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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란 다양한 마음 작용·뜻까지 모두 아는 지혜

기자명 법보신문

공종은 말을 좇아서 집착하는 것을 막기위해
부정의 논리로 그릇된 자취 흔적 쓸어버리고

112. ‘앎[知]’이라는 한 글자

 

 

▲중국 천수 맥적산의 석조 불상.

 


遮詮表詮異者 遮謂遣其所非 表謂顯其所是. 又 遮者 揀卻諸餘 表者 直示當體. 如諸經所說眞如妙性 每云 不生不滅 不垢不淨 無因無果 無相無爲 非凡非聖 非性非相等 皆是遮詮 遣非蕩跡 絶想祛情.


“진리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공종(空宗)에서는 부정의 논리를 성종(性宗)에서는 긍정의 논리를 쓴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부정의 논리란 잘못을 쳐내는 것을 말하고, 긍정의 논리란 옳음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또 부정의 논리란 진실을 제외한 나머지 잘못된 모든 것을 가려내는 것이며, 긍정의 논리란 바로 당체(當體)를 보여 주는 것이다. 모든 경에서 설하듯이 진여의 오묘한 성품을 매번 “불생불멸(不生不滅)․불구부정(不垢不淨)․무인무과(無因無果)․무상무위(無相無爲)․비범비성(非凡非聖)․비성비상(非性非相)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모두 부정의 논리이다. 그릇된 자취를 쓸어버림으로써 중생의 알음알이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若云 知見覺照 靈鑒光明 朗朗昭昭 堂堂寂寂等 皆是表詮. 若無知見等體 顯何法爲性 說何法不生不滅等. 必須認得 現今了然而知 卽是我之心性 方說此知不生不滅等. 如說鹽 云不淡是遮 云鹹是表. 說水 云不乾是遮 云濕是表. 空宗但遮 性宗有遮有表. 今時人 皆謂 遮言爲深 表言爲淺 故唯重非心非佛 無爲無相 乃至一切不可得之言. 良由 只以遮非之詞爲妙 不欲親自證認法體故 如此也.


만약 앎 자체가 환히 빛나는 ‘지견각조(知見覺照)’, 신령스런 마음의 광명 ‘영감광명(靈鑑光明)’, 맑고 밝게 환하게 비추는 마음 ‘낭랑소소(朗朗昭昭)’, 환하게 의식이 깨어 있으면서도 고요한 마음 ‘성성적적(惺惺寂寂)’ 등을 말하고 있다면 이는 모두 긍정의 논리이다. 만약 보고 듣고 알면서도 고요한 마음인 이들 바탕이 없었다면 무슨 법을 그 성품으로 삼아 드러낼 것이며, 무슨 법을 불생불멸(不生不滅) 등이라고 하겠는가. 반드시 ‘지금 분명히 아는 그 자체’가 ‘내 마음의 성품’인 줄 알아야 비로소 이 ‘앎’을 불생불멸 등이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금을 담박한 맛이 아니라고 말하면 부정의 논리이고 짠맛이라고 말하면 긍정의 논리이며, 물을 건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부정의 논리이고 축축한 것이라고 말하면 긍정의 논리가 되는 것과 같다.


공종(空宗)에서는 주로 부정의 논리를 펼치고 성종(性宗)에서는 긍정과 부정의 논리를 함께 쓴다. 요즈음 사람들은 모두 부정의 논리를 깊은 도리라 여기고 긍정의 논리는 수준 낮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오직 비심(非心)․비불(非佛)․무위(無爲)․무상(無相) 나아가 ‘온갖 것을 얻을 수 없다’라는 말만 중요시한다. 참으로 ‘아니라고 부정하는 말’만 오묘한 도리로 삼을 뿐 몸소 법의 바탕을 증득하여 알려고 하지 않았기에 이와 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又 若實識我心 不同虛空 性自神解 非從他悟 豈藉緣生. 若不對機隨世語言 於自性上 尙無表示眞實之詞 焉有遮非方便之說. 如今實未親證見性之人 但傚依通 情傳意解. 唯取言語中妙 以遮非泯絶之文而爲極 則以未見諦故. 不居實地 一向託空 隨言所轉 近來尤盛 莫可遏之. 若不因上代先賢多聞廣學 深入敎海 妙達禪宗 何能微細指陳 始終和會 顯出一靈之性 剔開萬法之原. 是以 具錄要文 同明宗鏡.


