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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말·행이 일치하면 충돌 사라지고 평온해져

  • 집중취재
  • 입력 2012.03.08 09:36
  • 수정 2012.03.0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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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태종사 조실 도성 스님

화두 들었어도 심적 변화 없어
남방가사 입고 팔리어 경전공부

 

8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 수행
09년 한국테라와다 ‘승왕’ 추대

 

 

▲ 도성 스님

 

 

바람에 묻어 전해오는 솔잎 향이 싱그럽다. 기암괴석을 스쳐 지나 온 바람이 머문 숲이기에 향은 더 깊다. 산천을 유람하던 신라 태종 무열왕이 이곳에 머물며 휴식을 취한 연유도 숲에 이는 바람이 청량해서일 것이다.


부산 영도 남단에 위치한 태종대(太宗臺) 유원지 품에 태종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중에게는 ‘수국 산사’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인도를 비롯해 네덜란드, 일본, 스리랑카, 태국,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의 수국이 산사 경내 곳곳에 심어져 있으니, 7월이면 태종사는 ‘수국정토’로 변모한다. 하지만 태종사의 진면목은 수국에 있지 않다. 수국은 장엄일 뿐이다.


혹 태종사 조석예불 때 대웅전을 지난 적이 있다면 한번쯤 낯선 소리에 이끌려 귀를 기울여 보았을 것이다.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가 흘러나오는데 그 언어는 다름 아닌 팔리어. 태종사는 지금도 조석예불을 팔리어로 올린다. 위빠사나 전문수행 도량 태종사를 창건한 스님은 세납 94세의 도성 스님이다. 어떤 의문이 일어서 걸음을 재촉한 건 아니다. 그저 친견하고 싶었다. 절에서 보낸 세월만도 60년. 노송 아래 앉아 쉬듯, 그렇게 스님 곁에 앉아 도란도란 옛날이야기 한 토막 듣고 싶어서였다.


놀랍게도 스님은 90을 넘긴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해 보였다. 인터뷰 요청을 쾌히 승낙해 준데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일언이 떨어졌다. “대중이 법을 묻겠다는데 자리를 마련해야지요.” 언제든, 그 누구든 마다하지 않고 만나겠다는, 아니 만나야 한다는 의미가 배어 있다. “스님은 법을 펴는 사람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지요. 스님에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큰 스님 문턱이 너무 높다’는 말이 회자되는 풍토에 일침을 가하는 일언이기도 하다.


사실, 도성 스님은 해인사를 비롯해 불국사, 동화사, 상원사, 정암사, 파계사 등의 유수 선원에서 화두를 들고 정진했었다. 수좌였던 스님이 상좌부 불교로 전향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저도 출가 직후엔 조주의 ‘무’자 화두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변화가 없었어요. 자신에게 변화 없는 수행,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자연스럽게 초기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1972년, 태국 승단으로부터 정식 계를 받은 스님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남방 가사를 수하고 있다. 지금은 상좌부 불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은사인 지월 스님도 ‘자네 스스로 옳다고 믿는다면 입어도 좋다’고 허락했을 정도다.


도성 스님은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골 할아버지 같았다. 무엇보다 말씀 한마디 한 마디가 부드러웠다. 스님은 ‘부드러운 말 한마디도 참다운 공양구’라는 의미를 알게 된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1983년 어느 날, 스리랑카 스님이 태종사에 머문 적이 있다. “하루는 누가 잘못한 일이 있어 내가 심하게 꾸짖으며 고함을 지른 일이 있었어요.” 평안도 사람의 기질이 다른 사람이 삐뚤어지는 것을 그냥 못 보는 성미인데, 스님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그런데 이를 지켜보던 스리랑카 스님이 보따리를 싸는 게 아닌가. 통역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왜 짐을 챙깁니까?’ ‘저 스님이 가신다 합니다.’ ‘왜 간다 합니까?’ ‘스님께서 화를 내셔서 가신다 합니다.’ ‘저 스님께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사람한테 화낸 것인데….’ ‘승려가 진심(瞋心)을 일으키니 같이 있을 수 없다 합니다.’


