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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

새잎 돋는 나무는 지난 가을 열매를 떠올리지 않는다

 

▲금강 스님

 

 

4개월 전쯤 이 법회의 법문을 요청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지난해 이 법회가 시작된 후 매달 마음을 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과 제가 오늘 한 마음을 냈기 때문에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함께 만나려고 한다면 둘이 마음이 깊어져야 하지만 마음은 늘 변할 수 있어요. 그 마음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첫 마음이 계속 일어나야 합니다. 한 번 마음 냈다고 해서 지금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라 오늘 아침에 또 다시 그 마음을 일으켜야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초심(初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처음마음. 선심초심. 선심은 바로 첫 마음에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 17살에 출가했습니다. 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인사로 갔습니다. 그런데 암자에 살다가 그야말로 큰 절에서 살 생각을 하니 마음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됐습니다. 이렇게 큰 절에서 내가 살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절 마당에서 어떤 키 작은 노스님 한 분이 팔을 휘저으면서 아주 당당하게 저 쪽에서 오시는 거예요. 그 스님 앞에 가서 정중하게 합장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스님이 대뜸 저를 보시고 “너 어디서 왔냐?” “예, 저 전라도 해남에서 왔습니다.” “뭣 때문에 왔냐?” “예, 행자 생활하러왔습니다.” 그랬더니 제 손을 덥석 잡아주는 거예요. 그러시고는 “야, 너 정말 잘 왔다. 우리 죽을 때까지 공부하자. 이 생에 태어났다 생각지 말고 공부하다 죽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을 듣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그 스님이 혜암 스님이셨는데 그 스님 사셨던 원당암에 가면 지금도 큰 나무에다 이렇게 적혀 있어요. ‘공부하다 죽자.’ 본래 그 스님께서 늘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근데 저는 그 이야기가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새겨졌던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걸 계획하거나 늘 어느 자리에 있거나 그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와요.


저라고 게으른 마음이 없겠습니까. 게으른 마음과 욕심내는 마음과 성질내는 마음 이런 것들이 불쑥불쑥 올라오는데, 그때 생각만 딱 떠올리면 마음속에서 ‘다시 공부하자’,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그 마음이 아주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것이 불쑥불쑥 올라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초심은 수행 지탱하는 힘


우리가 좌선이라고 하죠. 좌선이라는 말을 ‘육조단경’에서는 이렇게 풀이를 해놨어요. 밖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앉혀놓는 것.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이 좌가 아니라 바로 밖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앉혀놓는 것이 좌다. 선은 본래 자기 마음속에 지혜롭고 덕스러운 본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선이다. 이렇게 표현을 해 놓았어요. 좌선. 그러면 우리가 본래 갖추어져 있는 바로 지혜롭고 덕스러운 그 성품은 어떤 것이냐? 그 성품을 드러내야 그것이 선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것은 어떤 것이냐.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닫고 난 뒤에 첫 일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고뇌하는 것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계성이죠. 죽음에 대한 문제는 극복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인류역사상 모든 사람의 첫 번째 고뇌로 꼽히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생을 사는데 있어서 매 순간 순간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늙음의 문제. 고령화 사회가 되었지만 한편으로 생물학적 나이는 80년, 90년, 100년까지 갑니다. 하지만 내 정신을 차리고 그 때까지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늙음의 문제는 생물학적 수명은 늘어난다 할지라도 늘 다가오는 문제이고 괴로움의 문제입니다.


또 병드는 문제. 우리 주변의 한 사람이 아프다면 온 가족이 다 아프죠. 병의 문제는 언제 나에게 다가올지 모르고, 언제 우리 가족에 다가올지 모르는 그런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삶의 문제. 하루하루 살기가 살얼음판 같습니다. 세끼 밥 꼬박 꼬박 먹어야하죠. 또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오해를 쌓기도 하죠. 행동하나 잘못하면 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삶이 늘 고의 연속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셨습니다. 그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난 뒤 처음 하신 말이 있습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의 중생이 여래와 같은 지혜와 덕상이 있건만, 분별망상으로 인해서 알지 못하고 있구나.’


