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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불자들의 생활속 수행-下

기자명 법보신문

“자신에게 정직해야 삼독 경계할 수 있어”

순간순간 일어나는 성냄과 욕심 내려놓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관찰하는 습관 가져야
수행 목적은 일체 집착서 벗어나는데 있어

 

 

▲외국인들의 한국불교 템플스테이 체험. 서구유럽에서 온 외국인들이 한국의 한 사찰에서 저녁 공양을 들기 위해 발우를 든 채 법당으로 향하고 있다.

 


“아니 저것 보게나, 명상수행이 훨씬 수월해졌어. 명상수행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어, 발버둥치지 않을수록 덜 고통스러워졌어.”


‘혼침’과 ‘들뜸’이 갖는 나의 마음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명상수행에서 내가 나 자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의 자녀에게도 훨씬 더 친절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친절한 척 할 필요가 없었다. 짜증스럽게 대하기보다는 오히려 훨씬 더 부드럽게 대했다. 일주일 만에 나의 네 살배기 아들이 자발적으로 “엄마, 사랑해”라고 불쑥불쑥 말하곤 했다. 난생 처음으로 여섯살 된 나의 딸이 카드를 썼다.


“사랑해, 엄마. 엄마 최고야.”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수행과 자녀 양육’에 관해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글에서 부모로서의 마음을 간직하게 된다면 자녀 양육과정은 완벽하게 수행의 한 과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었다. 또 자녀를 키우다 보면 자연스레 ‘집착’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도 했다. 다음은 하버드대학 불교학과의 한 교수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자녀 양육에 관한 경험담이다.


“그 교수님은 자신의 어린 딸과 같이 놀이터에 갔었는데 딸이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닦아 줄 도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으로 콧물을 훔쳤습니다. 순간 다른 사람의 콧물 같았으면 느꼈을 역겨움을 딸의 콧물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한 자신을 발견한 그는 스스로도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타(自他)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찰하게 된 것이지요. 인간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습관, 물질적 요소, 인간관계 등 여러 요소의 집합체로서 존재합니다. ‘부모’는 자녀와의 관계 그 자체입니다. 그 교수는 딸의 콧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더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모로서 행하는 이러한 짧은 순간의 행동에서 우리는 소아(小我)적이면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것을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간에.”
자녀를 갖기 전 29세 때, 나는 스스로를 유능하고 성취한 인간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딸을 낳은 후 30세 때, 나에게 존재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던 ‘가장 추악한 인간성’을 보게 되었다. 나는 아이로 인한 집착에 압도당해 자제력을 상실하고 소리를 지르고 분노에 손을 떨었다. 직업을 비롯한 결혼, 우정, 수행 등 다른 여러 영역에서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양육’은 내가 갖추지 못하고 있는 ‘역량’과 ‘성숙’을 필요로 한다. 누구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녀 양육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녀가 있는 부모들의 조언으로 깨닫는다. 부모로서 살다보면 자존심이 꺾이고 굴욕감을 느끼는 날들이 늘어난다.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방식의 색다른 시험을 치르게 되고 크게 부족했던 부분이나 잠재되어 있던 악습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근거 없는 자만심과 젊음의 오만함이 부분적으로 깨지고 자신의 한계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된다. 우리 자신을 좀 더 명확하게 보면서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타인의 허물을 더 많이 용서하게 된다. 그렇다고 매우 이기적이고 허영심이 강하고 거만하고 경솔한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부모들이 있기는 하다.


자신을 개발하고 ‘부모의 마음’을 간직하려고 노력한다면 자녀 양육은 완벽하게 ‘수행의 한 과정’이 될 수 있다. 양육 과정이 수행의 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아주 특별한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정 과정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자녀 양육을 하면서 겪은 고통스런 과정을 관(觀)하면서 더 인내하고, 더 친절하고, 더 자비롭고, 더 이타적이고, 더 깨어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느냐에 따라 수행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듯 일상이 수행, 수행이 일상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일상생활에서 규율이 더 이상 쓸모없게 되었다거나 규율적인 방법으로 인해 매우 당황해 하는 순간이 없어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호 작용의 분위기가 매우 달라졌다. 이런 종류의 통찰과 자기 개선이 매일 항상 일어나게 된다는 인상을 줄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심리적이고 영적인 돌파를 형성하는데 종종 수년이 걸리고 일년에 몇 차례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경우 그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첫째 지혜로운 법사로부터의 법문을 듣거나 읽는 것, 둘째 규칙적인 명상수행, 셋째 마음 작용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서 현재 이 순간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지 명확히 자각하는 것, 넷째 우리의 행위 방식, 타인을 대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개선하는 것 등 네 가지 사이에 상호 연관되고 상호 유익한 대화가 이루어질 때 그와 같은 개선이 일어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위에 제시한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사람은 변화할 수 있다. 그래서 좀 더 편안하고, 만족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타인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주게 된다. 불자의 삶을 산다는 것이, 재가불자에게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해탈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해탈에 이르기 훨씬 이전이든, 또는 해탈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미망에 빠져있기 보다는 더 깨어있는 순간들을 현재 만드는 것은 바로 지금, 오늘 전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 속해 있다. 매 순간 탐진치 삼독(三毒)을 자각하고 이를 놓아버리고 오히려 그의 대척점에 있는 관대함이나 친절, 지혜로움에 근거해서 행동한다면 우리는 깨어있을 수 있다. 그러한 모든 ‘작은 깨침’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작용해서 깨어있는 삶을 완성하게 된다.  <끝>


수미런던 듀크 불교공동체 지도법사 simplysumi@gmail.com 
번역 백영일 위원 yipaik@wooriba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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