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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난 집의 비유

기자명 법보신문

세종대왕은 홍법위해 노력한 대승보살

며칠 전 여주의 한 사찰 천일기도 회향식에 초청법사로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마침 여주에 온 김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여주는 신륵사와 더불어 세종대왕의 묘인 영릉으로 유명하다. 신륵사는 몇 번 참배한 적이 있는데, 영릉은 기회가 없었기에 이번에 참배하기로 마음먹었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능이다.


세종과 부인 소헌왕후는 불교와의 인연도 각별했다. 특히 소헌왕후가 1446년(세종28년)에 돌아가시자, 세종은 왕후의 명복을 발원하고 백성들의 불교 귀의를 독려하기 위해 둘째 아들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일대기를 쓰게 하는데, 그것이 훈민정음 반포(1446년)후 최초의 한글 작품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지은 ‘석보상절(1447년)’을 세종이 읽고, 부처님의 공덕을 직접 찬불가로 지은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세조5년인 1459년에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하여 ‘월인석보’를 발간한다. ‘월인석보’의 권1 첫머리에 훈민정음 언해본이 최초로 등장한다. ‘석보상절’이나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월인석보’는 한글 연구와 불경번역의 중요한 연구 자료다. 이 속에는 ‘법화경’의 내용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왕이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출가한다는 내용은 ‘법화경 제27 묘장엄왕본사품’의 내용으로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의 중심 내용 중에서도 중요하게 묘사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지상파에서 방영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한글을 창제하려는 세종과 조선 초기 기득권을 주장하며 훈민정음 창제를 막으려는 유생들이 서로 숨 막히는 싸움을 벌이는데, 그 과정이 드라마로 잘 묘사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을 한글이라는 문자를 통한 백성들과의 소통 그리고 문자와 권력이라는 구조로 표현하고 있다. 마치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을 드라마의 형식에 투사하고 있는 듯하다. 드라마에서도 세종은 한글을 창제해 한문을 축으로 하는 사대부 권력의 중심을 일반백성들에게 이동시키고자 한다. 오늘날 정치와 소통이라는 것이 우리사회의 화두이고 SNS를 통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했으니 말이다.


드라마에서는 한글 창제 과정의 핵심 자료로 범어 논서인 ‘비바사론’이 등장하기도 한다. 1448년(세종30년) 7월17일 세종이 승정원에 글을 내린다.


“창덕궁 근처 문소전 담 동쪽에 불당이 하나 있었는데, 계축년(1433년)에 임금의 진영을 옮겨 봉안할 때 허물어 버린 채로 지금까지 복구하지 않았다.…(중략)…문소전 서북쪽 빈터에 불당 하나를 짓고 7명의 승려가 지키게 한다.”


세종이 명한 궐 안 법당(내불당) 건립에 대한 반대 상소가 빗발친다. 한글창제 때보다 더 격렬한 반대였다. 3정승과 6조판서, 성균관 유생들을 비롯해 기득권층의 반대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결국 그 해 8월4일 세종은 결단을 내린다. 거처를 경복궁에서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집으로 옮기고 왕위도 물러나고자[禪位] 한다. 대소신료들이 더 이상 임금의 내불당 공사를 반대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는 8월5일(무오) 사관이 세종실록에 “전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여 훌륭한 덕행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유생들의 관점에서 보면 궐 안에 사찰을 짓는 세종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뒤를 이은 수양대군은 왕이 된 후인 1461년(세조7년) 6월 궐 안에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1463년(세조9년) 자신이 직접 ‘법화경’을 한글로 번역한다.


‘조선불교통사 5권’에 ‘언문자법원출범천(諺文子法源出梵天)’의 품목이 나온다. 곧 훈민정음이 범어에서 유래한 것임을 밝히며, 100여 페이지에 걸쳐 광범위하고도 치밀한 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세종이나 소헌왕후 그리고 그 둘째 아들 세조는 이렇듯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고, 한글 역시 불교와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법화경 제3 비유품’에는 ‘불난 집의 비유’가 있다. 그 비유에서 아버지는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를 이용해 자식들을 불난 집에서 구해낸다. 양과 사슴 수레는 자신과 소수의 사람만이 타고 갈 수 있지만, 소의 수레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행복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양과 사슴의 수레는 소승으로, 소의 수레는 대승으로 표현한다. 세종이야말로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고, 숭유억불의 유교 정치 속에서도 불교의 홍법을 위해서 온몸으로 노력한 진정한 대승의 보살이 아닐까.

 

▲법성 스님
오늘날 같이 일반 서민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따듯이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세종 같은 호법성군이 절실히 그리워지는 것은 결코 나 혼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법화경연구원 법성사 주지 freewheel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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