깨닫고 보니 나와 똑같은 지혜와 덕상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거죠. 그런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번뇌와 망상 때문입니다.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는 말이죠. 석가모니 부처님이 만약 이곳에 다시 오셔서 여러분들을 본다면 어떻게 보실까요? 중생으로 보실까요 아니면 부처로 보실까요? 바로 그 깨달음의 성품을 보시는 것이지 다른데 쳐다보고 있다고 해서 부처 아닌 것은 아니란 것이죠.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옛 선사들이나 다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잊고 우리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이 피부, 각각이 분별하는 욕망을 따라갑니다. 이 눈이 늘 잘 보면 좋은데 분별을 합니다.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같은 것이 있어도 예쁘다, 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예쁜 걸 택하죠. 잘생겼다, 못생겼다. 분별은 하지만 기준은 없어요. 늘 상대적이죠. 그리고 그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취하죠. 그렇게 되면 나머지 것들은 다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관점들을 다 내려놓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본래 부처의 마음자리를 드러낼 것인가. 아주 요원하죠. 나는 그것이 초심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옛 선사들은 바로 그 자리를 생각하기 이전 자리, 말하기 이전 자리라고 합니다. 그것을 지혜의 자리라고 하기도 하고, 깨달음의 자리라 하기도 하고, 부처의 자리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본래 자성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 마음을 언제 냅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 그 마음이 바로 초심입니다. 첫 마음. 어떤 대상을 볼 때 바로 내 생각이 일어나기 전, 바로 그 마음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늘 그 다음에 내 생각이 일어나죠. 내 경험과 학습되어진 것. 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니까요. 그 첫 마음을 믿지 못하고 그동안의 경험, 어디서 들었던 것, 배웠던 것, 이런 것들로 바라보고 추측합니다. 늘 그 마음 때문에 오히려 잘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흐리게 보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인 마음이 어디 한 곳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도가 어디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 어디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매 순간 순간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고정된 사고가 아닌 바로 있는 그대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지혜의 마음으로 바로 활발하게 살아있는 것. 이것이 바로 지혜의 마음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 봄에 나무가 새싹을 틔웁니다. 그런데 작년에 어렵게 어렵게 열매 맺었던 것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허망하겠어요. 또 이렇게 잎사귀를 내밀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갈등이 심하겠지요. 그러나 나무는 지난 해 가을의 열매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다시 생생하게 살아있기 위해 새 잎을 내밀고 있습니다. 꽃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생생하지 못하고 늘 과거의 것을 끌어들여가지고 비교를 합니다. 또 미래의 것을 가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의 마음을 늘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재를 보아야 경험도 지혜돼


초심은 늘 수행의 순수성을 잃지 않게 해줍니다. 언제나 내가 새롭게 태어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바로 우리 망념 속에서 순수한 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초심입니다. 가령 ‘금강경’을 볼때에도 내가 지난번에 봤던 마음이나 누구에게 배웠던 마음 이런 것들에 의지해서 보려고 하지 말고, 지금 바로 이 순간의 마음으로 새롭게 경전을 대하면, 볼 때마다 달라집니다. 부처님 경전도 그렇고, 선어록도 그렇습니다. 나무 한 그루 보더라도 지금 살아있는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 가을의 열매를 생각하거나 지난 겨울의 낙엽 떨어진 것을 그리워하고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 순간 잎사귀가 나는 것, 꽃이 피는 것 이것을 잘 볼 줄 아는 것. 생생하게 볼 줄 아는 것. 바로 오늘의 모습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난 경험이 나에게 지혜로 작용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경험이 지혜가 되게 하려면 바로 지금 눈으로 늘 보고 그것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경험이 무시된다는 것이 아니라 늘 현재의 초심으로, 현재의 마음을 생생하게 가져야만 그것이 지혜로 살아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몸을 쉬는 방법은 잘 압니다. 그런데 마음을 쉴 줄은 모릅니다. 마음도 쉬어줘야 합니다. 마음은 어떻게 쉽니까? 몸은 저녁에 자면 쉬어지는데 마음은 바로 늘 자기 자신의 순수한 마음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초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입니다. 우리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는 마음, 그 마음을 일으키는 마음이 정말 마음을 쉬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광주·전남지사=조영훈 지사장

 

이 법문은 4월5일 봉행된 광주 증심사 명사초청법회에서 금강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금강 스님

해인사 승가대를 수료하고 중앙승가대에서 불교학을 전공했다. 1993년 중앙승가대 총학생회장,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추진회 공동대표, 전국불교운동연합 부의장을 역임했다. 현재 해남 미황사 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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