“성냄 자체가 잘못 된 것임을 몰랐던 겁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그 후 부처님 법을 좀 더 가까이 알고 나서야 비로소 ‘스님은 진심을 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알았지요. 성냄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스님은 일화 하나를 꺼냈다. 은사인 지월 스님이 해인사에 머물 때 이야기다. 그 당시엔 일반 사람들이 가야산에 와서 놀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절로 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어느 날, 도가 지나친 취객들이 대웅전 앞 사리탑에 올라가 사진을 찍겠다고 야단을 부렸다. 강원의 젊은 스님들이 보다 못해 취객의 멱살까지 잡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때 지월 스님이 나왔는데 강원 스님들은 외면한 채 취객들에게 다가가 사정하는 게 아닌가. ‘모든 것은 소승의 잘못이니, 소승을 봐서 용서해 주시오.’ 멋쩍은 취객들은 한 두 사람씩 꽁무니를 뺐다.


“불덩이가 솟아오르면 물을 부어 불을 끄듯, 당신 마음의 불덩이에 자비를 부어 가라앉힌 겁니다. 자비심의 발로이지요. 부처님 말씀에 따라 삶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은 자비심이 있어야 합니다. 자비심이 결여되어 있다면 뭔가 잘 못된 겁니다. 수행을 잘 못했든, 부처님 말씀을 잘 못 이해하고 있든, 뭔가 크게 잘 못된 겁니다.”


자비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마음이라 하지만 그 마음 또한 바람 앞 갈대와 같이 찰나마다 흔들린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마음은 육근의 작용에 있습니다. 눈에 비치는 상, 귀로 들리는 소리도 마음이 가야 나타나고, 들립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 한마디 속에도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그 작용을 잘 보아야 합니다. 잘 본다는 건 ‘사띠’ 즉 ‘알아차림’입니다. 이 작용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스님은 호흡에 집중해 보라 권한다. 오온의 작용을 살피는 게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이니, 들숨과 날숨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숨은 한 번 쉬었다 그 다음 한 번을 쉬지 못하면 죽음과 직결된다. 생사가 오가는 문제인 만큼 집중력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될수록, 마음속의 선한 마음자리가 성장해 갑니다. 선한 마음자리가 성장하면 할수록 선하지 않는 마음자리는 소멸해 갑니다. 선하지 않는 마음자리가 모두 사라진 상태를 ‘깨달음’이라 할 수 있지요.”


치사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탐심이라는 마음, 상대를 망가뜨려야지 하는 성냄이라는 마음, 올바름에 대한 판단을 잘못하는 어리석음이라는 마음이 우리에겐 있다. 하지만 ‘자비희사’라고 하는 무한한 마음도 갖고 있는 게 우리 아닌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저는 자비희사의 마음을 가져 보라 권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결국 선택은 자신이 해야지요.”

 

마음이란 우리의 오온 작용
‘호흡’ 하나 알아차림도 수행


조주의 ‘무’는 조주의 말일 뿐

부처님 말씀 실천이 제일관건

 

스님은 ‘부처님의 흙 한 줌’이야기를 전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나무아래에 있는 흙을 한 줌 손에 쥐시고는 비구들에게 물었다. ‘손바닥 안에 있는 흙이 많으냐, 히말라야에 있는 흙이 많겠느냐?’ ‘히말라야 있는 흙이 많습니다.’ ‘내가 법을 설하여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많겠느냐,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많겠느냐?’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깨달음에 이르는 이들은 이 손안에 있는 흙과 같이 미세하다. 내 법을 듣기에는 더욱 힘들다. 그러니 너희들은 하루빨리 도를 이룰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라.’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법을 설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부처님 법 만났을 때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음이라.