또 실로 나의 마음이 허공 같지 않음을 안다면, 그 성품이 저절로 신령스레 아는 것이고 다른 것을 좇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다른 인연의 힘을 빌려 생겨나겠는가. 중생의 근기에 맞춰 세상의 언어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면, 실로 자신의 성품에서는 진실한 말조차 드러낼 것이 없는데, 어찌 잘못을 부정하는 방편설이 있겠느냐. 이는 마치 지금 실로 몸소 견성(見性)을 증득하지 못한 사람이, 오직 다른 것에 의지하여 알음알이로만 알려고 하는 것과 같다. 다만 언어의 오묘함만 취하여 잘못을 차단해 없애는 글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니, 이는 진리를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진실한 자리에 있지 않아 오로지 공(空)에 의탁하여 말만 따라 끌려가니 근래 이것이 더욱 심해지는 병폐를 막을 수 없다. 만약 선현들이 많이 듣고 배워 부처님의 가르침에 깊이 들어가 오묘하게 선의 종지를 통달하지 않았다면, 어찌 미세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꺼번에 알고 신령한 성품을 드러내 만법의 근원을 추려 보일 수가 있겠느냐. 이 때문에 불교의 궁극적 의미를 핵심적으로 전하는 기록에는 항상 ‘부처님의 마음 곧 종경’을 밝히고 있다.


認名認體異者 謂佛法世法 一一皆有名體. 且如世間稱大 不過四物 如智論云 地水火風是四物名 堅濕煖動是四物體.今且說水. 設有人問 每聞澄之卽淸 混之卽濁 堰之卽止 決之卽流 而能漑灌萬物 洗滌群穢 此是何物[擧功能義用而問之] 答云 是水.[擧名答之] 愚者認名 謂已解 智者 應更問云 何者是水[徵其體也] 答云 濕卽是水.[剋體指也]


‘이름을 아는 것과 그 바탕을 아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부처님의 법과 세간법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과 그 바탕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간이 크다고 해도 네 종류 물질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는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땅․물․불․바람은 네 종류 물질의 이름이 되고, 단단함․축축함․따뜻함․움직임은 네 종류 물질의 바탕이 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지금 물을 설명해 보겠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질문할 때마다 늘 “가만히 두면 맑아지고 저으면 탁해지며, 막으면 멈추고 터주면 흘러가서 만물을 적셔 온갖 더러움을 씻어 주는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작용의 뜻으로 물었다], “그것은 물이다.”라고 대답한다[개념으로 답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개념’을 안 것으로 이미 ‘알았다’고 말하지만, 슬기로운 사람이 다시 “무엇이 물입니까?”라고 물으면[그 바탕인 실상을 따진 것이다], “축축한 것이 물이다.”라고 대답한다[그 바탕의 고유한 특성을 판정하여 가리킨 것이다].


佛法亦爾 設有人問 每聞諸經云 迷之卽垢 悟之卽淨 縱之卽凡 修之卽聖 能生世出世間一切諸法 此是何物[此擧功能義用問也] 答云是心[擧名答也] 愚者認名 便爲已識 智者 應更問 何者是心[徵其體也] 答 知卽是心.[指其體也 此一言最親最的 餘字餘說皆疎. 如云非性非相 能言能語等是體 緣慮動用等是心 卽何異他之所問也.]
 

