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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장 도일 스님

오직 계를 스승 삼는 냉철한 신행인 돼야

 

▲도일 스님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신앙이 아닌 신행(信行)이 중심입니다. 맹목적으로 믿을 수도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그렇다고 인정하면 그것이 믿음이 되어 자기 인생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이죠. 그런데 신행은 믿음의 바탕 위에 우리가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이해하고 난 뒤에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신행은 보다 냉철하다고 할까, 이성적이라고 할까. 신행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동해야 되기 때문에 맹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를 신행하는 것이 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옛날 스님들이 한 말 중에 ‘불법문중에 인정이라고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의 법칙을 보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주가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겨울이면 눈도 좀 덜 오고 따뜻하기를 바라고 여름엔 폭우가 쏟아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천지의 이치는 그렇지 않고 냉정합니다. 우주의 법칙은 우리의 인정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습니다. 그런 우주의 이치를 설명하고 규명하는 것이 과학인데 그 과학조차 포섭하고 있는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인정을 바라기 보다는 우주이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불교가 냉정한 것 같아도 사실은 냉정한 게 아니고 우주의 이치를 이해함에 따라 속에서 깨달은 삶을 얻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주의 원래 이치가 이렇구나 하는 것을 이해한 사람은 인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멘토’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지도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나의 멘토는 누구다…. 그런데 진짜 멘토는 누구겠습니까?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절에 와서 법문 듣고 공부하면서도 부처님이 진정한 멘토라는 생각을 잘 안합니다.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 삼계에 으뜸가는 멘토이시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입멸하실 때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입멸하시면 이 세상에 해와 달이 없어지는 것과 같은데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며 삽니까? 누구를 스승으로 받듭니까?”
그 당시 가섭존자 등 훌륭한 제자들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누구를 의지해서 살라는 말은 안하시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여기에는 큰 뜻이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을 지목해서 그 사람을 스승 삼으라는 말씀을 안 하시고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셨을까요? 왜 사람이 아닌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느냐? 사람은 어느 상황이 되면 마음이 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모시다가 그분이 돌아가시면 제자들은 망연자실해서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모르고 그 단체도 와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계는 훌륭한 사회적 도덕률


재가신도는 오계(五戒)를 스승으로 삼으면 됩니다. 오계는 사회적으로도 아주 훌륭한 모럴(도덕률)이 될 수 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가도 변하지 않는 모럴입니다. 불자로서 훌륭하게 행동할 수 있지만, 사회인으로서도 오계를 잘 지키면 존경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가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입멸하시기 전 말씀하신 네 가지 가르침 중 아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되는가를 여쭈니 계를 스승으로 삼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핵심은 계가 스승이 되어야 한다 입니다. 우리의 멘토는 뭡니까, 계율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삼귀의도 사실은 우리의 멘토입니다. 불·법·승 삼보는 우리의 영원한 스승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것은 계율이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있으면 물을 곳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자리가 바로 삼보입니다.


삼귀의계가 사실은 가장 기본이 되는 계입니다.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할 때 삼귀의계가 기본이 됩니다. 그런데 원래 삼귀의계는 없었습니다. 그냥 삼귀의만 있었습니다. 계라고 붙인 것은 중국 수나라 때 계를 뒤에 붙이고 이를 계율처럼 지켜야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그냥 불·법·승 삼보에 귀의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계가 붙고, 안 붙고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불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삼귀의를 해야 되니까 그렇습니다. 삼귀의를 않으면 불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로 축복받은 멘토가 있는 분들입니다. 이 세상에 삼보, 오계만큼 훌륭한 멘토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깊이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중요한 멘토인지 모른 것입니다.


