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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새해특집-가족] 이주민 외로움 보듬는 라나씨 가족

  • 새해특집
  • 입력 2012.01.04 16:51
  • 수정 2012.01.0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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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법당엔 언제나 자애로운 고향이 흐릅니다

 

▲ 라나씨 가족은 김포 방글라데시 법당 보타사를 이주민들의 제2의 고향으로 일궈낸 주역이다. 사진은 법당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라나씨 가족과 친구들.

 

 

“아이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많이 춥죠? 어서 들어와요.”


영하로 뚝 떨어진 기온에 전국이 얼어붙은 지난 12월25일, 경기도 김포 양촌리에 위치한 방글라데시 법당 보타사를 찾았다. 옷깃에 묻은 찬 기운을 털어내며 법당에 들어서자 신도회장 바루아 라나(42)씨가 환한 미소로 반긴다. 5평 남짓한 작은 공간은 이미 먼저 온 이주민들로 발디딜틈조차 없다.


왁자지껄 정신없는 분위기에 멈칫한 순간 라나씨의 아내 루파 씨가 달려와 “식사부터 하시라”며 손을 잡아 이끈다. 엄마를 따라나온 딸 은서(8)도 수줍은 웃음으로 꾸벅 인사를 하더니 어느새 옆에 붙어 조잘조잘 말을 붙인다. 가족의 따뜻한 환대에 잠시나마 어색했던 마음이 단박에 풀어진다.


보타사는 재한 방글라데시 이주민 불자들의 마음 속 고향으로 대변된다. 고국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는 신행공간이면서 고향 친구들과 만나 외로움을 달래는 사랑방이기도 하다. 매주 일요일 열리는 법회 동참인원은 최소 30명, 성탄절인 이날은 평소 인원보다 훨씬 많은 수가 법당을 찾았다.


라나씨는 “명절이나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에는 모두들 고향생각이 한층 간절하다”며 “들뜬 분위기에 상대적으로 외롭고 소외감을 느낀 이주민들이 마음 나눌 친구를 찾아 멀리서도 법당을 찾아온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라나·루파씨 부부, 그리고 딸 은서는 특별한 존재다. 보타사의 ‘제1호 이주민가족’이면서, 법당이 처음 문을 연 2005년부터 변함없이 법당을 관리하며 외로움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왔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이주민 불자들에게 보타사가 제2의 고향이라면 이들 가족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따뜻한 위안인 셈이다.


특히 라나씨는 한국에 거주한지 올해로 15년차인 귀화 한국인으로, 방글라데시 이주민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가 유창한 한국말로 문제 해결을 돕는 든든한 후견인 이자 의지처다. 그런가 하면 신심 깊은 불자로서, 지난 2005년 방글라데시 불자들의 신행생활을 위해 법당 설립을 추진한 주역이기도 하다. 2009년 법당이 재정난으로 운영 중단될 위기에도 라나씨의 노력 덕분에 무사회생할 수 있었다. 방글라데시 법당의 역할을 눈여본 불교 인연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조계종의 후원을 받게 된 것. 이후 방글라데시 법당은 ‘조계종 보타사’로 이름을 바꾸고, 김포 용화사를 후견사찰로 지속 운영 중이다. 라나씨는 보타사 신도회장 소임을 맡아 이후 법당 운영은 물론, 여전히 물심양면으로 이주민들을 돕고 있다.


