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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온몸으로 불법 구한 고승들

반쪽 게송을 구하려 칼산에 올라 몸을 던지다

자장은 가시덤불 속에서
맨몸으로 견뎌가며 정진

혜통은 제자 되기 위해
불화로 머리 위에 올려

 

 

▲부처님께서 과거세에 보살행을 실천할 때 제석천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게송 반 구절을 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석천에게 공양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그림은 단양 구인사 설법보전 벽화.

 


구도의 길은 멀고 험하다. 그래도 구도자는 그 길을 갔다. 그리고 오늘도 간다. ‘삼국유사’에는 구도자의 이야기가 유난히 돋보인다. 온몸으로 불법을 구하던 고승들의 이야기는 천년 세월을 넘어 여전히 감동으로 와 닿는다.


자장(慈藏)은 7세기 전반 신라의 고승이다. 그의 젊은 날은 치열했다. 일찍이 두 부모를 여의고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한 그는 처자 곁을 떠나 혼자서 수행에 몰두했다. 그는 그윽하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고골관이란 백골의 모습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자신의 몸에 집착하는 것을 없애기 위한 수행 방법이다. 자장은 작은 집을 지어서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그 속에 발가벗고 앉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가시에 찔리도록 하고서 수행했다.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정신이 혼미하지 않도록 했다. 이처럼 무섭게 수행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 그를 불렀다. 재상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자장이 문벌(門閥) 때문에 물망에 올랐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여러 번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왕이 칙명을 내렸다.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자장이 이 명을 듣고 말했다.
“차라리 계율(戒律)을 지키며 하루를 살지언정, 계율을 어기고 백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왕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바위 사이에 깊이 숨어서 사는 자장에게 양식을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다 바쳐서 이것을 손으로 받아먹었다. 이윽고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었다. 이에 자장이 비로소 골짜기에서 나왔다. 향읍(鄕邑)의 남녀가 다투어 와서 계(戒)를 받았다. 이처럼 자장은 치열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혜통(惠通)은 7세기 후반에 활동한 고승이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무외삼장(無畏三藏)의 문하에서 배움을 청했다. 그러나 무외삼장은 혜통을 제자로 허락하지 않았다.


“동이(東夷)의 신라 사람이 어떻게 불법을 배울 그릇이 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그래도 혜통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부지런히 섬기기를 3년 세월, 그래도 무외삼장은 허락하지 않았다. 혜통은 분하고 애가 탔다. 그래서 그는 뜰에 서서 불화로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조금 후에 정수리가 터졌는데,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듣고 온 삼장이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지면서 신주(神呪)를 외웠다. 곧 상처가 아물고 전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흉터는 남았다. 흉터가 마치 왕자(王字)와 같았기에 왕화상(王和尙)이라고 하고, 그의 구도의 열정을 깊이 인정하여 인결(印訣)을 전했다. 선종의 제2조 혜가(慧可)가 달마대사 앞에서 팔을 잘라 구도의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면, 신라의 혜통은 불화로에 정수리가 터지는 극한의 상황까지 보이면서 구도의 뜻을 표했던 것이다.


무외삼장(637~735)은 동인도 오다국(烏茶國) 출신으로 716년에 중국 장안(長安)으로 와서 국사에 책봉되고 밀교 전파에 공을 세운 고승이다. 혜통이 신라로 귀국했다는 665년에는 무애삼장이 중국으로 오기 전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이 기록에는 연대의 문제가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화로를 머리에 이고 구법의 확고한 뜻을 보여주었다는 혜통의 열렬한 구도심은 여러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당나라에서의 구법을 통해 화엄을 배우고 귀국한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한 것은 문무왕 16년(676), 이 절에서 의상이 화엄의 등불을 밝히자 그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을 들은 한 청년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효도를 마친 후에는 의상 문하로 가서 불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말했다.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도 빠른데 효도를 마친 후라면 늦지 않겠느냐. 오늘로 빨리 떠나도록 하라.”
어머니의 뜻을 어길 수 없어 청년은 그날로 집을 떠나 의상에게 귀의하여 법명을 진정(眞定)이라고 했다. 진정은 의상 십대제자 중의 한 명으로 유명하지만 그 어머니는 더욱 장하다.


