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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과 세간 차별 없으니 세간 머물면서 허공에 머문다

기자명 법보신문

지혜가 환인 줄 알고 업도 환인 줄 알면
환 같은 지혜를 일으켜 피안에 도달한다
모든 여래가 환 같은 지혜에 있음으로써
여래의 마음이 항상 평등한 것과 같다

118. 세간이 다 ‘환’ 같은 줄 아니

 

 

돈황 막고굴 401굴. 공양보살 당나라초기

 


華嚴經 云. 佛子 如羅睺阿脩羅王 本身長七百由旬 化形長十六萬八千由旬 於大海中 出其半身 與須彌山 而正齊等. 佛子 彼阿脩羅王 雖化其身 長十六萬八千由旬 然亦不壞本身之相 諸蘊界處 悉皆如本. 心不錯亂 不於變化身 而作他想 於其本身 生非己想. 本受生身 恆受諸樂 化身常現種種自在神通威力. 佛子 阿脩羅王 有貪恚癡 具足憍慢 尙能如是變現其身 何況菩薩摩訶薩 能深了達心法如幻.


‘화엄경’에서 말한다.
불자여, 라후아수라왕은 키가 700유순이며 신통으로 변화한 모습은 168,000유순인데 큰 바다에서 내놓은 절반의 몸이 수미산과 같다. 불자여, 아수라왕이 몸을 늘여 168,000유순이더라도 본래의 몸을 망가뜨리고 다른 모습으로 변한 것이 아니기에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가 다 본디 몸과 같았다. 마음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므로 변화된 몸에서 다른 몸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본래의 몸에서 자기 몸이 아니라는 생각도 내지 않았다. 본디 받은 몸으로 늘 온갖 즐거움을 받고 변화된 몸에서도 항상 온갖 자유자재한 신통 위력을 나타내었다. 불자여, 아수라왕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남아있어 교만한데도 이처럼 몸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어찌 하물며 보살마하살이 마음의 법이 환(幻)인 줄 깊이 통달한 자리에서 무엇을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一切世間 皆悉如夢 一切諸佛 出興於世 皆如影像 一切世界 猶如變化 言語音聲 悉皆如響 見如實法 以如實法而爲其身. 知一切法本性淸淨 了知身心無有實體 其身普住無量境界 以佛智慧廣大光明 淨修一切菩提之行. 乃至 如有幻師 隨於一處 作諸幻術 不以幻地故壞於本地 不以幻日故壞於本日. 菩薩摩訶薩 亦復如是 於無國土現有國土 於有國土現無國土 於有衆生現無衆生 於無衆生現有衆生 無色現色 色現無色 初不亂後 後不亂初. 菩薩了知一切世法 悉亦如是 同於幻化.


모든 세간이 다 꿈과 같고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도 그림자와 같으며, 모든 세계도 변하는 허깨비와 같고 온갖 언어와 음성이 모두 메아리와 같기에 실다운 법을 보고 여실한 법으로써 그의 몸을 삼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본래 성품이 맑고 깨끗한 줄 알고 몸과 마음에 실체가 없음을 분명히 알기에, 그의 몸은 두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계에 머물러 부처님의 지혜 광명으로 모든 깨달음을 깨끗하게 닦아나간다. 이는 마술을 부리는 사람이 한 장소에서 온갖 마술을 부리지만 마술로써 그 장소마저 없애버리는 것이 아님과 같고, 마술로 나타난 태양으로써 본래의 태양을 없애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으니, 국토가 없는 데서 국토를 나타내고 국토가 있는 데서 국토가 없음을 드러내며, 중생이 있는 데서 중생이 없음을 나타내고 중생이 없는 데서 중생이 있음을 드러내며, 색이 없는 데서 색을 나타내고 색이 있는 데서 색이 없음을 드러내니, 그 처음 본질인 바탕이 뒤에 나타난 현상을 어지럽히지도 않고 뒤에 나타난 현상이 처음 본질인 바탕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보살은 이처럼 온갖 세간의 법이 다 허깨비처럼 드러난 것임을 안다.


知法幻故 知智幻 知智幻故 知業幻 知智幻業幻已 起於幻智. 觀一切業 如世幻者 不於處外而現其幻 亦不於幻外而有其處. 菩薩摩訶薩 亦復如是 不於虛空外入世間 亦不於世間外入虛空. 何以故 虛空世間無差別故 住於世間 亦住虛空. 菩薩摩訶薩 於虛空中 能見能修 一切世間 種種差別 妙莊嚴業 於一念頃 悉能了知 無數世界 若成若壞 亦知諸劫相續次第 能於一念 現無數劫 亦不令其一念廣大. 菩薩摩訶薩 得不思議解脫幻智 到於彼岸 住於幻際 入世幻數 思惟諸法 悉皆如幻.


법(法)이 환(幻)인 줄을 알고 있으므로 지혜가 ‘환’인 줄 알고, 지혜가 ‘환’인 줄 알고 있으므로 업(業)도 ‘환’인 줄 알며, 이미 지혜와 업도 ‘환’인 줄 알고 있기에 ‘환’ 같은 지혜를 일으킨다. 모든 업을 세상의 환처럼 보는 사람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떠나 ‘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환’을 떠난 현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으니, 허공에서 세간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세간에서 허공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허공과 세간에 차별이 없으므로 세간에 머물면서 또한 허공에도 머물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허공 속에서 모든 세간의 온갖 차별과 미묘한 장엄을 보고 닦을 수 있기에, 한 생각에 무수한 세계가 만들어지거나 허물어지는 것을 다 알 수 있다. 또한 모든 시간의 흐름과 관계를 알기에 한 생각이 영원이지만 그 한 생각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보살마하살은 불가사의 해탈인 ‘환 같은 지혜’를 얻어 피안에 도달하니, ‘허깨비 같은 세월’에 머물며 세상의 허깨비 같은 인연에 들어가 온갖 법이 다 ‘환과 같음’을 두루 생각한다.


