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일통삼한(一統三韓)
47. 일통삼한(一統三韓)
  • 법보신문
  • 승인 2011.12.2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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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민 융화 촉진하고 민족의식 형성 기틀 마련

신라, 융합정책 적극 실시
유민들에 신라 관계 수여


전국을 9주 체제로 개편
온 나라 평정했다는 의미

 

 

▲경주시 남산동에 위치한 통일전(統一殿). 신라가 이룩한 일통삼한의 위업을 기리고 한반도 평화통일 의지와 염원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1977년 건립됐다.

 


강한 적대의식으로 대립하고 있던 삼국민은 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민족 구성원으로 융합되기 시작, 한민족 형성의 토대를 이룩했다. 이것은 신라의 고구려·백제 유민에 대한 일련의 융합책의 결과이지만, 또한 삼국 공동의 적인 당과의 투쟁이 더욱 이를 가속화시켰다.


660년 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백제인도 그 재능을 헤아려 임용했다. 고구려 또한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했지만 신라와 당이 대결하게 되자, 고구려 부흥군 중에는 신라에 합류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고구려 유민을 포섭함으로써 이들은 신라인들과 더불어 당과 싸웠다. 문무왕 12년(672) 8월에 신라군은 고구려군사와 더불어 당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던 예 등이 그 경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신라의 군사조직은 구서당(九誓幢)으로 정비되어 갔는데, 구서당 중 신라민으로 편성된 경우는 겨우 3개뿐, 나머지 6개는 새로운 복속민을 흡수하여 편성한 것이었다. 이로써 복속지의 유민에 대한 융화책이 급속하게 진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유민의 흡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그들에게도 신라의 관계(官階)를 수여했던 점이다. 문무왕 13년(673)에는 백제의 유민에게 옛 백제에서의 관계에 준하여 차등 있게 신라의 관계를 주었다. 또한 신문왕 6년(686)에는 고구려의 유민에게도 신라의 경관(京官)을 주었는데, 물론 옛 고구려의 관품에 준하여 균형을 이루도록 했었다. 이처럼 과거에 대립하고 있던 고구려·백제 양국인을 신라의 관료 조직 속에 편성, 포섭했음은 삼국민의 융합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신문왕 5년(685)에는 전국을 구주(九州)로 편제하는 지방통치 조직을 완성하였다. 구주는 옛 삼국의 영역에 각각 3주씩 나누어 설치된 것이고, 이것은 삼국민의 융합을 위한 조처였다고만 설명하기에는 문제가 없지도 않다. 구주의 설치시기가 삼국통일 훨씬 이전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주가 천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때, 구주로의 편제에는 통일을 이룩하여 온 나라를 평정한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신라 사회에는 일찍부터 명산대천 등 자연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왔었고, 이와 같은 토착신앙은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통일 이후 신라에서는 그 제사의 대상을 전국으로 확대 정비했다. 중사(中祀), 소사(小祀)의 대상을 옛 고구려 및 백제 지역에까지 확대했던 것은 당연한 조처였겠지만. 그것이 고구려·백제 양국 유민에 대한 정신적, 종교적 융합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이다.


당시 삼국민의 공통된 종교는 불교였다. 따라서 불교 신앙은 삼국민의 유대와 통합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문왕대에는 백제지역 웅천주 출신의 고승 경흥(憬興)을 국로(國老)로 우대했다. 이처럼 백제지역 출신의 고승을 국로로 삼았던 까닭은 복속된 지역을 불교의 교화로 폭넓게 회유시키려는 종교정책의 실현이었을 것이다. 문무왕이 임종 직전에,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도 신문왕이 이 명을 따라 그를 국로에 임명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통일 전쟁이 끝난 뒤, 고구려 백제 양국 유민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불교가 많이 기여했다. 삼국통일이 불교의 공덕에 힘입어 이룩되었다는 주장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신문왕 6년(686)에 청주시 운천동에 세워졌던 한 사적비에는 불교의 홍포와 삼국통일과를 연결 지어 서술하고 있다. 9세기 초에 일념(一念)이 지은 ‘촉향분예불결사문’에는 이차돈의 순교에 의한 불교의 공인과 그 후의 발전에 의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온 세상은 어울려 한 집안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818년에 건립한 ‘백율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에서도 이차돈의 입을 빌어 천하에 불교가 유행하게 되면 나라가 풍요롭고 국민이 편안하게 되며 가히 삼한을 통합하고 사해(四海)를 한집안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872년에 쓰여진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에서도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운 공덕으로 과연 삼한을 통합해 한 집안이 되고 군신이 안락하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불교 측의 기록에서는 대부분 삼국통일이 불교의 공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일차적으로 불교의 공덕을 내세우려했던 불교계의 의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지만, 동시에 삼국통일이 단순한 정복전쟁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법(正法)에 의해 천하가 통일된 것이라는 불교적 윤색을 가함으로서 복속민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대결과 원한의 감정을 화해로 이끌기 위한 의도 또한 내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삼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삼국민의 뿌리가 동일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서 통일 직후부터 강조된 것이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이었다. 원래 한(韓)민족이 삼국으로 분열되어 있다가 이제 하나로 통일되었다는 것이 곧 일통삼한이다.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을 각기 다른 민족으로 구분해야 할 만큼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달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의 언어 혈통 습속이 비슷했다는 것은 학계의 일치된 견해이기 때문이다. 수당의 중국인들도 삼국을 동질적인 국가군으로 이해하고 삼국을 통칭하여 삼한이라고 했던 경우도 있다. 651년 당 고종이 백제 의자왕에게 보낸 국서 중에 해동삼국(海東三國)을 삼한으로 표현한 예 등이 그렇다. 그러나 7세기 가까이나 별개의 국가로 대립된 삼국은 각기 수많은 전쟁과 정치적 대립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자기방어적인 대립의식만 조장되었을 뿐 민족의식이라는 공동 유대감은 크게 둔화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삼국간의 항쟁 시기에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통일의식은 형성되기 어려웠다.

