹둑 자른 미나리가 물을 만나면 다시 자라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수술이 끝나고 곧바로 나는 내 주변을 정리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정성을 들였던 마산의 절과 어린이집은 청암사 강원의 선배스님에 맡기기로 했다. 아픈 몸으로 신도님들을 만나는 일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초발심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무엇보다 컸다. 나는 선배스님께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향후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관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절에 있는 차량 명의까지 모두 넘겨드렸다. 다만 절에서 나오는 쌀로 아이들 밥을 먹일 것과 어린이집 공과금을 내달라는 요청뿐이었다. 또 내 명의로 돼있는 작은 토굴과 보험금은 내가 죽더라도 종단 재산으로 남을 수 있도록 처리했다. 그 모든 일을 병실에서 며칠 만에 전화로 다 끝냈다. 홀가분했다. 마치 다시 출가한 기분이었다. 이제 언제 어디서 세상과의 인연을 마치더라도 내가 누군가의 부담이 되거나 나로 인해 분란이 될 소지가 없어진 것이다.

암이 재발해 두 번째 수술을 받은 재작년 가을에는 시신기증까지 모두 마쳤다. 암에 걸린 장기야 별로 쓸데가 없더라도 행여 내 몸의 다른 부분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다. 또 내 통장의 잔고들은 현재 후원하고 있는 네 명의 아이들에게 고루 나눠줄 생각이다. 비록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일정기간이나마 그 애들이 차비와 밥값은 걱정 않고 공부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5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만큼 감사할 일도 많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출가 후에도 늘 지지를 보내주시는 속가의 부모님, 평생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엄격한 출가자의 길을 보여주신 우리 노스님, 정도 많고 어른 깍듯이 모실 줄 아는 우리 은사스님, 그리고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만난 많은 분들. 돌아보면 그 분들 모두가 선지식이었다.

바람이 있다면 죽기 전까지 내가 누군가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 병원에서 지도법사로 있는 것도 그 때문이며, 또 다른 소임이 내게 주어지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 연명치료에 기대지 않고 다음 세상을 위해 조용히 떠나고 싶다. 마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끝>
 

대엽 스님 동국대병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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