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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새해특집 - 불교와 삶] 디자인

기자명 법보신문
  • 새해특집
  • 입력 2012.01.02 16:50
  • 수정 2012.01.06 17:24
  • 댓글 0

불교 전래와 함께 시작… 경배와 실용의 교차점

예배 대상으로 탄생해
생활 전반에 뿌리 내려

 

수출·성장 시대 거치며
산업디자인과 격차 커져

 

▲불화의 디자인을 의상에 접목시켜 화제가 되었던 이기향 교수의 작품 ‘영취산의 환희’.

일반적 상식의 기준에서 본다면 회화나 조각, 공예, 디자인은 모두 미술의 영역에 속한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회화, 조각 등은 순수미술이고 디자인은 목적미술이라 할 수 있다. 순수미술이 작가 자신의 생각, 사상 등을 표현한다면 디자인은 타인의 주문, 요구에 의해 제작된다는 것이 다르다.


이것은 곧 순수미술(Fine Art) 이외의 모든 것을 실용미술(Practical Art), 즉 오늘날 디자인으로 분류하고는 있으나 둘 다 미술의 카테고리 속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일반적 인식을 종교차원에서 구별한다면 크게 주제(主題)미술과 소재(素材)미술로, 이것을 다시 불교미술로 정리해 본다면 직접 예배나 기도의 대상이 되는 당(堂), 탑(塔), 상(像), 화(畵)를 주제미술이라 할 수 있고 포교용, 장식용, 교육용, 보관용 등 용(用)의 의미가 강한 대상을 소재미술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현대용어로 ‘불교디자인’이라 총칭하는 분야를 뜻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주제미술과 소재미술 즉 디자인 분야는 동시에 발전해 왔다. 삼국시대의 팔관회 꽃장식, 연등, 고려시대의 대장경판, 변상판화 등을 비롯하여 건물의 치장을 위한 단청 그림, 법회 의식에 사용된 의법구, 공양물을 올릴 때 사용했던 여러 가지 공양구, 건물 안팎의 장식을 위한 불단, 천개 등의 장엄구, 승속을 막론하고 개인이 소장하는 염주, 단주, 선화, 묵화, 경전인쇄에 이르기까지 평면과 입체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종류가 지금껏 전승되어 왔다.


따라서 예배나 기도의 직접 대상이 되는 주제미술이나 장엄, 포교, 교육, 수지 등을 위한 소재미술은 그래서 둘이 아닌 하나로 보는 불이(不二)의 대상으로 지난 1700년 동안 함께 발전해 왔다.


현대 디자인은 50년 전 수출무역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 군사정부 18년, 수출만이 살 길이다라고 외치며 ‘수출제일주의’ 정책으로 그 밖의 모든 것은 희생시키고 묻어버린 채 줄기차게 밀고 나간 시절이 있었다. 이때 수출하는 제품의 외형과 제품에 옷을 입히는 디자인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정부가 1966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전람회’를 시작하게 된다.


대학에서도 해방 이후 순수미술에 가려져있던 실용미술(디자인)은 시간이 흐르면서 상업미술, 응용미술, 산업미술, 산업디자인, 문화산업디자인 등, 디자인은 학과명칭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진화하면서 수출제일주의와 더불어 사회적 수용 측면에서  날로 팽창되어 갔다. 1964년 1억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이 ‘77년 100억 달러, ’95년 1천억 달러, 지금은 1조 달러를 바라보게 된 저변에는 디자인 전공자들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2001년 대전 연화사에 봉안된 고현 교수의 감로탱화는 불화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시도로 주목 받았다.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람회도 금년 47회를 맞고 있으며 젊은 디자이너들의 등용문으로 시각, 포장, 제품, 환경, 공예, 패션, 멀티 등 우리나라 전체 산업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거의 세계적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제는 휴대폰, 자동차, 컴퓨터기기 디자인에서 패션, 애니메이션, 멀티영상에 이르기까지 기술 평준화 이후 디자인 경쟁이 국제적 대세가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 창시자이며 불자였던 스티브 잡스의 제품과 우리나라 삼성제품의 법적 공방 중심에 ‘디자인 전쟁’이 핵심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이처럼 디자인 전체가 모든 문화를 OECD국가 수준으로 이끌고 있으나 오직 한 분야만큼은 아직도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이 있다. 본인이 30년이 넘도록 현장을 지켜보고 있지만 굳이 정부가 추천한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성격상 관전을 기피한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수준급 디자이너가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인재들 중에 불교전문 디자인회사나 불교전문 디자이너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현재 우리 불교계의 현실이다.

