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불교는 무슨 힘으로 움직여가는가?
갑자기 이런 엉뚱한 물음을 던지는 이유가 있다. 불자를 움직여가고 불교를 움직여가는 적극적인 힘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걱정 때문이다. 불교를 알리는 홍보물이나 불교 언론들에 주로 등장하는 문구나 단어들을 검색해 보면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불교와 관련하여 검색되는 주된 문구나 단어들은 아직도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현대사회의 소외문제, 물질문명의 폐해, 욕망을 떨쳐라, 마음을 닦아라….
소외문제를 논하는 것은 좋지만 소외가 발생하는 근본 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의 폐해도 마찬가지다. 물질을 폄하하기만 해서는 어떤 해결책도 나올 수가 없다. 욕망을 떨쳐라. 그럼 무슨 힘으로 살아간다는 말인가? 욕망을 대체해서 우리 삶을 이끌고 갈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 마음을 닦아라.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왜 마음을 그렇게 상대화 하는가? 왜 세상의 문제를 꼭 마음으로만 끌어들이려 하는가? 마음의 문제를 세상으로 가져가면 왜 안 되는가?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 불교가 가진 문제점들이 어느 정도 파악된다. 이 세상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고, 불자 개인을 적극적인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는 기제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부분 현실을 부정하기만 하고, 그것들에 적극적으로 맞서거나 새로운 지향점을 향해 나가려 하는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불교는 영원히 세상의 뒷전에 서는 사람들의 종교일 뿐이며, 불교는 앞서서 세상을 이끌고 나가는 종교가 아니라 세상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의 뒤처리를 하는 종교에 머물고 말 것이다.
결국 불교는 믿는 이들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게 하거나, 도피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냉소를 보내는 사람들로 만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일은 불교와 관련 없이 세상의 논리로 살고, 절에 와서만 불자로 사는 이중적인 사람들의 모임이 될 것이다.
하루 빨리 이러한 불교의 모습이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가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 불국토를 펼쳐가는 종교가 되기 위해서, 불자들이 이 세상을 바꾸어 가는 주역으로 힘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불교의 퇴영적이고 수구적인 모습을 하루 빨리 혁파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시급히 서둘러야 할 일은 바로 서원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앞에서 “불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물음에 불자들이 서슴없이 “나는 서원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이 땅에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이상을 향해 나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홍서원이 있고, 모든 법회에서 사홍서원을 마무리 의식으로 삼고 있다는 것으로 변명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의례적으로 하는 사홍서원은 누구의 서원도 아닐 가능성이 많다. 우리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 사홍서원의 구체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먼 당신의 서원일 뿐이다. 우리 주변에 괴로워하는 어떤 중생을 어떻게 구제해 가겠다는, 내 가장 괴로운 번뇌를 어떻게 끊어 가겠다는, 나날의 삶 속에서 어떻게 불법을 배워 가겠다는, 불도를 이룩하기 위한 수행을 어떤 방편을 통해 어떻게 실천해 나가겠다는 구체화된 서원이 서야 한다. 직업에 따라 환경에 따라 불법에 부응하는 건강한 목표를 세우려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런 힘들이 모여 불국토 건설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나가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종단이 가장 서둘러야 할 것은 불자들이 건강한 서원의 힘으로 살아가게끔 하는 일이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서원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에 맞는 진실성 있는 서원 세우기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 발원법회 등 여러 가지 포교 방법을 활성화시켜 모든 불자들이 진실한 자신의 서원을 세우게 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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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용 교수 tysu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