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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하면 글자마다 부스럼, 통했다면 문장마다 묘약

기자명 법보신문

선과 교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한 글귀도 선 아닌 것이 없어
자신의 알음알이에 대한 집착
모두 사라져야 참성품 드러나

 

▲돈황 막고굴 159굴. 북위시대.

 

 

113. 약이 되느냐 병이 되느냐는


 須先約三種佛敎 證三宗禪心然後 禪敎雙忘 佛心俱寂. 俱寂 卽念念皆佛 無一念而非佛心 雙忘 卽句句皆禪 無一句而非禪敎. 如此則自然聞泯絶無寄之說 知是破我執情 聞息妄修心之言 知是斷我習氣. 執情破而眞性顯 卽泯絶是顯性之宗 習氣盡而佛道成 卽修心是成佛之行. 頓漸互顯 空有相成 若能如是圓通 則爲他人說 無非妙方 聞他人說 無非妙藥. 藥之與病 只在執之與通. 故先德云 執則 字字瘡疣 通則 文文妙藥.


모름지기 먼저 세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세 종파의 선심(禪心)을 증득해야 ‘선(禪)’과 ‘교(敎)’에 대한 집착을 잊고, ‘부처님’과 ‘마음’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이 된다.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이 되니, 생각마다 모두 부처님이라, 한 생각도 부처님의 마음 아닌 것이 없다. ‘선(禪)’과‘교(敎)’에 대한 집착이 없으니, 글귀마다 모두 선(禪)이라, 한 글귀도 선(禪)의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고요하고 편안한 마음이 되면 온갖 것을 없애고 부정하는 ‘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의 주장이‘자신의 알음알이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라는 말임을 알게 되고, 망념을 쉬어 마음을 닦는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의 주장은 ‘자신의 잘못된 습기’를 끊으라는 뜻임을 안다. ‘자신의 알음알이에 대한 집착’이 남김없이 사라져야 ‘참성품’이 드러나니 곧 온갖 것을 없애고 부정하는 것이 참성품을 드러내는 데 으뜸가는 방법이요, 잘못된 습기가 다 제거되어야 부처님의 도가 이루어지니 곧 마음을 닦는 것이 부처님이 되는 수행이다.


 ‘돈(頓)’과 ‘점(漸)’의 도리가 서로 드러나고 ‘공(空)’과 ‘유(有)’의 이치가 서로 도와주니, 이처럼 오롯이 통한다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 법이 오묘한 비방 아닌 것이 없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묘약 아닌 게 없다. 약이 되느냐 병이 되느냐는 집착했느냐 아니면 통했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은 “집착하면 글자마다 부스럼이요 통했다면 문장마다 묘약이다.”라고 말한다.


如上依敎依宗 撮略和會 挑抉宗旨之本末 開析法義之差殊 校量頓漸之異同. 融卽眞妄之和合 對會遮表之迴互 褒貶權實之淺深. 可謂 卷敎海之波瀾 湛然掌內 簇義天之星象 奐若目前 則頓釋群疑 豁然妙旨. 若心外立法立境 起鬪諍之端倪 識上變我變人 爲勝負之由漸. 遂乃立空破有 賓有非空 崇敎毁禪 宗禪斥敎. 權實兩道 常爲障礙之因 性相二宗 永作怨讎之見. 皆爲智燈焰短 心鏡光昏 終不能入無諍之門 履一實之道矣.


이처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을 바탕으로 간략하게 요점을 모아 회통시키니, 종지의 큰 줄기와 곁가지를 가려내는 것이고 ‘드러난 법’과 ‘속뜻’의 차이를 분석하며, ‘돈(頓)’과 ‘점(漸)’의 같고 다른 점을 비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진(眞)’과 ‘망(妄)’이 화합하여 하나가 되며, 긍정과 부정의 논리가 서로 자유롭게 펼쳐지는 만남이며, 방편과 실상이 그 이치의 깊고 얕음에 따라 고준하게도 보이고 낮고 가볍게도 보인다.


 이는 바다의 물결처럼 많은 가르침을 손바닥 안에 놓고 즐기며,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광활한 이치가 눈앞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과 같으니, 곧 온갖 의심이 단숨에 풀어져 오묘한 종지에 통한다.
 

만약 마음 밖에 법이나 경계를 내세운다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실마리가 되어 나와 남을 분별하고 집착하여 마침내 말다툼의 원인이 된다. 그 결과 ‘공(空)’을 내세워 ‘유(有)’를 타파하거나 ‘유(有)’에 집착하여 공(空)이 아니라고 하며, 교(敎)를 높여 선(禪)을 헐뜯거나 선(禪)을 으뜸으로 알고 교(敎)를 배척하는 일이 벌어진다. 방편과 실상이란 두 길이 늘 대립하여 서로 걸림돌이 되고 성종(性宗)과 상종(相宗)이 서로 원수처럼 적대시한다. 이들 모두는 지혜의 불빛이 약해지고 마음의 광명이 어두워지는 것이니, 끝내 다툼이 없는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가 한결같은 실상의 도에는 이르지 못한다.


강설) 부처님의 세 가지 가르침 ‘삼교(三敎)’는 밀의의성설상교(密意依性說相敎), 밀의파상현성교(密意破相顯性敎), 현시진심즉성교(顯示眞心卽性敎)를 말하고, 선종의 세 종파 삼종(三宗)은 식망수심종(息妄修心宗), 민절무기종(泯絶無寄宗), 직현심성종(直顯心性宗)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통한 사람은 이들의 가르침이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안다. 삼교와 삼종의 가르침이 다르게 보이지만 모두 부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에 근본적으로는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삼교(三敎)와 삼종(三宗)의 근본이 하나기에 궁극에는 선(禪)이나 교(敎)의 구별도 없는 것이다.