스님은 자신의 주변을 잘 살펴보라 했다. 무엇보다 ‘도반’이 있는지, 그 도반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부터 유심히 보라 일렀다.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부처님, 좋은 도반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가는 진리의 길에서 반을 성취한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데 전부이니라.’ 도반이란 단순히 공부를 함께 하는 ‘친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 모두가 도반입니다. 도반에게 무엇을 묻고, 그 도반에게 무엇을 답하는지에 따라 자신의 공부도 점검해 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팔정성도로 나아가게 되어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혹, 길을 잘 못 들어도 그 도반의 손을 잡고 헤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문득 한 가지가 궁금했다. 수행을 열심히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일념으로 해야 한다는 말도 있고, 한 번쯤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소식이 있다는 충언도 있다.


“물론 수행 방편의 일언들이니 다 일리 있습니다. 다만, 서산 스님의 말씀을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수행은 거문고 줄 고르듯 해라.’ 너무 팽팽하게도, 너무 느슨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수행은 극기 훈련이 아니다. 중요한 건 단 10분이라도 매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느 선상에 이르러서는 매 찰나 할 수 있어야 하지요. 예를 들어 호흡을 살피는 건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습니다. 호흡을 살피다 보면 오온의 작용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스님은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말 것을 권했다. 일상에서의 괴로움이 자신을 남과 비교했을 때부터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수행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남들이 한 시간, 세 시간, 혹은 철야를 했다 해서 자신도 억지로 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욕을 갖는 것과 억지로 하려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수행은 자율적으로 해가야 합니다. 그래야 지속성이 있어요. 자기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서 자신에게 맞는 걸음걸이를 떼어놓으면 그만인 겁니다. 조금 더 빨리 걷겠다는 정진의 의욕을 갖는 건 그 다음이지요.”


스님은 아난다존자가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하고 있을 때 부라흐마나존자가 이른 말을 상기해 보라 했다. “아난다존자시여, 맑은 물속에 존자의 얼굴이 비춰집니다. 하지만 그 물이 아난다존자는 아닐 것입니다.” 스님은 이어서 팔리어 중에 ‘앗따히 앗따노 낫티’라는 일언을 전했다. 풀이하면 ‘나에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 조건에 따라 사라질 뿐이다. 이 세상 만물, 우주가 그렇다.


스님은 당부했다. “경전을 보세요. 제 말은 도성의 말이고, 조주의 ‘무’는 조주의 말일 뿐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가슴에 담아야 마음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부산 태종사는 7월이 되면 ‘수국 정토’로 변모한다. 하지만 태종사의 진면목은 수국에 있지 않다. 수국은 장엄일 뿐이다.

 


태종사에서 노란 가사를 입은 스님이 있다면 그 분이 도성 스님이다. 대중과 운력하는 사람 중 유독 나이가 많아 보이는 분, 그 분이 도성 스님이다. 묻고 싶은 법이 있다면 여쭤보라. 정갈한 감로수 한 잔 마실 수 있을 것이다. 태종사를 나와 걸어 올랐던 길 반대편으로 길을 나섰다. 해안 절벽과 자갈들은 오늘도 파도를 안아주고 있었다. 우리는 세상을 얼마나 안을 수 있을까? 시골 할아버지 같았던 도성 스님의 마지막 당부가 귓전에 생생하다.


“마음과 말과 행이 한결 같으면 충돌과 대립이 없어져 평온을 얻게 될 겁니다.”


마음은 딴 곳에 두고, 언행만 그럴싸하게 보이려 하고는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겠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성 스님

한국 남방불교의 상징적 존재다. 1919년 평안남도 양덕 출생인 스님은 1953년 부산 선암사에서 출가했다. 1972년 태국 승단에서 정식 계를 받은 이후 남방 가사를 수했으며 1988년부터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을 오가며 본격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에 매진했다. 2009년 한국 테라와다 상가라자(승왕)로 추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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