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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륜성왕사상의 수용

불교적 제왕의 신성 빌려 국왕 권위 강화

정법에 의한 통치로 이상국가 구현
역사상 인도의 아쇼카왕이 대표적


고구려·백제·신라 불교식 왕호 사용
성왕·흥륜사도 전륜성왕서 따온 말

 

 

▲불교사에서 전륜성왕으로 부각된 인물이 아쇼카왕이다. 사진은 부처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의 아쇼카 석주.

 


불교를 수용한 삼국은 불교의 종교적 신성을 빌려서 국왕의 권위를 더욱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정치이념인 전륜성왕사상을 각각 받아들여 각국의 정치에 적용하고 있었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은 정법(正法)에 의한 통치로 이 세상에 이상국가를 실현한다는 제왕이다. 전륜성왕은 세간적인 존재로 출세간의 붓다와 상대적 위치에 있다. 전륜성왕은 32상(相)을 갖추고, 칠보(七寶)를 지니고 있으며, 사신덕(四神德)을 성취하고 사병(四兵)을 거느리고 사천하(四天下)를 다스리며 1천 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고 한다. 32상이란 32가지의 뛰어난 용모와 미묘한 형상을 말하는데, 결국 그의 용모는 붓다와 비슷하게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사에서 전륜성왕의 구현자로 부각된 인물은 아소카왕, 즉 아육왕이다. 범본 ‘아육왕전(阿育王傳)’이 처음으로 한역된 것은 306년이고, 6세기 초에는 이를 다시 10권본 ‘아육왕경’으로 재번역 하였다.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아육왕을 이상적인 불교의 상징으로 존숭했는데, 아육왕이 만든 불상이나 탑과 관련된 설화가 유포되기도 했다.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조에는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의 다음 기록을 인용하여 요동의 고구려 탑에 관해 서술했다.


고구려 요동성 옆에 있는 탑은 옛 노인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렇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 가서 그 구름 속을 찾아보았더니 한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가면 홀연히 없어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옆에 3층의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위는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승려를 찾아보니, 다만 무성한 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한 길쯤 파보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또 파보니 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는 범서(梵書)가 씌어 있었다. 시신(侍臣)이 그 글을 알아보고 말했다.


“이것은 불탑입니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시신은 답했다. “옛날 한나라 때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이라 합니다.”
성왕(聖王)은 이로 인하여 신앙심이 생겨 7층목탑을 세웠는데, 그 후에 불법이 전래하자 그 시말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높이를 줄이다가 본 탑이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이 통일했던 염부제주(閻浮提洲)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도선(道宣 596~667)이 ‘삼보감통록’을 편찬하던 664년은 고구려 말에 해당한다. 요동성의 아육왕탑설화에는 고구려의 지배 세력이 아육왕과의 인연을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위엄을 높이려 했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고구려 지배층에서 전륜성왕사상을 수용한 보다 구체적인 예는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의 묵서명(墨書銘)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묵서 중에는 칠보구생(七寶俱生) 운운의 기록이 보이고 칠보는 전륜성왕이 갖추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자료를 고구려 지배층의 전륜성왕 이념의 수용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라의 전륜성왕사상 수용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분명하다. 인도의 아육왕이 주성(鑄成)하려다가 이룩하지 못한 석가삼존상이 신라에서는 훌륭하게 이루어졌다는 황룡사 장육상의 조상 연기설화를 통해서 진흥왕이 전륜성왕사상을 그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흥왕 35년(574) 3월에 주성된 이 황룡사 장육상은 높이 1장 6척의 거대한 석가여래로 두 협시보살을 거느린 입상(立像)이었다. 그러나 몽고병화에 불타버린 황룡사의 법당 터에는 지금 이 삼존불을 모셨던 자연석으로 만든 석대좌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에는 전하는 장육상의 조상 연기설화는 다음과 같다.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떠와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즉 울주 곡포(谷浦)에 닿았다. 조사해 보니 첩문(牒文)이 있어, 서축(西竺)의 아육왕(阿育王)이 황철(黃鐵) 5만7000근과 황금 3만분을 모아서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다 이루지 못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인연 있는 나라에 가서 장육존용(丈六尊容)을 이루어 달라고 하였고, 1불과 2보살의 상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縣)의 관리가 문서로 자세히 아뢰니 사자를 시켜 그 현성(縣城)의 높고 메마른 땅을 택하여 동축사(東竺寺)를 지어 그 삼존불을 모시고 금과 철은 서울로 옮겨 대건(大建) 6년 3월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했는데 단번에 이루어 졌다. 그 무게는 3만5007근으로 황금 1만198분이 들었으며, 두 보살상에는 철 1만2000근과 황금 1만136분이 들었다.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1척 가량이나 젖었는데, 대왕이 돌아가실 징조였다.

 

 

▲‘삼국유사’에는 인도 아쇼카왕이 조성하려다 실패한 석가삼존불을 신라 진흥왕이 완성해 경주 황룡사에 모셨다는 연기설화가 전해진다. 사진은 진흥왕이 아쇼카왕이 보낸 철과 금으로 석가삼존불을 조성해 모셨다는 황룡사 터.

