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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문자선(文字禪)-下

기자명 윤창화

문자선 오해해 아예 책 보지 말라는 건 무지
소가 마신 물 우유 되듯 지혜롭게 쓰면 양약

‘문자선’이라고 한다면 그 범위는 매우 넓다. 직접적인 의미, 비판적인 의미로는 참선은 하지 않고 언어문자, 또는 이론적, 학문적으로만 선을 탐구하는 것을 가리키고, 넓은 의미로는 선어록이나 공안에 대한 해석 및 주석, 풀이도 모두 문자선에 속한다.


또 오늘날 선(禪)과 관련 글이나 논문 등도 모두 문자선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제록’, ‘벽암록’, ‘무문관’ 등 선어록도 모두 문자선이다.


간화선의 거장 대혜 선사는 문자선 비판의 최전방에 있었지만, 무려 30여 권에 달하는 어록을 남겼다(대혜보각선사어록 30권). 그는 고칙, 공안에 대해서도 가장 많은 게송과 착어를 붙였는데 그 책이 ‘정법안장’이다.


선승들이 문자선에 대하여 주의를 주는 것은 문자의 표면적인 뜻에 착(着, 집착, 매달림)한 나머지 문자 이면의 진정한 메시지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납자들 가운데는 문자선을 오해하여 아예 글자를 경시, 도외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결과 스스로 무식을 자초하여 한문 한 줄도 읽지 못하는 눈먼 맹선(盲禪)이 되어 버린다. 문자를 알되 너무 거기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되고, 또 선어(禪語)의 분명한 뜻을 확실하게 알면 되는데, 문자를 원수로 여긴 나머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속담을 어김없이 실천해 버렸으니, 이야말로 어리석음이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수행의 목적은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여 반야지혜를 성취하자는 것인데, 어리석음(무지)을 얼싸안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무사(無事)’란 ‘심중무일사(心中無一事)’의 준말로서, 일생사를 다해 마친 사람, 깨달음을 이루어서 더 이상 해야 할 과제가 없는 사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사람(無學)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을 착각하여 아무런 생각도, 의식도 없이 조용한 곳에서 한가하게 지내는 것이 ‘무사’라고 착각한다거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을 착각하여 날마다 빈둥빈둥 세월만 죽인다면 이야말로 무식의 성찬이 아닐 수 없다.


참선수행에서 교학적 이론적 바탕은 필수이다. 선(禪) 역시 ‘화엄경’, ‘유마경’, ‘금강경’, ‘열반경’, ‘대승기신론’ 등 대승경전과 논서를 바탕으로 이론과 수행체계가 정립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론적 체계를 바탕으로 법문을 하고 납자들을 교육시키는데, 경전을 보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순으로 혜안을 갖춘 선승이라고 할 수 없다.


좌선당에서만 보지 말라는 것이고, 또 경전을 보되 거기에 매달려 진실을 보지 못한다거나 실참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깊이 각인시켜 주면 되는데, 애시당초 보지 말라고 한다면 무지한 선지식이다. 수행자들을 망치고 있는데 이것을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 한 명의 맹인이 많은 맹인을 이끌고 구렁으로 간다)이라고 한다.


선 수행 역시 참선에 대한 지식과 교학적 이해가 없으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정(正)과 사(邪)를 구분하지 못한다. 자신은 분명히 정도(正道)를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사도(邪道)를 걷는 이가 적지 않다. 상당한 수행자가 도교적인 기공이나 단전호흡, 또는 타심통 같은 것을 기대하는데, 모두 무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간화선의 교과서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대혜종고의 ‘서장(書狀)’과 무문혜개의 ‘무문관’이다. 그런데 이 두 선서(禪書) 중 하나라도 읽고 화두를 참구하는 납자는 3할도 안 된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는 경전의 말씀과 같이, 수행은 하지 않고 문자나 익혀서 지식이나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 아는 척, 깨달은 척 하는 사람에겐 독이 되지만, 지혜로운 이가 쓰면 더없는 양약이 된다. 정견을 갖추자면 경전과 선어록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윤창화
무엇이든 역기능과 순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장점을 활용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문자를 보지 말라고 극구 비판했던 선승치고 경전에 통달하지 않은 선승이 없다는 것이다.
 

윤창화 changhwa9@hanmail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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