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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새해특집-불교와 삶] 현대건축

기자명 법보신문
  • 새해특집
  • 입력 2012.01.04 14:16
  • 수정 2012.01.05 21:36
  • 댓글 0

불교는 개방과 탄력의 건축문화 이끌 원천

플라톤 이후의 서양건축은
완전하며 근본적인 것 추구

 

불교는 고정된 방식 벗어나
상대적·관계적 형식 강조

 

 

▲ 서울 목동의 국제선센터. 전통의 현대화가 아닌 현대를 전통화한 것으로 전통형식은 없으나 전통 사찰 건축으로 느껴진다.

 


현대의 주요사상은 세상을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형식으로 본다. 정상과 비정상, 미와 추로 나눌 수 없고 본질이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지층은 불안한 것으로 견고하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유연하고 가벼운 존재들의 장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모습은 불안하고 수평적인 접속 상태로 되어있기에 끝없이 자기 존재를 다양화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인다. 선불교 역시도 초세속적 세계와 세속적 세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삶을 떠나 보다 완전한 세계가 따로 성립해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가(禪家)에서는 ‘평상심이 곧 도’ 이며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지극한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지향한다.
육조 혜능선사는 “어떤 사람이 너에게 유(有)에 대해서 묻거든 무(無)로써 대립하고 무에 대해서 물으면 유로써 대답하며 범(凡)에 대해 물으면 성(聖)으로 대답하고 성에 대해서 물으면 범으로써 대답하라 두말이 상인(相因)하여 중도의(中道義)를 일으킨다.”고 제자들에게 설한 바 있다.


이렇듯 불교는 이 세상에 이데올로기나 가치, 실체 등의 형이상학적이거나 고정된 물리적 실체는 없고 관계적 실체만 있기에,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평상적인 동시에 신성한 삶을 통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적 사유에서도 미추의 구분 이전이거나 그것을 넘어선 지점에서 불완전함이나 졸렬함까지도 포용하는 그대로의 본래적 미에 관심을 두는 이유이다. 그것은 현대 패션이 정장과 함께 짧은 바지나 찢어진 옷 등을 함께 입어 오리지널(Original)이나 위조(Fake)의 구분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생성하고 긍정적인 것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부산물과 쓰레기에도 관심을 가진다. 찌꺼기는 전체적인 과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인식하면서도 핵심인 본성을 파악하며 그렇지 않은 주변부까지도 포용하려 한다. 그러한 형식과 삶은 우월하고 무한한 형식의 추구가 아니다. 변화하고 늘어나는 탄성적 형식으로 생명의 형식이기도 하다. 무에서 출발한 것도 유에서 시작하며 무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처럼 그 시작점과 종착점을 알 수 없는 것으로 즐겁고 활발하게 살아있음을 지향한다.


모든 생명은 최소한의 형식으로 있으면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변혁에 유리한 개별적 독자성을 갖고 있다. 현대 건축도 실체냐 가상이냐 하는 형식적인 것보다는 현실에 대한 이해와 판단으로 현실세계에 참여하고 시공간적 경험과 상상력을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고 환기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 끊임없이 다른 것과 변형되어 드러나고 생략된 최소한의 형식으로 생략을 확충하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을 탄성건축(Elastic Architecture)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소한의 형식을 가진 체계이나 주변과 관계하며 몸부림치고 파동을 일게 하는 것으로 마치 자연의 모습과 같다. 우주의 공간과 만물은 끊임없이 몸부림치면서 불안한 가운데 자신을 생기 있게 한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운동하며 거짓된 진실과 영원한 순간과 세속적인 숭고함으로 가득 차있는 것이다. 현대건축 역시 진동하는 형식에 관심이 많다.