그러면 삼보에 대해 조금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삼보의 종류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체삼보(理體三寶)’라 해서 진리의 몸이라는 뜻입니다. 원 부처님,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노사나불이 되는 분이 우주의 근본인데 우주의 근본을 이체삼보의 불보(佛寶)로 삼습니다. 그 다음 법은, 위없는 우주의 삼라만상의 이치를 법보(法寶)로 삼습니다. 경전에 설해진 것 외의 근본 이치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다음 승은, 이 세상의 모든 공덕을 승보(僧寶)로 삼습니다. 이건 근본적인 이론입니다.


모든 세상 이치 밝힐 수 있어


그런데 이것이 중생의 눈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 이치를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화상삼보(化相三寶)’라고 합니다. 근본이치에서 변화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화상삼보에서 불보는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진리의 모습으로 그대로 나타나기 어려우니까 사람 몸으로 오신 거예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석가족의 이름을 빌려서 오신 거예요. 변화해서 오신 분이라 화(化)자를 씁니다. 법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인연 등등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 화상삼보에서의 법보입니다. 승은, 성문 연각 등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리불존자 등등 부처님 당시에 수행하던 스님들이 화상삼보에서의 승보입니다.


그분들은 세월을 못 이기잖아요. 우리는 무언가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분들이 가시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래서 그 뒤에 사리탑도 만들고 부처님 전생담도 만들고 조각도 만들어 순례 오는 사람들에게 설명도 하고 이리 된 거죠. 처음에는 부처님의 발바닥 표시라든지 보리수나무를 부처님 대신으로 새겨서 거기에 예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부처님 모습을 그대로 만들게 되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여 전에 간다라 지역에서부터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그 당시 불상들은 우아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을 닮은 조각에 예배를 하는 것을 ‘주지삼보(住持三寶)’라고 합니다. ‘주지’는 머무르고 있다, 현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화상삼보의 불보는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는 나무나 돌로 불상을 새겨서 거기에 예배하는 불보로 삼습니다. 그리고 법은 팔만대장경을 법보로 삼습니다.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스님들을 승보로 삼는 것입니다.


삼보의 종류 중 마지막은 ‘일체삼보(一體三寶)’입니다. 이것은 앞에 나온 세 가지 삼보를 모두 합하여 이르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현재에 살아있는 승가에 예배를 하는 것이 삼보에 예배를 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삼보도 이렇게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면 우리의 귀의 대상이 왜 삼보인지가 드러나게 되죠.


그런데 삼보 중에서 불보가 가장 중요하죠.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원력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보살들도 원력으로 살지만 부처님께서 이 세상 오실 때도 원력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에 이르길, ‘부처님께서는 오직 이 일 뿐이시니 그 일이란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다’ 했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을 외아들 보시듯 본다’ 했습니다. 한 사람도 버리지 않습니다. 나를 따르고 믿는 사람만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전혀 관계없는 중생도 외아들처럼 보아서 구제해주겠다는 것이 부처님의 대원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분에게 예배 공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대원력을 세운 분이 우리 인류 상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인류는 큰 축복을 받은 것이죠.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공덕 중 또 하나 큰 것은, 이 세상의 이치를 하나도 숨기지 않고 말씀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팔만사천이나 되는 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이 탐구하지 않을 뿐이지 답은 다 있습니다.


이천 오백 년 전에 부처님은 모두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두려움과 암흑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두려울 뿐이지 인생의 근본을 알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밝혀내면 밝혀지는 것이 인생의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을 무명이라 한 것입니다. 무명의 반대말은 깨달음입니다.


밝으면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천 년 동안 어둠이 내린 방이라도 한 순간 불을 켜면 천 년 동안의 어둠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지혜를 밝히는 순간, 아무리 오래된 무명 번뇌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신행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맹목적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냉철한 정신력과 판단력으로 종교를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도 좋고 앞으로 우리 인류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2월5일 봉은사에서 열린 선교율대법회 법문은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도일 스님

1973년 양산 미타암에 입산, 1975년 통도사에서 득도했다. 태국 왕립 마하출라롱콘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학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현 조계총림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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