114. ‘반야의 무지’가 아니다


聖心無有取相之知 故云無知 非謂則無眞知也. 何者 般若靈鑒 無種不知 不同太虛 一向無知也. 然則 斷見無知 略明有十一種 論中略言三種. 十一種者 一者太虛 一向空故 二者木石 謂無情故 三者聾瞽 謂根不具 無見聞故. 此上三種 是論所破. 四者 愚癡 謂無智慧 於境不了故 五者 癲狂 惡鬼惑心 失本性故 六者 心亂 境多惑心 不能決斷故. 七者 悶絶 心神闇黑 如死人故 八者 惛醉 爲藥所迷故 九者 睡眠 神識困熟故 十者 無想定 外道伏惑 心想不行故 十一者 滅盡定 二乘住寂 心智止滅故. 此上並是惑倒 非般若無知也.


성인의 마음은 ‘모습을 취하는 앎’이 없으므로 ‘무지(無知)’라고 하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반야의 신령스런 비춤’은 그 무엇이라도 알지 못할 게 없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허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즉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단견무지(斷見無知)’를 간략하게 밝히면 열한 종류가 있는데 󰡔중론󰡕에선 간단히 세 종류만 언급하고 있다. 열한 종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허공 같은 무지’이니 한결같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목석같은 무지’이니 알음알이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귀머거리 눈먼 소경 같은 무지’이니 감각기관을 갖추지 못하여 보고 듣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용수 보살의 󰡔중론󰡕에서 거론하여 타파한 것이다. 넷째는 ‘어리석은 무지’이니 지혜가 없어 경계에서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미치광이 무지’이니 악귀가 마음을 어지럽혀 본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마음이 어지러운 무지’이니 보이는 많은 경계에 마음이 흐트러져 결정을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기절하여 까무러친 무지’이니 마음이 캄캄하여 죽은 사람 같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술 취한 무지’이니 술기운에 어리석어지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잠자는 무지’이니 마음이 곤하게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열째는 ‘아무 생각 없는 선정의 무지[無想定]’이니 외도들이 번뇌를 잠재우기 위하여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열한 번째는 ‘모든 번뇌를 다 없앤 선정의 무지[滅盡定]’이니 성문 연각 같은 이승(二乘)은 공적한 곳에만 머물러 ‘참다운 지혜’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전도된 미혹의 무지’이지 ‘반야의 무지’가 아니다.


강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단견무지(斷見無知)’요 ‘전도된 미혹의 무지’이며, 어떤 대상에 집착하여 ‘모습을 취하는 앎’이다. 성인의 마음은 ‘모습을 취하는 앎’이 아닌 ‘무지(無知)’이니 ‘반야의 무지’요 ‘반야의 신령스런 비춤’이다.


115. 등각에서 묘각으로 들어가는 것


初破無明見佛性 開寶藏顯眞如 名發心住 乃至等覺 無明微薄 智慧轉著 如從初月 至十四日月 光垂圓 闇垂盡. 若人應以佛身得度者 卽八相成道 應以九法界身得度者 以普門示現. 如經廣說 是名分眞菩提 亦名分眞止觀 分眞智斷. 究竟卽菩提者 等覺一轉 入于妙覺. 智光圓滿 不復可增 名菩提果 大涅槃斷 更無可斷 名果果 等覺不通 唯佛能通 過荼無道可說故 名究竟菩提.


처음 무명을 깨트려 불성(佛性)을 환하게 보고 보물 창고를 열어 진여가 드러나면 이를 일러 발심주(發心住)라 하고, 점차 등각(等覺)에 나아가면서 무명이 엷어지며 지혜가 명료해질 것이니, 이는 초승달이 음력 14일이 되면 둥그런 보름달이 되며 어두운 부분이 다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다 부처님의 몸으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으로 도를 이룰 것이고, 구법계(九法界)의 몸으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온 중생계에 그 몸을 나톨 것이니, 이는 경에서 널리 설하듯이 ‘분진보리(分眞菩提)’라 하고 또한 ‘분진지관(分眞止觀)’이나 ‘분진지단(分眞智斷)’이라 한다.


‘구경(究竟’)이 곧 ‘보리’라 하는 것은 ‘등각’에서 ‘묘각(妙覺)’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지혜의 광명이 오롯하여 더 늘어날 것이 없는 것 이를 일러 ‘보리과(菩提果’)라 하고, 번뇌가 끊긴 대열반의 자리에서 다시 더 끊을 번뇌가 없는 것 이를 일러 ‘과과(果果)’라 하니, 등각도 통하지 않는 것이요 오직 부처님만 통할 수 있으며 어떤 언설로도 설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일러 ‘구경보리(究竟菩提)’라 한다.


강설) 구법계(九法界)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의 아홉 세상을 합한 것이니 중생계를 말한다. 분진보리(分眞菩提)․분진지관(分眞止觀)․분진지단(分眞智斷)에서, 분진(分眞)은 중생계에서 드러난 그 현상 자체만의 깨달음만 이해하는 것을 말하고, 보리(菩提)와 지관(止觀)과 지단(智斷)은 깨달음을 뜻한다. ‘다(茶)’는 범어의 끝 글자이다. ‘과다(過茶)’의 뜻은 ‘마지막 글자까지라는 뜻’으로 모든 언설을 다 설했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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