 

미술·패션·전자·영상 등

전 분야서 불교 소재 각광

 

디자인 인재 양성 인식 부족
전통 계승·창조의 걸림돌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귀가 따갑도록 곤혹스럽게 들어온 말이 있다. 현대(現代)의 불교미술, 불교디자인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과거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 조계사 근방이나 송광사, 불국사 입구에서 파는 불교용품은 서로 무엇이 다른가? 40년 전, 20년 전, 또 지금도 제작되고 있는 불교용품은 그동안 어떻게 달라졌는가? 등…


이런 질문은 결국 ‘불교의 시각물(視覺物)은 과거만 있지 현재가 없다’는 뼈아픈 비판을 뜻하는 말이다. 나는 대학에서 젊은 시절부터 이 분야를 연구해 오고 있지만 아직도 그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들을 수밖에 없는 이 따가운 비판 앞에서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한다.


“불교에 있어 순수와 실용미술, 주제와 소재미술, 불사와 신행미술 그 어느 분야도 조선시대 이후 지난 수 백년 동안 우리의 불교문화는 혼수상태에 있었다. 잃어버린 600여 년을 다시 기억해 내고 새출발하려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해방 이후 지난 60여 년간 삼국의 혼(魂), 고려의 미(美), 조선의 빈(貧)이 비빔밥이 되는 ‘모방과 답습’의 과정, 즉 새로운 대한민국 시대의 불교미술, 불교디자인을 위한 워밍업 시간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나는 변명한다.

 

내가 처음 ‘불교미술 현대화, 불교디자인 개척화’라는 화두를 안고 시작했던 1970년대 말까지도 불교달력에는 쥐, 소, 닭 그림들이 날짜보다 더 선명하게 표현되는 디자인 전무(全無)의 시대였다. 그래도 지금은 인쇄과정을 거쳐 나온 책표지, 달력, 카탈로그, 기념카드, 포스터 등 평면작업은 거의 수준급에 이르렀다. 다만 각종 포교용품, 팬시물, 소형공예품, 장신구, 소지물 등 절대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입체물들은 아직도 한참 더 가야한다. 이말은 불교디자인이 생존할 수 있는 저변 풍토가 다소 보수적이며 열악하다보니 수준급, 정상급 디자이너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또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끝으로 현재에서 미래를 위한 불교디자인 발전을 위해 제작자와 주문자에게 몇 가지 고언을 드리고자 한다.
먼저 제작자 입장에서는 1천만 불자의 1%부터 시작하라 권하고 싶다.


작업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서 99% 불자가 내 작품을 좋아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욕망이나 소유가 아니라 내면 지향적 자아실현(自我實現)의 소망에서 현실을 보아야 한다. 즉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생각으로 내 작업을 좋아해 주는 1%의 고객을 위해 붓을 들어야 한다. 멀리멀리 내다보고 눈 밝은 그 1%를 씨앗삼아 10%정도라도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는 불교 디자인 발전을 위해 이번 생을 잘 살아준 사람이다. 또 5백년, 천년 뒤의 후손들이 대한민국 시절 당신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고 작업에 임한다면 당신은 더욱 반듯하게 산 사람이다.


둘째, 주문자는 ‘흥정, 간섭, 시간’을 내려놓으라 권하고 싶다.


제작비용 때문에 수준급 작가는 피하고 안면이 있거나 소개받은 작가를 찾아가 제작비용을 깎고 또 깎아 흥정을 하게 되면 그 작가도 살기 위해서 결국 제작비용에다 작품 수준을 맞출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 불안하면 맡기지 말고 일단 맡겼으면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상식 수준의 주문자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간섭하면 할수록 주문자 수준의 과거지향으로 돌아가 졸작을 얻게 된다.


또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 할 뿐인데 작업시간을 빠듯하게 잡아주고 행사 일정에 맞춰라, 며칠까지는 납품해라, 날짜 못 지키면 당신 책임이다 등으로 독촉하면 이 또한 시간에다 작품 수준을 맞출 수밖에 없다.


완성된 결과물에 만족할 수 없을 때에는 반드시 위의 세 가지 흥정, 간섭, 시간 중에 어디엔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위의 세 가지가 모두 합해지면 거기서 바로 감동과 멀어진 싸구려 키치(Kitsch)물이 양산되고, 미래가 아닌 과거지향으로 돌아가 불교는 현재가 없다는 비판과 만나게 되고, 40년 전이나, 20년 전,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는 ‘조잡한 불교용품’이 되어 컴퓨터 세대들이 외면한 늙은 종교로 오인될 수밖에 없다.


▲고현 교수
더 이상 모방과 답습이 아닌 2만 달러 소득의 OECD 국가 수준에 맞는 우리의 불교문화를 정상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제대로 대접받는 디자인 전문회사, 불교제품 유통전문회사 등이 젊은 세대들에 의해 세워져야 할 것이다. 향후 많은 후학들이 불교디자인에 관심을 가지리라 확신 하면서 나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고현 조선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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