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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 생각이 상대 과거·미래에도 파급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 스님

72년 도영 스님 은사로 출가
화두 하나 들고 선방서 41년

 

무문관 폐문정진만도 3년 째
승려대중 수행 본보기 ‘수좌’

 

 

▲영진 스님

 

 

영진 스님은 지난 3년 동안 백담사 무금선원에 머물며 결제철이면 무문관에 들어가 은산철벽과 마주했다. 무문관이라 하면 자물쇠로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 한 끼 공양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햇볕 한 줄기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폐문정진하는 곳 아닌가. 이 공간에서 생사와 사투를 벌였으니 인상도 굳어 있고, 말씨도 칼칼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선입관에 불과했다. 영진 스님은 엄한 듯 부드러웠고, 강직해 보였지만 그 속엔 자애가 묻어 있었다.


순간, 중국의 종색 선사가 전한 일언이 스쳐갔다.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수행에만 전념하는 스님을 ‘수좌’라 하는데, 종색 선사는 여기에 의미 하나를 더했다. ‘승려 대중에게 수행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하기에 수좌가 있다.’ 말씨 하나, 걸음걸이 하나, 옷맵시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예사로움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수좌만이 간직할 수 있는 향기일 것이다.


41년 동안 화두 하나 들고 정진의 길만 걸어 온 영진 스님을 만나 여쭙고 싶었던 게 있었다. 수행의 즐거움. 선열 이전에라도 맛볼 수 있는 수행의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정진의 끈을 그리 쉽게 놓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진 스님의 ‘소참 법문’을 통해 그 즐거움을 찾아 볼 요량이다.


영진 스님은 대중 법문이 있을 때면 참회를 강조해 왔다. 간화선의 진면목을 설파할 시간도 부족할 터인데 스님은 항상 참회를 꺼내든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스님은 ‘수행’부터 꺼내 들었다.


“수행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에서도 이뤄져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한다면 일거수일투족이 다 수행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난 순간부터 누워 잘 때까지 허투루 있으면 안 됩니다. 누워 있는 자세까지도 수행자다워야 합니다. 수행의 길을 걸은 순간부터 열반에 들 때까지의 모든 순간이 수행과 직결되어야 합니다.”


수행자의 언행을 염두에 두고 한 일언인데 잠에 든 자세까지도 수행자다워야 한다니 가슴이 턱 막힌다. ‘수행’ 속에 ‘즐거움’이 비집고 들어 갈 틈이 없다. 이를 눈치 채서일까? 틈을 열어 보였다.


“하지만, 공부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장애가 생기면 수행도 진척이 없습니다. 그 장애가 심할 때면 선지식들은 고된 공양주 소임을 자청하셨습니다. 복덕을 쌓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만약 복과 덕이 없으면 물기가 없는 씨앗과도 같아 싹을 틔울 수 없으니, 마땅히 공덕을 쌓고 업장을 소멸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수행 이전에 쌓인 업은 분명 있지요. 수행 이후엔 업이 쌓이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보임의 길을 걷는 각자(覺者)가 아닌 이상 적어도 악연악업은 면전에 도사리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참회를 않는 마음자리에 하심이 들어앉을 수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상’을 떨어뜨리는 것인데, 하심하지 않으면 이 상을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네가지 상 중에서도 ‘아상’을 먼저 지워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거든요.”


스님은 수행인 중에서도 아상에 집착해 아만을 떠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채공, 탄두 등의 소임을 보게 하는 것도 하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방편입니다. 수행이라는 본문에 들어서기 전에 마음가짐부터 새롭게 다지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는 겁니다. 하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몸과 마음이 밝아지고, 궁극에는 자신의 본성에 가까워집니다.”


스님은 ‘절’을 예로 들었다. 내 몸에서 가장 위에 있는 머리를 상대의 몸 가장 아래에 위치한 발밑에 두는 이 작은 ‘일’은 결코 소소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예의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하심에서 비롯되는 실천행동이라 보면 절 하나도 또한 수행인 것이다.


“하심 안 한 사람의 눈에 경전이 보일 리 만무합니다. 그들의 귀엔 선지식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심 해야 상대를 부처님처럼 모실 수 있습니다.”


하심 하고 있지 않다는 건 내 마음을 열어 놓지 않은 것과 같다는 설명이다. 열지 않았으니 들여놓을 것도 없다.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참회는 오늘의 일만이 아니라는 점을 스님은 강조한다.


“참회는 지금 하지요. 쌓인 업장을 녹이는 일이니 과거의 일을 오늘 해소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유사한 악업을 짓지 않겠다는 발원도 함께 하는 것이니 미래의 일을 지금 도모하는 겁니다. 현재 속에 과거, 미래가 다 포함돼 있는 겁니다.”


미처 인시하지 못했던 일언이다. 오늘의 참회 속에 과거와 현재, 미래 삼세가 다 들어 있다니!
“생각 념(念)자를 파사해 보면 이제 금(今)과 마음 심(心)입니다. 생각이란 결국 지금, 이 순간의 마음입니다. 한 생각은 어제와 오늘, 내일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 한 순간 속에 삼세가 다 들어 있다 하는 겁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나의 한 생각은 상대방의 생각에도 파급 된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습니다.”


내 한 생각이 상대의 삼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리 아닌가!
“그렇습니다. 내 말 한 마디에 상대는 그와 관계된 과거와 오늘 일, 그리고 내일의 일까지도 사유하고 고민하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는 우리 인간 사회에 허다합니다. 그러하기에 상대를 부처님 모시듯 해야 합니다. 상대를 무너뜨려서 내가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히 큰 착각입니다.”