진표(眞表)는 8세기 중반의 신라 고승이다. 그는 27세 되던 경덕왕 19년(760)에 변산(邊山)의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가서 3년 동안이나 부지런히 수행했다. 그는 쌀을 쪄서 양식을 만들어 부사의방으로 들어갔다. 부사의방은 전북 부안군 변산에 있었는데, 매우 험한 절벽에 지은 작은 방장이었다. 절벽 위에 있었기에 백 척이나 되는 나무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고, 쇠줄로 집을 얽어 바위에 박아서 기우러지지 않도록 한 특이한 곳이었다. 그는 미륵과 자장 두 성인 앞에서 3년 동안 부지런히 수행했다. 그래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자 그는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때였다. 청의동자(靑衣童子)가 그를 받들어 위로 올려놓았다. 진표는 석단(石壇) 위에 올라가 다시 큰 원을 발하여 3년을 기약하고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행했다. 돌에 몸과 발이 부러져 떨어졌다. 7일이 되던 밤에는 지장보살이 불쌍히 여겨, 손에 금석(金錫)을 흔들면서 와서 가호함에 손과 팔이 전과 같이 되었다. 드디어 가사와 하나의 바루를 주었는데, 진표는 그 영서(靈瑞)에 감동하여 더욱 정진했다. 이날에 천안통(天眼通)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오는 모습을 보았다.

 

진표는 변산 부사의방서
죽을 각오로 치열한 정진


‘반게연구’ 선재동자가
진정한 구도자 이정표

 

 

▲법을 위해 몸을 돌아보지 않았던 진표율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김제 금산사.

 


속리산의 영심(永深)·융종(融宗)·불타(佛陀) 등이 진표를 찾아와 계법(戒法)을 구했다. 그러나 진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에 세 승려가 복숭아나무 위로 올라가서 거꾸로 땅에 떨어지면서 용감하게 참회했더니, 진표는 그때야 교를 전하며 수기(授記)했다. 영심 등은 속리산으로 가서 절을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이 소식은 팔공산(八公山)의 심지(心地)에게까지 전해졌다. 심지는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 809~826)의 왕자로 출가하여 팔공산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 법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속리산으로 갔다. 그러나 이미 날짜가 지나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심지는 땅에 앉아서 마당을 치면서 신도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7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다. 그러나 심지가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그가 법당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그는 거짓 병을 칭탁하고 방 안에 물러 앉아 당을 향해 조용히 예배했다.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가 선계산(仙溪山)에서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는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매일 와서 위문했다.
원효는 말했다.


“반게(半偈)를 구하기 위해서는 골수(骨髓)가 이지러지는 것도 돌보지 않는다.”
이는 곧 반 게송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반게연구(半偈捐軀)를 두고 한 말이다. 부처님께서 과거세에 보살행을 실천할 때 제석천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게송 반 구절을 듣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석천에게 공양하기로 약속한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열반경’ 성행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처님께서 과거세에 바라문이 되어 설산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제석천은 이 바라문을 시험하고자 했다. 제석천이 흉악한 나찰로 변해서 설산으로 갔다. 한 바라문 앞에서 과거세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송 절반을 외웠다.
“모든 현상은 무상하니, 생겨났다가는 없어지는 법(諸行無常 是生滅法).”


게송을 들은 바라문이 대단히 기쁜 마음으로 나찰에게 물었다. 이 게송을 어디에서 들었는가라고. 그러나 나찰은 자기는 배가 고파서 헛소리를 한 것이라고 했다. 바라문은 나머지 반 게를 말해주면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 나찰은 말했다. 자신은 배가 고프고, 자신이 먹는 것은 사람의 더운 살과 피라고. 바라문은 나머지 반 게를 마저 말해주면 자신의 몸을 공양하겠다고 했다. 이에 나찰이 게송을 말했다.


“생겨났다가 소멸하는 법이 없어지고 나면 고요하여 즐거우리라.(生滅滅已 寂滅爲樂)”
바라문은 이 게송을 듣고 깊이 명심하고 각처의 돌과 나무 등에 이 게송을 써 놓고 자신의 몸을 던져 나찰에게 공양하려 하였다. 나찰이 본래의 제석천 모습으로 돌아가 바라문의 몸을 받아 내려놓고 미래에 반드시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을 것이니, 그때 자신을 제도해 달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반 게송을 위해 몸을 버린 인연으로 12겁을 초월하여 미륵보살보다 먼저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

 

선재동자가 바라문에게 아뢰었다.


“대성이시여. 저는 이전에 아누다라삼막삼보리심을 내었지만 아직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는지 알지 못합니다. 원컨대, 저를 위해 설해주십시오.”


“선남자여. 그대가 만약 이 칼산에 능히 올라 불구덩이에 몸을 던진다면 보살의 모든 행이 남김없이 청정해 질 것이다.”


▲ 김상현 교수
선재동자는 곧 칼산에 올라가 불더미에 몸을 던졌다. 칼산과 불더미에 몸이 닿을 때 선재동자는 안온하고 즐거웠다. 칼산에 올라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는 선재동자야말로 진정한 구도자의 자세다.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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