부처님의 법도 그와 같아서, 만약 어떤 사람이 늘 묻기를 “모든 경에서 ‘미혹하면 더럽고 깨달으면 맑으며, 멋대로 두면 범부이고 닦아나가면 성인이어 세간 출세간의 온갖 법을 낼 수 있는 이것이 무엇인고?”라고 한다면,[작용의 뜻으로 물었다.] “마음이다”라고 대답한다.[개념으로 답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름’을 안 것으로 이미 ‘알았다’고 하지만, 슬기로운 사람이 다시 “무엇이 마음입니까?”라고 물으면,[그 바탕인 실상을 따진 것이다.] “앎이 곧 마음이다.”라고 대답한다.[바탕을 가리킨 것이다. 이 한 마디가 가장 가깝고 옳은 말이니 나머지 글자와 설명은 모두 진실과 멀다. 만약 “성(性)도 아니요 상(相)도 아니면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바탕이며, 이리저리 생각하고 흔들리는 것들이 마음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어찌 본문에서 질문한 내용과 다르겠느냐]


以此而推水之名體 名唯一字 餘皆義用 濕之一字 貫於淸濁等 萬用萬義之中. 心之名體亦然. 知之一字 亦貫於貪瞋慈忍 善惡苦樂 萬用萬義之處. 直須悟得 水是名不是水 濕是水不是名 卽淸濁凝流無義不通也. 以例 心是名不是心 知是心不是名 卽眞妄善惡無義不通也.


이것으로써 물의 이름과 그 바탕을 추론하면 ‘물’이란 이름은 오직 한 글자이고 나머지는 모두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축축하다’는 ‘습(濕)’이란 한 글자가 ‘맑다’ ‘탁하다’ 하는 등등의 물에 관한 많은 특성과 그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이름과 그 바탕도 그러하다. ‘앎’이라는 한 글자가 또한 탐욕과 성냄, 자비와 인욕, 선과 악, 고통과 즐거움 등등의 다양한 마음의 작용과 그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은 이름일 뿐 진짜 물이 아니다. 축축한 기운[濕]이 진짜 물이지 그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으면 곧 이것이 맑기도 하고 탁하기도 하며, 얼어 멈추기도 하고 녹아 흘러가기도 한다는 물의 성질에 관한 어떠한 이치에도 통하지 못할 게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도 이름일 뿐 진짜 마음이 아니니, ‘앎[知]’이 진짜 마음이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참과 거짓, 선과 악 등 온갖 마음의 성질에 관한 어떤 이치에도 통하지 못할 게 없는 것이다.


空宗相宗 爲對初學及淺機 恐隨言生執故 但標名而遮其非 唯廣義用而引其意. 性宗 爲對久學及上根 令忘言認體故 一言直示. 達磨云 指一言以直示 卽是知字一言. 若言卽心是佛 此乃四言矣. 若領解不謬 親照靈知之性 方於體上 照察義用 故無不通矣.


공종(空宗)과 상종(相宗)은 초학자와 총명하지 못한 사람들이 말을 좇아 집착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다만 이름만 들어 그 잘못을 차단하고 오직 광범한 이치를 사용하여 그 뜻을 끌어왔다. 성종(性宗)은 오래 공부하거나 총명한 사람들이 언어를 잊고 분별을 떠나 바탕을 알도록 하기 위해 한마디로 그 바탕을 바로 보여준다. 달마 스님이 “한마디로 단박에 그 바탕을 보여준다.”라고 말한 것이 곧 ‘앎[知]’이란 한 글자다. 만약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말한다면 이는 ‘네 마디 말’이 된다. 스스로 비추는 신령스런 앎의 성품을 착오 없이 잘 이해한다면, 비로소 오롯한 바탕 위에 온갖 이치의 쓰임을 비추고 살핌에 어떤 법도 통하지 못할 게 없는 것이다.

 

강설) 이 단락은 규봉종밀 스님의 󰡔선원제전집도서󰡕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를 옮겨 적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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