不違幻世 盡於幻智 了知三世 與幻無別 決定通達 心無邊際 如諸如來 住如幻智 其心平等. 菩薩摩訶薩 亦復如是 知諸世間皆悉如幻 於一切處 皆無所著 無有我所. 如彼幻師 作諸幻事 雖不與彼幻事同住 而於幻事 亦無迷惑. 菩薩摩訶薩 亦復如是 知一切法 到於彼岸 心不計我能入於法 亦不於法而有錯亂.


허깨비 같은 세간을 거스르지 않고 ‘환 같은 지혜’를 다하여, 삼세도 환과 다름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반드시 마음에 그 끝이 없음을 통달할 것이니, 이는 모든 여래가 ‘환 같은 지혜’에 머물러 그 마음이 평등한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이 모든 세간이 다 ‘환’ 같은 줄 아니, 어떤 것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내 것’이라 할 게 없다. 이는 마술사가 온갖 마술을 부리기에 마술에 속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도 이처럼 모든 법을 알고 부처님의 세상에 도달하지만, 내가 법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또한 법에서 마음이 어지럽혀지지도 않는다.


강설) 라후아수라(羅阿修羅)는 네 종류 아수라왕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아수라이다. ‘라후라’는 해와 달의 빛을 어둡게 할 수 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아수라[非神]는 본래 선량했으나 거만해 영생불사의 감로수를 놓고 수라[神]와 싸우게 된다. 이 때 라후아수라는 신으로 위장해서 감로수를 훔쳐 먹다가 해와 달이 이를 일러바쳐 목이 잘리게 되었다. 그러나 감로수를 마셨기에 얼굴만 살아서 원한을 품고 그때부터 해와 달을 잡아먹게 되어 해와 달이 어둡게 되는 일식과 월식이 생겼다고 한다. 유순(由旬)은 길이를 재는 단위인데 여러 가지 이설이 있지만 ‘대당서역기’에서는 1유순을 40리(약15㎞)로 보고 있다.


119. 이법계(理法界)를 깨닫는 다섯 가지 길


略明 無分別智 證理法界 以爲五門. 一能所歷然. 謂以無分別智 證無差別理 如日合空. 雖不可分 而日非空 空非日光. 二能所無二. 以知一切法 卽心自性 以卽體之智 還照心體. 擧一全收 擧理收智 智非理外 擧智收理 智體卽寂. 如一明珠 珠自有光 光還照珠. 三能所俱泯. 由智卽理 故智非智 以全同理 無自體故. 由理卽智 故理非理 以全同智 無自立故. 如波卽水 動相便虛 如水卽波 靜相亦隱. 動靜兩亡 性相齊離. 四存泯無礙. 離相離性 則能所雙泯 不壞性相 能所歷然. 如波與水 雖動靜兩亡 不壞波濕. 五擧一全收. 上列四門 欲彰義異 理旣融攝 曾無二原. 如海一滴 具百川味.


간단히 ‘분별이 없는 지혜’로 이법계(理法界)를 깨닫는 다섯 가지 길을 밝힌다.
첫째는 ‘능(能)과 소(所)가 뚜렷한 길’이다. ‘분별이 없는 지혜’로 ‘차별이 없는 이치’를 증득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마치 햇살이 허공과 하나로 된 것과 같다. 나눌 수 없더라도 햇살이 허공은 아니요 허공도 햇살이 아니다.


둘째는 ‘능(能) 소(所)로 나누어질 게 없는 길’이다. 모든 법이 마음의 자성인 줄 앎으로써, ‘바탕 그대로의 지혜’를 돌이켜 그 빛으로 ‘마음 바탕’을 비추는 것을 말한다. 하나로 전체를 거두기에 이치로 지혜를 거두니 지혜가 이치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 지혜로 이치를 거두니 ‘지혜의 바탕’이 고요하다. 이는 밝은 구슬이 자체에 빛이 있어 그 빛이 도리어 구슬을 비추는 것과 같다.


셋째는 ‘능(能)과 소(所)가 모두 사라지는 길’이다. 지혜가 이치가 됨으로서 지혜가 지혜 아니니, 완전히 이치가 됨으로써 스스로의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이치가 지혜가 됨으로서 이치가 이치 아니니, 완전히 지혜가 됨으로써 이치만 스스로 내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파도가 물이 되니 움직이는 모습이 없어지고, 물이 파도가 되니 고요한 모습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가지 모습이 사라지니 성(性)과 상(相)을 함께 벗어난다.


넷째는 ‘능(能)과 소(所)가 존재하고 사라짐에 걸림이 없는 길’이다. 상(相)을 떠나고 성(性)을 떠나면 능(能)와 소(所)가 모두 사라지고, 성(性)과 상(相)을 그대로 인정하니 능(能)와 소(所)가 뚜렷한 것을 말한다. 이는 파도와 물의 관계에서, 움직이는 모습과 고요한 모습이 사라지더라도 축축한 기운을 없애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다섯째는 ‘하나로 전체를 거두는 길’이다. 나열한 네 가지 길에서 이치가 다른 것을 드러내려고 하였지만, 그 이치가 하나로 녹아 다를 것이 없었으니, 이는 바닷물 한 방울에 온갖 강물 맛이 들어있는 것과 같다.


강설) ‘분별이 없는 지혜’로 이법계(理法界)를 깨닫는 다섯 가지 길로 나누어 놓았지만 그 이치는 본래 하나이니 다를 것이 없다. 근본을 알면 모든 것이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은 “모두 본디 하나의 마음이니 온갖 법에 통한다.”라고 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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