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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사성제와 사회적 고-5

기자명 법보신문

연기적 관계임에도 동일성에 집착해
영역에 포함되지 않으면 배제로 일관

맨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내 얼굴 앞의 대기에는 수 억의 박테리아가 산다. 그 박테리아는 크게 산소를 좋아하여 호흡하는 호기성 박테리아(好氣性細菌, aerobic bacteria)와 이를 싫어하거나 없어도 살 수 있는 혐기성 박테리아(嫌氣性細菌, anaerobic bacteria)로 나누어진다. 아주 미세하여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지만, 내가 이산화탄소로 가득한 숨을 내뿜는 순간, 호기성 박테리아는 죽어갈 것이고, 혐기성 박테리아는 반대로 살아서 마구 늘어날 것이다. 그리 내 호흡에 영향을 받아 찰나의 순간에도 내 앞의 대기의 미생물이 달라진다. 그리 변한 대기가 나와 내 주변의 사람의 몸에 들어와 영향을 미치고, 그리 달라진 몸은 다른 숨을 내뿜고, 그 숨은 다시 대기의 미생물에 변화를 준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 조건을 형성하며,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이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dynamic)인 상호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원인이 결과가 될 뿐만 아니라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된다. 타자의 의식, 말, 행동과 몸짓이 나에게 영향을 미쳐 나를 형성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 여기에 시간도 작용한다. 우리가 타인을 10년 만에 만나 얼굴을 보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침에 만난 이를 저녁에 만난다면 달라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 사이에도, 아니 눈을 깜박거리기 전과 후의 사이에도 상대방의 얼굴에 있던 수 만 개의 세포가 죽고 새 것으로 교체되었기에 두 얼굴은 차이를 갖는다. 그렇듯 찰나의 순간에도 타자는 내 안에 늘 들어오고 있고, 그 역도 언제나 진행 중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상호 생성자(inter-becoming)’다.


이렇듯 우주 삼라만상이 무상하고 연기의 관계를 맺고 있어, 찰나의 순간에도 서로 조건을 형성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런데 그 차이를 보지 못하고 고정성에 집착하면, 원인에서 결과로 단선적으로 인과관계를 파악하면, 존재는 자신을 주체로 착각하고 동일성을 형성한다. 동일성에 집착한 자아는 다른 존재마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기에 고정된 자아와 다른 형상(eidos) 및 속성을 가진 존재, 동일성의 영토로 환원되지 않는 자, 진동을 받는 자, 원인에 의해 생성된 결과, 영향력에 의해 바뀌는 자, 인식 및 판단의 대상, 개조되는 세계를 타자로 설정한다.


20세기는 인류의 교양과 이성이 가장 심화하고 증대된 사회이다. 그럼에도 왜 20세기는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극단의 시대’였는가. 이데올로기(ideology)나 종족 사이의 갈등, 자원과 자본을 둘러싼 탐욕, 국가간 이해관계도 작용했지만, 그 근저에는 동일성의 패러다임(paradigm)이 자리한다.


난징대학살 때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불 속에 던져버린 일본 군인들이 악마의 화신이었을까? 아니다. 그들도 소설을 읽고 엉엉 울어버리고 첫사랑에 온밤을 설렘으로 지새우고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에 눈물을 훔치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중국인은 우리 편이 아니야. 저들이 사라져야 우리가 행복해져.”라는 식의 배제의 담론이 그들을 그렇게 악마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 군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전투가 끝난 후에 월맹군의 시체는 몇 백 구가 널브러져 있어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다음 날 순찰을 하다가 한국군 시체를 발견한 뒤에는 보초를 서는 내내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고 한다. 같은 인간인데,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월맹군은 타자의 영역에 속한 것이고, 한국인은 동일성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도흠 교수
이처럼 인간은 유색인, 제3세계, 다른 민족이나 종족, 광인, 장애인, 다른 이념을 가진 자, 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동일성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것을 타자로 간주하고 이를 자신과 구분시켜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한다. 
 

이도흠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ahur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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