서양의 지식 체계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위계 세우기를 좋아하였다. 분석과 질서의 추구는 어떤 게 가장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되었고, 플라톤은 그것을 현실세계가 아닌 가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데아로 설명하였다. 그것을 비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현실적 삶과 경험 안에서 진리를 찾았으나 가장 좋은 것을 찾기는 매한가지였다. 인간의 생장과정 속에서 있으나 철저히 위계적이고 분류적이고 목적론적이었다. 그들의 사후 중세는 이상을 추구한 플라톤적인 사회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근세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근본적이고 완전한 것을 추구한 서양전통에서 완전한 것이란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그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자신 속에서 모든 것이 완전한 자기 동일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경험적인 것을 넘는 영원하고 완전한 신적 지혜를 통한 자유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자신을 파고들어 더욱 진실한 모습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장점은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불교는 모든 것은 인연의 작용으로 근본적 실체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건축의 형식 역시 고정되고 영원한 건축이 아닌 상대적이고 관계적 형식의 건축을 추구했다. 불교적 삶과 조형의 주요한 특징은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삶과 형식을 강조한다. 자기 스스로에게 보이는 눈을 가지고 표면과 본질을 등가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형태를 무시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형식과 본질을 동시에 드러내는 동시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하는 것을 사랑하고 끝없는 변신과 변혁을 통해 자유로울 수 있는 형식에 관심을 가졌다. 가치나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형식으로 무형상의 형상, 혼재된 무경계, 무위의 대자유등의 특성을 가졌다. 그것들은 있음과 없음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것으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 없는 존재는 형태적으로 물성이 느껴지지 않음으로 더욱 가볍고 투명한 현대적 형식과 연계되어진다. 이는 유와 무의 양 경계를 다가지는 풍부한 공간성으로 물성에 대해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한다. 이쪽저쪽을 넘나들어 흘러가는 주변 형식과 상대적 관계 속에 존재하고 무한한 시간 속에서 관계 맺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서로 스며들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형식들은 오늘날 서양의 현대건축이 추구하는 진동하는 건축, 사라지는 건축, 혹은 초유기체적 건축과도 많은 부분 맥을 같이 한다. 서양의 철학과 불교는 그 시작점과 개념의 전개방식과 결론이 당연히 다르지만 “모든 것은 애매모호하다.”(All is ambiguous)고한 메를리 퐁티나 현대 철학자들의 많은 말은 마치 불교의 경전에서 익히 들어온 것 같다. 공과 색이 동일시되는 불교적 조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혼돈은 만색이지만 비어있는 색으로 동시에 서로가 하나 되는 조화 속에서 발현되는 구조와도 통한다. 구체적이고 제한적이고 한정적인 영원의 형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율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진동하는 건축’ 개념은
비유비무의 불교정신과 상통

 

불교 재해석 이루어질수록
수많은 영감들 배경될 것

 

 

▲ 국제선센터 내부. 빛만이 가득한 평범한 형식인 선방은 공간과 빛이 서로 섞이고 스며든다.(위) 오스트리아 린츠시의 한 종교시설 내부.(아래)

 


현대가 추구하는 속박 없는 자유로운 형식은 ‘화엄경’에서 마치 “허공이 다니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면서 갖가지 위의를 잘 나타내 보이는 것 같고 빛깔도 아니면서 백천가지 빛깔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과 같은, 오래 나아가지도 잠깐 나아가지도 않으면서 절정에 이르게 하는 듯한 비대상적이고 모든 것이 하나의 시공연속체를 이루는 것과 상통한다.


현대의 건축은 형식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 시대로 실체와 가상이 동존하고 상생하며 경계 없이 넘나드는 인식의 확장으로 이룰 수 있는 세계로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하나로 만들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형식으로 서로 섞이고 합해져서 생동의 판타지를 연출하려 한다. 그 속에서 사는 인간의 삶은 풍요롭고 다양한 것은 물론 신비롭기까지 하다.


현대건축의 대표적인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는 “More is More”는 다양한 개별을 인정하고 정해진 주체를 가지지 않는 것을 통해 풍부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만약 불교적 정신을 현대적 조형으로 말해본다면 “Less but More”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존재 본래의 시스템인 최소한의 형식이나 그때그때 변화하고 관계하는 생명의 형식이다. Less이나 More가 되고 More가 되는 순간 그러나 다시 Less가 된다. 그러므로 단단한 형식이 아니라 연약하고 부드러우면서 끊임없이 열려있는 개방적이고 탄력적인 형식이다. 이렇듯 불교의 정신은 현대세계에서도 재해석 되고 무수히 많은 개념들을 생산할 수 있으며 수많은 영감들의 배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방적이고 탄력적인 형식의 현대건축은 다른 것과의 조화로운 관계나 보여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생명의 모습처럼 지배하는 자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불교에 심취하였던 스티브잡스는 말을 함부로 하고 주변을 의식하지 않으며, 예의라고는 있지도 않은 사람처럼 행동한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다. 아마도 잡스에게 그것은 사소한 일이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자세,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강조하는 것은 가치와 기준을 갖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소유와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각기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자기 안으로 흡수하여 온전히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형식과 삶의 태도를 가진 자라 할 수 있다. 자신 안의 가공되지 않은 탄력적 욕구를 그대로 비추며 도전하고 새로운 경험을 맞게 하는 것으로 욕망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욕망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충실히 하는 것으로 자신 속에 있으면서 잡아당기기로 내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형식과 개념을 담보하고 있지만 말하지 않고 가두지 않는 일탈처럼 구조 안에서 자유로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개천 교수

이러한 정신은 현대의 종교가 진리를 따르는 도장이기 보다는 함께 즐거워하고 서로 풍요롭게 소통하며 어려운 주변과 지역사회를 위한 역할을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모든 숭고한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삶과 사랑의 매순간 집착 없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김개천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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