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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법흥왕비 보도부인

돈독한 불심으로 불교공인 이끈 왕의 조강지처

법흥왕, 이차돈 순교 이전
보도부인 통해 불교 심취

 

 

 

 

“법흥왕은 등극 이후 백성들을 위해 복을 짓고 죄업을 소멸시킬 곳을 마련하고자 열렬히 원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절을 세우고자 하는 신성한 계획을 따르지 않았다.”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


법흥왕 14년인 527년.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내전을 훑고 지나갔다. 분노에 찬 왕의 눈길이 귀족들을 찬찬히 훑었다. 왕좌 옆에는 형벌을 내릴 때 사용하는 형구(形具)의 일종인 풍도(風刀)와 상장(霜仗)이 서슬 퍼런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왕의 유례없는 진노에 귀족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오금이 저렸다. 까딱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판국이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살인도구들은 더욱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위협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경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했음에도 일부러 이를 지체시킨 것이 아닌가?”


법흥왕의 일갈에 사찰 창건을 반대했던 여러 신하들이 몸을 떨며 황망해 하는 순간, 사인 이차돈(박염촉)이 나섰다. 그는 “절을 지으라는 왕명을 전달치 않았다”고 아뢰며 바닥에 엎드렸다. 물론 이는 사실과 달랐다. 법흥왕은 이를 알고 있음에도 그에게 즉각 책임을 물어 처형할 것을 명했다.


사료에는 옥사가 그를 베자 사방이 어두워져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했으며 잘린 이차돈의 목에서는 흰 젖이 한길이나 솟았다고 전한다. 또한 이를 본 왕은 비통함에 눈물로 곤룡포를 적시고, 재상들은 두려움에 땀이 옷을 적셨다고 한다.


사실 법흥왕의 눈물에는 말 못할 사연이 있었다. 이차돈의 죽음 하루 전, 법흥왕과 이차돈은 은밀히 만났다. “사찰을 건립해 불법을 널리 알리겠다”는 왕의 결심이 귀족들의 반대로 좌절 위기에 처한데 대해 탄식하는 법흥왕의 심경을 젊은 사인 이차돈이 미리 헤아렸기 때문이다.


“일체 버리기 어려운 것 중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지만,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그로서 만족합니다.”


목숨을 버려가며 신라땅의 불교 홍포를 이끌겠다는 그의 굳건한 결심은 왕의 만류에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귀족들을 벌벌 떨게 한 이 날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바로 신라 불교공인의 극적인 계기가 된 이차돈 순교 사건이다. 이 사건은 유교적 사관이 투영된 ‘삼국사기’에조차 소상히 기록될 정도로 법흥왕대의 주요한 사건이었다. 불교를 박해하던 법흥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순교라는 해석도 있지만, 법흥왕과 이차돈이 불교 공인을 위해 뜻을 모아 만들어낸 시나리오로 보는 게 학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무엇보다 법흥왕은 그 스스로 불심이 깊었다. 불교 공인 후인 534년에는 흥륜사 창건에 착수했으며 완공 후에는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 출가해 법명을 법공(法空)이라 하고 말년을 흥륜사에 머무르며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 여러 사료에서는 법흥왕이 왕위에 오른 당시부터 이미 불교에 깊은 관심을 두고 사찰 건립을 추진하는 등 불교에 귀의해 정신적인 안정을 추구했다고 전한다. 기록에 근거하면 법흥왕은 이미 왕이 되기 전 태자시절부터 불교를 신앙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전, 법흥왕은 누구를 통해 어떤 경로로 불교를 접하게 됐을까.


의문을 되짚어 가다보면 역사의 그림자에 가려진 한 여성이 등장한다. 바로 법흥왕의 정비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보도부인은 법흥왕의 조강지처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태자비로서 그의 곁을 지켰다. 한평생 왕실에서 남편을 내조했을 뿐 아니라 말년에는 왕과 나란히 출가해 부처님 법을 따르는 도반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법흥왕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한 평생 곁을 지킨 조강지처 보도부인의 깊은 불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물론 역사적 사실로서 이를 증명하기엔 보도부인에 대한 기록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다. 사료에는 그녀가 소지왕과 선혜부인의 딸이라는 것과 ‘사씨의 유풍을 흠모해 영흥사를 창건하고 말년에 (법흥왕과 함께) 출가해 법명을 묘법이라 했다’는 정도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도부인의 깊은 불연과 신심을 유추해내는 건 어렵지 않다.


우선 “사씨의 유풍을 흠모해 출가했다”는 기록은 그녀의 깊은 불심을 명백하게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보도부인이 흠모했다는 사씨는 과거 아도 스님이 전법을 펼치기 위해 신라를 찾았을 때 그를 숨겨준 모례장자의 누이로, 19대 눌지왕(417~458)대 혹은 21대 소지왕(479~500)대에 탄생한 신라의 첫 여성재가불자이자 공식적인 우리나라 첫 비구니 스님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씨는 아도 스님이 천경림에 흥륜사를 창건하고 전법을 펼칠 때는 이를 좇아 출가한 뒤 영흥사를 창건해 대중교화에 앞장섰다고 한다. 즉 그녀는 새로운 사상인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몸을 던진 선구자였다.