 

참회-하심은 수행의 주춧돌
낮추지 않으면 불법 안 들려

 

한두 해 공부해서 ‘선불장’
급제하려는 건 ‘욕심’일뿐


그렇다. 한 국가의 부도가 세계경제에 끼치는 영향이 그렇고, 아마존의 훼손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 또한 그러하다. ‘상대가 잘 되어야 나도 잘 될 수 있다’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이고 보면 스님의 일언은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이 모든 것의 출발은 참회를 통한 하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스님은 다시 수행으로 돌아왔다.


스님은 간화선을 하기 전에 꼭 ‘조건’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했다. 하지만 제대로 잘 하기 위해서는 ‘무상심’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원하거나,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도, 재산도, 명예도 영원한 것처럼 착각한다 말이지요. 여기서 벗어나려면 무상심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이 공부에 뛰어 듭니다.”


스님의 자신의 일화 한 토막을 껴냈다. 한 토굴에서 수행할 때 일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도중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궁이에서 잠자던 쥐 한 마리가 불길에 견디지 못하고 후다닥 뛰쳐나온 것이다. ‘내가 미처 이 생명을 돌보지 못했구나’ 자책하면서도 스쳐 지나가는 게 있더란다.


“그 쥐는 당장 죽을 것 같으니 불길 속을 거쳐 그대로 뛰어 나왔습니다. 만약 내가 오늘 죽을 것 같으면 이렇게 느슨하게만 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한 가지. 그 쥐는 앞에 놓인 불을 무서워만 하지 않고 과감하게 뚫었습니다. 은산철벽을 뚫는 마음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갔지요.”

 

 

▲ 무금선원 선불장. 방 거사는 ‘시방에서 함께 모여들어 낱낱이 무위법을 공부하네. 여기는 부처를 뽑는 과거장이니 마음이 ‘공’해져서 급제해 돌아가리라’했다. 무위법이 궁금한 사람은 영진 스님을 친견해 보기를 권한다.

 


수행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뜻이다. 이대로 가다간 죽을 때 까지도 선의 진면목은커녕 생사가 무엇인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살게 된다.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리고 하겠다면 제대로 끝까지 해 보라는 뜻이다.


“수행은 ‘확인’하는 일입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사실은 불자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하게 믿지 못합니다. 확인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점과, 선을 예로 들며 수행도 반복이 필요하다 강조했다. 점과 점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다 보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이 만나면 면이 되고, 면과 면이 만나면 입체면이 된다. 점에 머물러 있다 해도 면을 향해 노력하다 보면 입체면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처음엔 입으로라도, 마음으로라도 반복해 보세요. 넘어지는 순간, ‘아이쿠’ 하는 사람 있고, ‘어’ 하는 사람 있고, ‘엄마야’ 하는 사람 있고, ‘관세음보살’ 하는 사람 있습니다. ‘이뭣고’ 하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구두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평소 무엇에 집중하며 훈련했는가에 따라 그 한마디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공부의 갈무리는 분명 있다는 뜻이다. 아직도 수행의 즐거움은 보이지 않는다. 이젠, 직접 여쭈어 보는 방법 밖에 없다.


“즐거움! 즐겁다면 아직 익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수행은 즐거운 일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수행 과정 중에 얻는 이로움은 있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고마움입니다. 대오, 해탈은 아니더라도 모든 생명에 대한 고마움만큼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무문관 일화 한 토막을 꺼냈다. 오전 11시면 어김없이 오던 공양이 어느 날 오지 않았다. 하루 딱 한 번 받는 공양이니 기다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 결국 공양은 1시간 뒤에나 도착했다. 문틈 사이로 공양을 건네주는 스님의 일성이 들려왔다. “스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절에서 무문관 오는 길에 폭설이 내려 그 눈을 치우며 오느라 늦었다는 것이다.


“폭설을 치우며 공양을 갖고 올라오는 그 마음 한량 없습니다. 그런데 ‘늦어서 죄송하다’합니다.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지요. 이런 마음으로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라도 한 번 보면 달리 보입니다.”


수행자의 눈엔 모든 일이 불공이고, 만상이 부처님이라 했는데 그 얘기는 진실로 그러한 듯하다.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집니다. 혜안이 깊어져 가는 것이지요. 뭇 생명에 대한 외경심만 가져도 내가 쓰는 마음 하나가 달라집니다. 수행이 주는 이로움 중 하나이지요. 물론 궁극에는 그 마음마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을 찾을 게 아니다. 수행의 이로움은 있을 수 있어도, 수행의 즐거움은 없다. 선열이라 해서 세속에서 말하는 즐거움이겠는가. 삼매에 들어 본 사람만이 맛 볼 수 있는 선미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수는 없지만, 그 마음 하나라도 맑게 내어보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마음 하나가 나와 상대의 삼세에 영향을 주니 말이다.
누구든 신선이 되고 싶어 하고, 부처님이 되기를 원한다. 스님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고 한다.


“하루 동안 맑고 한가하게 지내면 하루 동안 신선이고, 한 가지 행이 부처님다우면 그 한 행은 부처님(일일청한일일선 일행여불일행불. 一日淸閑一日仙 一行如佛一行佛)이라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황벽 스님이 말씀하셨지요. 뼈에 사무치는 추위를 거치지 않고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수행을 통하지 않고는 하루는 고사하고 한 찰나 속 신선도, 부처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영진 스님은 말한다. “고시 공부도 몇 년을 하는데, 한두 달, 한두 해 공부해, 부처님 뽑는 시험에서 급제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격려도 잊지 않았다. 어떤 수행이든 열심히 해 보라고,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언젠가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한 걸음 더 가야 할 때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영진 스님

1972년 금산사에서 도영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99년부터 3년 동안 조계종기초선원장 겸 동화사 선원장을 맡았다. 봉암사, 해인사, 통도사, 기기암, 묘적암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해 왔으며, 현재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소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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