 


이 설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인도의 아육왕이 석가삼존상을 주성하려다가 이룩하지 못하고 인연 있는 국토에 이르러 장육의 존용(尊容)이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며 배에 실어 보낸 금과 철이 신라에 이르러 불상이 훌륭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설화를 가진 불상은 일찍이 중국에도 있었다. 아육왕이 세웠다는 8만4000탑의 기단석의 자리가 발견되었다든가, 혹은 아육왕이 만들었다는 불상이 이미 4세기 남조의 진대(晉代)에 중국의 곳곳에서 기적적으로 나타나 여러 가지 경이로운 영험을 나타냈다고 하는 기록이 전한다.


중국의 경우, 아육왕이 직접 만든 불상이 홀연히 나타났다고 했는데, 황룡사의 장육상은 아육왕도 이룩하지 못한 것을 신라의 진흥왕은 쉽게 완성했다고 한다. 아육왕이 주조에 세 번이나 실패하고 배에 실어 보낸 금과 철이 남섬부주(南閻浮提) 16국과 500 중국, 7000 소국, 8만 촌락을, 두루 다녔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그것을 잠깐 사이에 훌륭히 이루었다는 것이다. 아소카왕으로부터 진흥왕까지의 7백년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이 세상 염부제의 크고 작은 몇 백개 나라를 배로 떠돌아다녔다. 이로 해서 이 두 지배자는 인연의 실로 묶여졌다. 이 장육상의 설화를 통해 진흥왕은 전륜성왕의 정치이념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흥왕은 두 아들의 이름을 전륜성왕이 굴리는 네 보륜(寶輪) 중의 금륜(金輪)과 동륜(銅輪) 등에서 취하기도 할 정도로 전륜성왕의 정치이념을 수용하고 있었다.


백제에서도 고구려나 신라와 마찬가지로 불교식 왕호를 사용한 예가 있다. 성왕(聖王)·위덕왕(威德王)·법왕(法王) 등이 그 경우다. 특히 성왕은 전륜성왕으로부터 유래한 것 같다. 미륵불광사사적기의 기록에 의하면, 성왕 4년(526)에 겸익(謙益)이 인도로부터 귀국하자 왕은 교외에까지 나가서 그를 맞이하고 흥륜사(興輪寺)에 안치시켰다고 한다. 아마도 흥륜사의 륜(輪)은 전륜성왕이 굴리는 법륜(法輪)을 의미한 듯한데, 성왕이라는 왕호와 흥륜이라는 절 이름은 모두 전륜성왕과 무관하지 않다.


삼국의 왕실에서는 모두 전륜성왕사상을 받아들였다. 전륜성왕은 정법(正法)에 의한 통치로 이 세상에 이상 국가를 실현한다는 제왕이다. 전륜성왕은 세간적인 존재로 출세간의 붓다와 상대적 위치에 있다. 전륜성왕이 금륜보를 타고 동서남북의 여러 지방을 주유(周遊)하면, 그곳의 대소 국왕이 서로 다투어 나라와 인민을 바쳐 그 신하가 되기를 청한다. 전륜성왕은 자기에게 귀순하는 왕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만두어라, 여러분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 공양해 바쳤다. 다만 마땅히 정법으로서 다스리고 교화하여 치우치거나 굽게 하지 말고, 나라 안에 법답지 않은 행이 없도록 하라.”


이처럼 전륜성왕의 정치는 정법의 실현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세기경(世紀經)’ 전륜성왕품에는 전륜성왕이 다스리게 될 때의 아름다운 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전륜성왕이 이 염부제를 다스릴 때에는 그 땅은 평평하여 가시덤불·구덩이·언덕들이 없었다. 또 모기·등에·벌·전갈·파리·벼룩·뱀·도마뱀 등 악한 벌레가 없었다. 돌과 모래와 기와조각들은 자연히 땅 속으로 빠지고 금은과 보옥은 땅 위로 나타났다. 사시는 고르고 화해서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았다. 그 땅은 유연하여 티끌의 더러움이 없으며 기름을 땅에 바른 것 같아 깨끗하고 광택이 있어서 티끌의 더러움은 없었다. 전륜성왕이 다스릴 때의 땅도 또한 이와 같았다. 땅에는 청정한 샘물이 솟아 다할 때가 없으며 부드러운 풀이 나서 겨울이나 여름이나 언제나 푸르렀다. 수목은 무성하고 꽃과 열매는 풍성하였다. 땅에는 부드러운 풀이 나서 빛은 공취와 같고 향기는 바사와 같으며 연하기는 하늘 옷과 같았다. 발로 땅을 밟으면 땅은 4촌이나 들었다가 발을 들면 도로 올라와 빈 곳이 없었다. 자연의 멥쌀은 등겨가 없고 온갖 맛을 갖추고 있었다.”


▲김상현 교수
경에는 계속해서 과실나무, 향나무, 그리고 옷과 그릇과 악기 등을 열매 맺는 옷 나무, 그릇 나무, 악기 나무 등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결국 전륜성왕이 다스리게 될 때의 세상은 아름답게 될 것이라는 것인데, 그 아름다운 세상이란 전륜성왕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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