 

소지왕 딸…왕실불교 접해
사씨녀 유풍 흠모해 출가


어쩌면 갑갑한 왕실에서 홀로 불법을 접하고 개인적인 수행을 이어가던 보도부인에게 이러한 사씨의 선구자적 면모는 같은 여성으로서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뿐만 아니라 보도부인이 사씨를 흠모했다는 사실은 그의 출가행위의 목적이 개인적인 신심과 수행에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당시 법흥왕과 보도부인의 출가는 국가 최고 권력자인 국왕과 국모가 세속의 모든 부귀영화를 훌훌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로 거듭난 놀라운 사건이다. 때문에 이들의 출가는 불교 공인 후에도 반불교세력으로 잔재하는 토착세력과 민중들에게 명백한 모범을 보임으로서, 신라의 통치이념으로서 불교 사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의도한 정치적 판단에서 비롯됐으리라는 견해도 있다. 분명 법흥왕의 경우 이 같은 유추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보도부인의 경우 ‘사씨의 유풍을 흠모’하여 출가했다는 점에서 정치와 무관하게 순수한 신행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셈이다.


보도부인이 소지왕의 여식이라는 또 다른 기록은 그녀가 어린시절 일찍이 불교를 접했으며, 불교 공인 전 이미 불교를 믿고 있었을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소지왕대 이미 왕실에 승려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기 때문이다.


 일명 ‘사문갑 사건’이다. 사문갑 사건은 외부행차에 나선 소지왕에게 한 노인이 ‘거문고 통을 쏘아라’는 글을 올린 것으로 시작된다. 왕이 궁궐에 돌아가 거문고 통을 쏘니 궁궐에서 기도를 담당하던 승려(焚修僧, 부전승)가 궁주와 몰래 내통하고 있어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이미 소지왕대 왕실 내전에서 업장소멸을 빌어주던 승려가 있었음을 확인해준다. 사금갑 사건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이 기도승은 고구려가 소지왕을 암살키 위해 파견한 첩자라는 설과 고구려가 불교전파의 일환으로 파견한 일종의 외교관이었다는 설, 그리고 승려가 왕과의 친분을 통해 내정에 간섭할 것을 우려한 귀족세력이 의도적으로 ‘사금갑 사건’을 꾸며 불교를 음해하려 했다는 설 등이다. 또 ‘화랑세기’에는 기도승과 내통한 궁주가 소지왕의 정비이자 법흥왕비의 어머니인 선혜부인이며 그와 사통해 보도부인의 동생 오도를 낳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대체로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본다.


어찌됐건 ‘사금갑 사건’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소지왕대 왕실에는 승려가 존재했고, 궁주와 승려 간 교류도 가능해 당시 왕실에서는 이미 불교가 전파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불교가 공인되기 전부터 이미 신라 왕실에서 불교는 암암리에 신앙되고 있었던 셈이다.


소지왕의 여식으로 어려서부터 왕실에서 자란 보도부인이 일찍이 궁주들을 통해 불교를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지역사회에도 이미 불교가 널리 퍼져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궁주들 가운데 사씨나 사씨의 제자들로부터 불교를 접한 이들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보도부인은 아마도 그들을 통해서도 불교를 접하고 더욱 심취했을 지 모른다.


특히 보도부인은 법흥왕이 태자 무렵에 이미 그와 혼인한 상태였다. 법흥왕은 고령이었던 부친 지증왕을 도와 일찍이 내정에 관여했는데, 아마도 이때 보도부인의 불심은 미래의 왕에게 불교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원동력이 됐을 수 있다.


특히 당시 신라는 소지왕대부터 김씨왕조로 넘어온 왕권이 귀족세력을 제압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때문에 후대왕인 지증과 그의 아들 법흥왕이 세운 최우선 목표는 왕권의 확립이었다. 또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이전의 박씨왕조와 차별을 둘 수 있는 새로운 사상적 기반이 필요했는데, 법흥왕은 보도부인을 통해 불교가 바로 그 사상임을 확신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불교에 대한 태자의 정치적인 관심은 태자비였던 보도부인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진지한 신심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돈독한 불심을 지닌 그녀는 법흥왕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켜 주는 스승의 역할을 수행함은 물론 점차 법흥왕을 불법의 세계로 이끄는 촉발점이 됐던 셈이다.


한편으로 보도부인에게도 어려서 접했던 불교의 가르침은 태자비가 되고 왕비가 되면서 더욱 간절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귀족들의 견제와 잇따른 전쟁 등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불교는 그녀에게 삭막한 삶 속 마음을 다스려주는 한 줄기 빛이었다. 특히 왕위에 오른 후 여러명의 첩을 둔 것으로 알려진 법흥왕의 여자관계는 보도부인이 왕비로서, 또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얼마나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지 짐작케 한다. 물론 법흥왕의 여자관계가 귀족세력의 통합을 위한 정치적인 의도일 수도 있겠지만, 조강지처 보도부인에게 이는 쉽게 감내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잇따른 번뇌와 고통 속에서 보도부인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더욱더 불교에 심취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불심은 더욱 깊어져 거듭 법흥왕에게 영향을 미쳤고, 결국엔 왕의 출가를 이끌었을 개연성이 크다. 무엇보다 법흥왕이 흥륜사를 세울 때 비구니 사찰 영흥사를 함께 창건했다는 점은 보도부인을 향한 왕의 특별한 배려를 뒷받침한다. 사찰 건립에 대한 귀족들의 반대를 막아내고 불교를 공인하기 위해 이차돈의 순교라는 뼈아픈 선택을 해야 했던 법흥왕에게 있어 대규모 불사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보도부인이 머물 사찰의 명칭을 그녀가 존경하는 사씨의 사찰명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결국 법흥왕에게는 한평생 돈독한 불심으로 그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준 보도부인이야말로 살아있는 보살이자 둘도 없는 도반이었던 셈이다.


법을 흥하게 한 법흥왕(法興王)의 뒤에는 불심 돈독한 조강지처 보도부인의 조용한 내조가 있었다. 이로 인해 마침내 신라 땅에도 고통 받는 중생들을 보듬을 부처님의 수승한 법이 우뚝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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