이주민 신행활동 위해 법당 마련


라나씨가 법당 관리와 이주민 상담을 맡고 있다면, 그의 아내 루파씨는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마음을 보듬는 ‘안주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여성 특유의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는 법당을 찾은 이들의 마음을 저절로 움직여 마음을 열게한다.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도 한국생활 9년차 선배로서 경험에 비추어 이주민 여성들이 처한 어려움을 해결하고 한국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김포마하이주민센터 조정술 국장은 “라나·루파씨 부부가 있기에 이주민들이 힘들거나 외롭고 또 기쁜 일이 있을 때 마치 고향을 향하는 마음으로 법당을 찾을 수 있다”며 “특히 방글라데시 불자들이 한국에서 부처님을 잊지 않고 신행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데는 이들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라나씨 부부가 방글라데시 이주민들을 위해 정성을 쏟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지금이야 귀화 한국인으로 그나마 나은 삶을 살고 있지만, 과거 숱하게 겪었던 힘든 경험들은 아직도 생생하다. 때문에 경험을 통해 쌓인 노하우로, 다른 이들의 한국 적응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1998년 한국에 온 라나씨는 학생 신분에 아르바이트를 하다 출입국 관리직원에 잡혀가기도 하고, 공장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하거나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서 장사를 하려다 사기를 당하는 등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 은서까지 키우느라 힘든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루파씨와의 인연도 갑작스레 이어졌다. 2003년 명지대 무역학과에 재학중이던 그는 방학 중 고향을 찾았다가 부모님의 성화로 한달만에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학기 개강에 맞춰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결국 형편이 여의치 않아 휴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2005년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직장을 구했다. 그러나 일을 하던 중 사고를 당해 오른손 중지 첫 번째 마디를 잃었고, 결국 마비증세 때문에 일도 공부도 포기해야 했다.
당시 루파씨도 정략결혼으로 가족과 친구를 떠나 낯선 나라에 덩그러니 내팽겨졌다는 생각에 절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주민이 흔치 않던 시절, 외로움을 달랠 친구하나 없이 오직 남편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했다. “매일매일이 죽고싶을 정도로 힘들었다”며 루파씨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힘든 시절 이들 부부에게 희망을 준 것은 다름 아닌 한국의 스님이었다.


“사실 한국에 처음 올때 한국 교회의 후원으로 왔기 때문에 한국에는 불교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지나다 우연히 부처님을 보고 무작정 찾아 들어간 곳이 해인선원(주지 단암 스님)이었지요. 단암 스님을 뵙고 법문을 듣고 기도하면서 굉장히 마음의 위안을 많이 얻었어요.”


2005년 귀화해 한국 국적 취득


이후 부부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해인선원을 찾아 신행생활을 이어갔다. 단암 스님은 이들 부부를 진심을 다해 챙겨주며 많은 도움을 줬고,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 평생 잊지 못할 감사함으로 남아 있다. 안산 보문선원 전주지 보림 스님과의 인연도 깊다. 스님은 매달 이주민을 위한 무료진료 행사를 열어줬을 뿐 아니라, 당시 기도공간이 없던 방글라데시 불자들을 위해 흔쾌히 법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라나씨는 “감사할 사람이 참 많다”며 “제게 도움을 준 분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면서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고 깊은 감사를 전했다.


2005년 라나씨는 귀화시험을 통해 법적으로 어엿한 한국 사람이 됐다. “한국이 좋고, 한국 사람이 좋아 한국인이 됐다”는 라나씨는 ‘정지성’이라는 한국이름도 가지고 있다. 해인선원 단암 스님이 ‘모든 일을 정성으로 행하고 행하는 일마다 좋은 결실을 얻으라’는 뜻으로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물론 귀화한 후에도 주위의 편견 때문에 상처받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전히 생계가 힘들고, 은서를 키우는 일도 순탄치 않다. 특히 루파씨는 “한국에서 방글라데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딸 은서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 국적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말과 행동이 영락없이 한국 어린이다. 그럼에도 유치원에 다닐 때는 생김새가 친구들과 다르다는 점 때문에 놀림을 많이 당했다고.


“어느 날에는 유치원을 가지 않겠다고 우는 거예요. 서럽게 우는 은서를 보면서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같이 부둥켜안고 울 수밖에 없었어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은서는 방글라데시인이다, 하지만 우리의 국적은 한국이고 한국은 우리의 나라라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기도 했지요.”


그랬던 은서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몰라보게 의젓해졌다. “외국인”이라는 친구들의 놀림에도 당당하게 맞선다. “부모님이 방글라데시 사람이기 때문에 외국인으로 보이지만 나는 분명 한국사람”이라고 외친다.


“한국 사람들은 참 따뜻하고 착해요. 반면 우리 이주민들에 대한 편견은 그 어느 나라보다 심한 것 같아요. 방글라데시 불상과 한국의 불상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속에 담긴 가르침은 같은 것처럼 우리 이주민들도 한국에서 함께하는 이웃으로 편견 없이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나씨 가족의 새해소망이다. 누구보다 밝고 따뜻한 미소를 지닌 이들의 발원이 이뤄질 무렵이면, 140만 이주민이 살고 있다는 한국도 조금씩 진정한 다문화사회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김포=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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