 

삼한 공통된 종교는 불교
삼국민의 통합에 큰 기여


백제출신 고승 국로 추대
복속지역들 불교로 치유


당나라 고종은 670년에 신라 사신 김양도와 김인문, 그리고 박문준(朴文俊) 등을 옥에 가둔 적이 있다. 이때 박문준은 신라가 당의 힘을 입어 삼국을 통일했다고 한 바 있다. 즉 일통삼국(一統三國)이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삼국통일을 계기로 하여 민족의식이 대두했다. 삼국통일을 일통삼한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 일통삼한의식은 삼국의 통합이 이민족의 병합이 아니라 동족 관계를 가지고 있던 세 국가군이 하나로 통일되었다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임종 직전의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말했다.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에게 두 마음이 없으니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가히 소강상태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문무왕 13년(673)으로 고구려 및 백제 양국을 병합한 직후였다. 통일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김유신이 삼한일가(三韓一家)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은 주목된다. 신문왕 2년(682)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이 아뢴 말 중에 삼한이란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아방(我邦)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문왕 6년(686)에 건립된 청주시 운천동의 어떤 사적비(寺蹟碑)에는 합삼한이광지(合三韓而廣地)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삼국의 통합을 삼한 통합으로 인식했던 구체적 사례라고 하겠다. 삼한은 그 원래의 역사적 실체와는 관계없이 삼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훗날 당나라에서는 신라의 태종이라는 묘호가 당 태종과 중복된다고 문제 삼기도 했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문왕 12년(692)에 보낸 조칙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우리 태종 문황제(文皇帝)는 신묘한 공과 거룩한 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므로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신 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너희 나라의 선왕 김춘추에게도 그것과 같은 묘호를 쓰니, 매우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모름지기 빨리 칭호를 고쳐야 할 것이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논의하여 대답하였다.


“선왕 김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더욱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 공적을 이룩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별세하였을 때, 온 나라의 백성들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묘호를 태종으로 한 것입니다.”


당의 시비에 대한 신라의 응답 내용은 무열왕은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했기에 그 공을 기려서 묘호를 태종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왕은 유신과 더불어 꾀와 힘을 다하여 삼한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묘호를 태종이라고 했다”고 서술하여, 왕이 이룩한 일통삼한(一統三韓)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태종이 일통삼한의 공을 이루었다는 인식은 신라인들에게는 공통된 것이었다. 경문왕(景文王)이 관영법사를 보내 월악산 월광사(月光寺)에 머물던 대통(大通)에게 주지를 추인하는 글에는 “옛날 우리 태종대왕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삼한을 정복하고 통일을 이룩하던 때에”라고 한 구절이 있다. 항간에도 태종이 일통삼한 이후에 병기와 투구를 왕경 동북쪽 20리쯤의 암곡촌(暗谷村)에 감추어 두었다고 전하고 있었다.


통일 직후인 신문왕 때에는 일통삼한 의식이 고조되었는데, 이는 삼국민 사이의 동질성에 대한 자각의 결과였다. 이것은 이민족 당나라와의 투쟁과 삼국민간의 융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통삼한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삼국민의 융화를 촉진하고 민족의식을 펴는 계기가 되도록 했을 것이다. 통일 직후 민족의식이 대두하면서 삼국을 삼한으로 불렀지만 차차 삼한이란 용어가 우리나라라는 뜻으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9세기 후반에 세워진 여러 비문에는 삼한이 아방(我邦), 즉 우리나라의 의미로 쓰였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당과 투쟁하여 그 세력을 한반도로부터 몰아낸 뒤 신라가 실질적으로 지배한 영토는 대동강선인 중화(中和)로부터 원산만선인 덕원(德源)에 이르는 그 이남이었다. 이것은 일찍이 김춘추와 당 태종이 밀약했던 평양 이남의 범위를 넘지 못했다.

 

▲김상현 교수
그렇다고 고구려에 의해 삼국이 통합되지 못했음을 아쉬워할 수도 국토의 위축을 초래한 책임을 신라에게만 지울 수도 없다. 이것이 역사의 진행이었기에. <끝>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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